가라(唐)에 관한 추가~!
가라(唐)이 조선을 뜻하는 근거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번 연구해 볼만하다고 봅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들어오면 그때가지 중세적인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승려나 귀족, 무사 등이 행한 예능과는 전혀 다른 서민적인 예능이 여러 지역에서 발달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있어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그 왕래하는 지역에 사는 서민들에 있어서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악대와 춤이었다. 그 독특한 의상과 동작, 선율은 당시의 일본에 있어서 큰 자극이었고, 곧 이것을 모방하여 제례행사나 마을행사에 도입하는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에도중기에는 각지에서 통신사를 흉내낸 춤이나 가장행렬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일괄하여 당인춤(唐人踊り) 또는 당인행렬(唐人行列)라 불렀다.
唐이라는 명칭은 글자그대로라면 중국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예부터 단순히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唐이나 唐人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唐人이라는 말을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1719년 사행에 수행한 제술관(製述官) 신유한이 쓴 일본 사행일록(使行日錄) 『해유록(海遊錄)』18)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유한은 통신사 안내역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唐人이라고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필적을 唐人필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도에서인가?" 하고 물으니, 그는 "국가에서는 사신일행은 客人 또는 朝鮮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대부분의 민속은 예부터 당신나라의 문물을 中華와 동등하게 말해 왔으므로 唐人이라는 표현을 써서 이를 경모하는 것이다."19)라고 하였다.
1600년 중반부터 조선통신사의 춤과 행렬을 모방한 당인행렬과 당인춤을 계속하는 마을이 있어, 그것이 마을축제의 일부로써 도입되어 정착해왔다. 현재에는 미에현(三重縣) 쓰시(津市)의 당인행렬(唐人行列), 미에현 스즈카시(鈴鹿市)의 당인춤(唐人踊り, 오카야마현(岡山縣) 우시마도초(牛窓町)의 당자춤(唐子踊り) 만이 전하고 있다.
이 두부에 관해 재일교포"김달수"씨는 조선인 이종환이 원조라 하지만 아래의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좀 다릅니다.
두부를 만드는 기술이 임진왜란 대 일본에 건너간 朴好仁에 의해 四國와 高知市 일대에 처음 전해진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박호인은 1617년 두 번째의 통신사 일행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20년 간 지금의 高知市에서 藩主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두부 만드는 기술을 저수 시켰다. 당시에는 그의 일족이 살던 高知城 남쪽의 鏡川 북쪽을 唐人거리라 불렀으며 지금도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唐人이란, 중국의 唐나라가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외국인에 대한 호칭으로, 우리 겨레를 이렇게 불렀다).
한번 연구해 볼만하다고 봅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들어오면 그때가지 중세적인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승려나 귀족, 무사 등이 행한 예능과는 전혀 다른 서민적인 예능이 여러 지역에서 발달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있어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그 왕래하는 지역에 사는 서민들에 있어서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악대와 춤이었다. 그 독특한 의상과 동작, 선율은 당시의 일본에 있어서 큰 자극이었고, 곧 이것을 모방하여 제례행사나 마을행사에 도입하는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에도중기에는 각지에서 통신사를 흉내낸 춤이나 가장행렬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일괄하여 당인춤(唐人踊り) 또는 당인행렬(唐人行列)라 불렀다.
唐이라는 명칭은 글자그대로라면 중국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예부터 단순히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唐이나 唐人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唐人이라는 말을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1719년 사행에 수행한 제술관(製述官) 신유한이 쓴 일본 사행일록(使行日錄) 『해유록(海遊錄)』18)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유한은 통신사 안내역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唐人이라고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필적을 唐人필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도에서인가?" 하고 물으니, 그는 "국가에서는 사신일행은 客人 또는 朝鮮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대부분의 민속은 예부터 당신나라의 문물을 中華와 동등하게 말해 왔으므로 唐人이라는 표현을 써서 이를 경모하는 것이다."19)라고 하였다.
1600년 중반부터 조선통신사의 춤과 행렬을 모방한 당인행렬과 당인춤을 계속하는 마을이 있어, 그것이 마을축제의 일부로써 도입되어 정착해왔다. 현재에는 미에현(三重縣) 쓰시(津市)의 당인행렬(唐人行列), 미에현 스즈카시(鈴鹿市)의 당인춤(唐人踊り, 오카야마현(岡山縣) 우시마도초(牛窓町)의 당자춤(唐子踊り) 만이 전하고 있다.
이 두부에 관해 재일교포"김달수"씨는 조선인 이종환이 원조라 하지만 아래의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좀 다릅니다.
두부를 만드는 기술이 임진왜란 대 일본에 건너간 朴好仁에 의해 四國와 高知市 일대에 처음 전해진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박호인은 1617년 두 번째의 통신사 일행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20년 간 지금의 高知市에서 藩主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두부 만드는 기술을 저수 시켰다. 당시에는 그의 일족이 살던 高知城 남쪽의 鏡川 북쪽을 唐人거리라 불렀으며 지금도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唐人이란, 중국의 唐나라가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외국인에 대한 호칭으로, 우리 겨레를 이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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