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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라데와 중국의 무술이 난입 하였다!!

일본 가라데 · 중국 무술 등 난입
1909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자 군사 훈련 등의 무술 훈련은 더욱 더 어렵게 되었다. 일본 총독부는 한국의 주체적인 힘을 억압하기 위한 전략으로 집단 스포츠, 무예 또는 기타 모든 문화 활동을 엄격히 규제 · 탄압하였다. 따라서 한국 무예 역시 몇몇 사범들의 비밀 지하교습을 통해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의 가라데와 중국 무술이 소개되었다. 수박도와 태껸 사범들의 한국형 무술에 외국형 기술을 발전적으로 첨가시켰다. 이른바 중국의 소림사 무술과 일본의 가라데를 추가 · 혼합시킨 것인데, 이 새로운 형을 당수 또는 공수도라고 불렀다.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자 태권도의 발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다수의 뜻 있는 사범들이 일제하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한국 무예를 개선 · 단일화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외세의 영향으로 변질된 무술들의 난립을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형 맨손격투기로 재정립·통일시켜 국가적인 스포츠로 발전시키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청도관 · 조선연무관 · 무덕관, 개성에서 송무관 등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1946년 7월경 서울의 田祥燮, 李元國, 尹炳仁과 개성의 盧秉直 등이 주동이 되어 산재한 도장들을 총괄하는 협회부터 결성코자 2,3 차 화합을 가졌으나 실패하고, 일단 한국 무도의 표준형과 통일된 지도방법에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5, 6년간 각자의 후배만을 육성하고 있던 중 뜻하지 않은 민족의 비극6·25 동란이 터져 온 나라가 전란의 재화에 휩싸이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태권도계도 예외일 수 없이 여러 지도자들이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나 그 중에서 임시수도 부산에 와 있던 李鐘佑, 盧秉直, 黃琦, 玄鐘明, 曺寧柱, 金仁和 등이 주축이 되어 의욕에 찬 대한공수도협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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