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권/대성권 명인 요승광 선생 방한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의권연구회/한국의권종훈무관 입니다.
대한민국의권연구회/한국의권종훈무관에서는 아래와 같이 의권/대성권 3대 전인 요승광 선생을 모시고 의권/대성권의 바른 정보 전달과 수련을 위해 특별 수련회를 개최하오니 의권/대성권/참장공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아 래 -
수련날짜: 5월7일(토요일)
수련시간: 오후4시~오후7시
수련장소: 종로구민청소년문화센터(혜화역에서 마을버스로 약10분 소요, 아래 약도 참조)
수련복장: 편안한 복장 및 신발 착용
수련회비: 4만원( 저녁 식사 참석 희망자는 식사비 15,000원 포함 55,000원 입금 )
수련내용: 양생장, 기격장, 시력, 마찰보, 발력, 추수 등
신청기간: 2005년5월2일까지
1. 외환은행 620-152874-754 [예금주: 염승엽]으로 회비 4만원 입금
2. 입금후 yiquan@paran.com 혹은 의권연구회( http://www.yiquan.co.kr ) 쪽지를 이용하여 입금 사실과 함께 이름, 휴대폰 번호를 적어서 보냅니다.
3. 입금 확인후 입금 확인에 대한 문자 메세지를 보내드립니다.
4.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요승광 선생은 현재 의권의 저명한 대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1953년 북경에서 출생하였는데 원적은 절강성 항현(杭縣)으로 당대 무술 대사인 의권의 제2대 장문인 요종훈(姚宗勛) 선생의 장자이다.
선생은 8세부터 부친에게서 의권을 배우기 시작하여 부친의 정성어린 지도와 배양, 스스로의 수 십 년의 연마를 거쳐 의권의 정수를 얻어 그 의미를 모두 깨닫고 자신만의 풍격까지 갖추어 약관의 나이에 이미 의권계와 국내외에서 명성을 날렸다.
1982년 4월, 북경에서 거행된 제1회 전국 산수 대회에서는 단 47초 만에 상대를 기절 시켜 버렸는데 경기 후에 주최측에서는 선생의 주먹의 힘이 너무 강하여 위험하다고 여겨 기권 방식으로 선생의 다음 경기 참가를 중단시켰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선생으로 인하여 중 주먹으로 머리를 가격하는 부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선생은 “주먹으로 규칙을 바꾼 사람”으로 불리었다.
선생은 사람됨이 바르고 솔직하며 의연하고 자애로워 평소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가 쉽다.
선생의 무술공부는 이미 지극한 경지에 도달해 있으며 발력은 빠르고 매섭다. 동작을 하면 전신이 고동쳐 일촉즉발하고 결과가 분명하여 그 기세가 전인들이 말하는 “사람을 치는 것이 그림을 걸어 놓는 듯하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겨루기에서 선생이 강조하는 것은 우의를 증진하고 기예를 교류하는 것이고 잔인한 기술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93년 초, 한국의 태권도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인 태권도 4단의 사범이 북경에 왔을 때, 그는 중국 무술계의 친구에게 장난으로 “중국의 무술은 실전을 중시하지 않는다.” 고 말하자, 그 친구는 한국의 사범에게 즉시 선생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흔쾌히 도전에 응하여 사범이 묵고 있던 왕부관에서 만나 겨루어 보기로 하였다.
대결이 시작되자 선생은 빠르게 연속하여 사범의 이마를 가볍게 쳤으나 그는 미쳐 반응조차 보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는 방이 너무 좁아서 주먹과 발차기를 펼치기가 쉽지 않으니 홀로 내려가서 다시 한번 겨루자고 청하였다.
홀에서 사범이 막 발을 들어 공격하려는 순간 선생은 순식간에 다가가서 일촉즉발하자 상대방은 즉시 바닥에 뒤집혀 쳐 박히고 말았다.
일어나 정신이 아직도 혼미한 순간에도 그는 탄복하여 “요 선생님은 너무 대단하십니다.
선생이 저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권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사람을 때려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보법이 너무 빨라 저는 전혀 반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무술은 정말 대단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마음을 비우고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후에 그는 선생에게, 요 선생께서 국제 태권도 대회에 참가하신다면 분명히 세계 제일이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사범의 제자는 올림픽 태권도 부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그 후 프랑스 출신의 유럽 자유 격투 준우승자와 겨루어 이겼고, 싱가포르의 무술가인 사왕과 겨루어 이겼으며, 중국의 여러 성에서 무술을 가르칠 때 각 파의 사람들과 겨루기를 하여 모두 승리하였다.
88년, 선생과 아우이신 요승영 선생은 아시아 무술 연합회 제일 부주석인 홍콩 무술 연합회의 곽진환(藿震寰) 선생의 초청을 받아 홍콩을 방문하였다.
사방 100여 미터 공간의 연무장에서 두 사람은 홍콩의 대표 무술가들과 30여 차례 겨루기를 하여 모두 승리하였다.
홍콩의 무술계에서는 “요 선생의 무술은 보여주기 위한 무술이 아니라 실전의 절기로서 매우 실제적이다.”
“요씨 형제 두 분은 모두 발력에 능하여 설사 키가 크고 몸집이 좋더라도 마찬가지로 튕겨져 나가 버린다.”
“일단 접촉하면 손이 감겨 버린 듯이 힘을 쓸 수가 없고 억지로 강하게 버티려 하면 곧 더 큰 힘을 받아 더 강하게 넘어지게 된다.”라고 평가하였다.
홍콩의 각 뉴스 미디어와 신문에서는 이 기간 중에 요 선생의 방문과 겨루기 그리고 교학의 내용을 다량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홍콩 방문 기간은 3개월이었으나 홍콩 각계 인사들의 만류로 방문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되었고 홍콩에서 를 비디오 테이프로 촬영하였다.
홍콩의 대중 매체에서는 이 때의 센세이션을 가리켜 “이는 근년 들어 홍콩에서는 보기 드문 무술의 열기였다.”라고 보도하였다.
90년 선생은 또 요씨 의권 연구회 회장이며 홍콩 태극권 총회 회장인 서환광(徐煥光) 선생의 초청으로 다시 홍콩을 방문하여 강학을 하였고 홍콩 무술 연합 대회에서 의권 공개 시범을 보였다.
4개월의 강학 기간 중 방문자들이 계속 이어져 홍콩에서 의권이 뿌리를 내리는 기초가 되었다.
한편, 일본의 9개 태기권(太氣拳) 조직(태기권은 의권에서 원류하였으며 창시자인 택정건일(澤井健一)은 요종훈 선생의 동문 후배로서, 그는 생전에 “내가 일본 제일이라면, 요종훈 선생은 세계 제일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고 한다.)은 중국의 의권 각파를 비교 고찰한 뒤에 매년 종훈 무관(요종훈 선생의 존함을 따서 무관의 이름을 붙였음)을 방문하여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의연히 결정하였다.
92년 선생은 일본 횡빈(橫濱) 태기권 연구회 회장 천야민(天野敏)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을 방문하여 강학을 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일본의 공수도 전국 우승자, 준우승자와 겨루어 모두 이겨 일본 무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 동경 태기권 연구회 회장 구보용인(久保勇人)은 감탄하여 “나의 사형은 중국 제일인데 그가 바로 요승광 사형이다.”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이제까지 겨루기를 하여 실수한 적이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요승광 선생은 진정한 중국 권학의 지킴이요, 계승자요, 발양자라고 여기고 있다.
선생은 80년부터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82년경 에는 하남 귀주, 산서, 산동 등 국내의 여러 곳에서 강학을 하여 학생이 2만 여명에 이른다. 또 북경중의약대학, 북경대학, 북경공업대학에서도 교학 활동을 전개하여 대학생 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선생은 교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고 있으며, 감정을 존중하고 이치를 중시하며 사람의 자질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 베풀고, 겸손한 마음으로 학생들이 높은 무학의 경지에 오르는데 사다리가 되고자 하신다.
선생은 부친의 과학적인 훈련 방법의 기초 위에서 지속적으로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고, 실사구시의 태도와 깊이 있는 저력으로 초석을 삼으며, 현대의 심리학, 역학(力學), 철학, 생리학, 해부학 등의 지식을 결합하고, 일체의 미신적인 요소를 버리고, 선인의 뒤를 잇고 또 갱신하여 의권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의권을 계통화, 이론화하고 양생과 이치와 호신이 하나가 되도록 만든 무술인 이다.
또 선생의 사적은 국내외 여러 신문과 잡지에 등재되었는데 일본의 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다량의 겨루기와 교학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실었다.
선생은 근년에 국내의 여러 무술 잡지에 의권을 시리즈로 소개하였으며 비디오 테이프와 DVD도 출판을 하였다.
■ 청소년문화센터 찾아오시는 길

ㅇ교통편 : 전철 4호선 혜화역 하차 2번 출구 → 마을버스 8번(혜화역에서 승차하여 샘미용실 하차 후 전방 10미터 오른쪽 방면)
대한민국의권연구회/한국의권종훈무관에서는 아래와 같이 의권/대성권 3대 전인 요승광 선생을 모시고 의권/대성권의 바른 정보 전달과 수련을 위해 특별 수련회를 개최하오니 의권/대성권/참장공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아 래 -
수련날짜: 5월7일(토요일)
수련시간: 오후4시~오후7시
수련장소: 종로구민청소년문화센터(혜화역에서 마을버스로 약10분 소요, 아래 약도 참조)
수련복장: 편안한 복장 및 신발 착용
수련회비: 4만원( 저녁 식사 참석 희망자는 식사비 15,000원 포함 55,000원 입금 )
수련내용: 양생장, 기격장, 시력, 마찰보, 발력, 추수 등
신청기간: 2005년5월2일까지
1. 외환은행 620-152874-754 [예금주: 염승엽]으로 회비 4만원 입금
2. 입금후 yiquan@paran.com 혹은 의권연구회( http://www.yiquan.co.kr ) 쪽지를 이용하여 입금 사실과 함께 이름, 휴대폰 번호를 적어서 보냅니다.
3. 입금 확인후 입금 확인에 대한 문자 메세지를 보내드립니다.
4.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요승광 선생은 현재 의권의 저명한 대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1953년 북경에서 출생하였는데 원적은 절강성 항현(杭縣)으로 당대 무술 대사인 의권의 제2대 장문인 요종훈(姚宗勛) 선생의 장자이다.
선생은 8세부터 부친에게서 의권을 배우기 시작하여 부친의 정성어린 지도와 배양, 스스로의 수 십 년의 연마를 거쳐 의권의 정수를 얻어 그 의미를 모두 깨닫고 자신만의 풍격까지 갖추어 약관의 나이에 이미 의권계와 국내외에서 명성을 날렸다.
1982년 4월, 북경에서 거행된 제1회 전국 산수 대회에서는 단 47초 만에 상대를 기절 시켜 버렸는데 경기 후에 주최측에서는 선생의 주먹의 힘이 너무 강하여 위험하다고 여겨 기권 방식으로 선생의 다음 경기 참가를 중단시켰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선생으로 인하여 중 주먹으로 머리를 가격하는 부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선생은 “주먹으로 규칙을 바꾼 사람”으로 불리었다.
선생은 사람됨이 바르고 솔직하며 의연하고 자애로워 평소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가 쉽다.
선생의 무술공부는 이미 지극한 경지에 도달해 있으며 발력은 빠르고 매섭다. 동작을 하면 전신이 고동쳐 일촉즉발하고 결과가 분명하여 그 기세가 전인들이 말하는 “사람을 치는 것이 그림을 걸어 놓는 듯하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겨루기에서 선생이 강조하는 것은 우의를 증진하고 기예를 교류하는 것이고 잔인한 기술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93년 초, 한국의 태권도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인 태권도 4단의 사범이 북경에 왔을 때, 그는 중국 무술계의 친구에게 장난으로 “중국의 무술은 실전을 중시하지 않는다.” 고 말하자, 그 친구는 한국의 사범에게 즉시 선생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흔쾌히 도전에 응하여 사범이 묵고 있던 왕부관에서 만나 겨루어 보기로 하였다.
대결이 시작되자 선생은 빠르게 연속하여 사범의 이마를 가볍게 쳤으나 그는 미쳐 반응조차 보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는 방이 너무 좁아서 주먹과 발차기를 펼치기가 쉽지 않으니 홀로 내려가서 다시 한번 겨루자고 청하였다.
홀에서 사범이 막 발을 들어 공격하려는 순간 선생은 순식간에 다가가서 일촉즉발하자 상대방은 즉시 바닥에 뒤집혀 쳐 박히고 말았다.
일어나 정신이 아직도 혼미한 순간에도 그는 탄복하여 “요 선생님은 너무 대단하십니다.
선생이 저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권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사람을 때려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보법이 너무 빨라 저는 전혀 반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무술은 정말 대단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마음을 비우고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후에 그는 선생에게, 요 선생께서 국제 태권도 대회에 참가하신다면 분명히 세계 제일이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사범의 제자는 올림픽 태권도 부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그 후 프랑스 출신의 유럽 자유 격투 준우승자와 겨루어 이겼고, 싱가포르의 무술가인 사왕과 겨루어 이겼으며, 중국의 여러 성에서 무술을 가르칠 때 각 파의 사람들과 겨루기를 하여 모두 승리하였다.
88년, 선생과 아우이신 요승영 선생은 아시아 무술 연합회 제일 부주석인 홍콩 무술 연합회의 곽진환(藿震寰) 선생의 초청을 받아 홍콩을 방문하였다.
사방 100여 미터 공간의 연무장에서 두 사람은 홍콩의 대표 무술가들과 30여 차례 겨루기를 하여 모두 승리하였다.
홍콩의 무술계에서는 “요 선생의 무술은 보여주기 위한 무술이 아니라 실전의 절기로서 매우 실제적이다.”
“요씨 형제 두 분은 모두 발력에 능하여 설사 키가 크고 몸집이 좋더라도 마찬가지로 튕겨져 나가 버린다.”
“일단 접촉하면 손이 감겨 버린 듯이 힘을 쓸 수가 없고 억지로 강하게 버티려 하면 곧 더 큰 힘을 받아 더 강하게 넘어지게 된다.”라고 평가하였다.
홍콩의 각 뉴스 미디어와 신문에서는 이 기간 중에 요 선생의 방문과 겨루기 그리고 교학의 내용을 다량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홍콩 방문 기간은 3개월이었으나 홍콩 각계 인사들의 만류로 방문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되었고 홍콩에서 를 비디오 테이프로 촬영하였다.
홍콩의 대중 매체에서는 이 때의 센세이션을 가리켜 “이는 근년 들어 홍콩에서는 보기 드문 무술의 열기였다.”라고 보도하였다.
90년 선생은 또 요씨 의권 연구회 회장이며 홍콩 태극권 총회 회장인 서환광(徐煥光) 선생의 초청으로 다시 홍콩을 방문하여 강학을 하였고 홍콩 무술 연합 대회에서 의권 공개 시범을 보였다.
4개월의 강학 기간 중 방문자들이 계속 이어져 홍콩에서 의권이 뿌리를 내리는 기초가 되었다.
한편, 일본의 9개 태기권(太氣拳) 조직(태기권은 의권에서 원류하였으며 창시자인 택정건일(澤井健一)은 요종훈 선생의 동문 후배로서, 그는 생전에 “내가 일본 제일이라면, 요종훈 선생은 세계 제일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고 한다.)은 중국의 의권 각파를 비교 고찰한 뒤에 매년 종훈 무관(요종훈 선생의 존함을 따서 무관의 이름을 붙였음)을 방문하여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의연히 결정하였다.
92년 선생은 일본 횡빈(橫濱) 태기권 연구회 회장 천야민(天野敏)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을 방문하여 강학을 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일본의 공수도 전국 우승자, 준우승자와 겨루어 모두 이겨 일본 무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 동경 태기권 연구회 회장 구보용인(久保勇人)은 감탄하여 “나의 사형은 중국 제일인데 그가 바로 요승광 사형이다.”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이제까지 겨루기를 하여 실수한 적이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요승광 선생은 진정한 중국 권학의 지킴이요, 계승자요, 발양자라고 여기고 있다.
선생은 80년부터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82년경 에는 하남 귀주, 산서, 산동 등 국내의 여러 곳에서 강학을 하여 학생이 2만 여명에 이른다. 또 북경중의약대학, 북경대학, 북경공업대학에서도 교학 활동을 전개하여 대학생 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선생은 교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고 있으며, 감정을 존중하고 이치를 중시하며 사람의 자질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 베풀고, 겸손한 마음으로 학생들이 높은 무학의 경지에 오르는데 사다리가 되고자 하신다.
선생은 부친의 과학적인 훈련 방법의 기초 위에서 지속적으로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고, 실사구시의 태도와 깊이 있는 저력으로 초석을 삼으며, 현대의 심리학, 역학(力學), 철학, 생리학, 해부학 등의 지식을 결합하고, 일체의 미신적인 요소를 버리고, 선인의 뒤를 잇고 또 갱신하여 의권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의권을 계통화, 이론화하고 양생과 이치와 호신이 하나가 되도록 만든 무술인 이다.
또 선생의 사적은 국내외 여러 신문과 잡지에 등재되었는데 일본의 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다량의 겨루기와 교학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실었다.
선생은 근년에 국내의 여러 무술 잡지에 의권을 시리즈로 소개하였으며 비디오 테이프와 DVD도 출판을 하였다.
■ 청소년문화센터 찾아오시는 길

ㅇ교통편 : 전철 4호선 혜화역 하차 2번 출구 → 마을버스 8번(혜화역에서 승차하여 샘미용실 하차 후 전방 10미터 오른쪽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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