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의 근현대사에 대하여.
이글은 www.opentaekwon.co.kr 품새 공동 연구회에 발표한 저의 글입니다.
태권도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어떤 역사의 운명과 물리적인 힘의 작용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여러 보도 자료와 관계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최홍희 씨는1918년 영천군 하가면에서 태어 났고 선천적으로 약골인(학자 풍) 그는 어릴 때는 서예로 심신을 단련했고 36년에 태껸을 배웠다고 본인의 저서인 태권도 지침에서 말하고, 1940년에 도일을 했으며 45년 제 2 차 대전 중에 일본의 학도병으로 불려갔고, 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국)하고, 46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 한다.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의 프로필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17년 생으로 42년 만주 군관 학교 2년 수료. 45년 육군 대위에 진급 한다. 50년 정보국 과장. 55년 5 사단장. 박은 58년에 육군 소장을 진급 했고, 최는 50년 정보대. 53년 정보 일반논 저술. 52년 1군단 참모장. 52년 5사단장. 54년에 육군 소장에 진급 한다. 55년 제 3 군관구. 57년에 태권도 총 본부장을 역임. 59년 국군 태권도 시범 단장. 60년 태권도 협회장.
다시 박정희의 프로필을 살펴 보자.
61년 5월 16일 혁명 성공.
61년부터 63년 까지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
63년부터 79년 대통령.
최씨는 하늘 높이 승천하는 용으로 5.16혁몀 후에 그 꼬리를 잡혔다.최는 여기서 좌천의 신세로 전방에서 61년 제 2 훈련 소장 역임.군의 이별과 함께
62년 주 말레시아 대사.
62년부터 65년 국내 대기 및 대한 태권도 협회장.
60년 후반에 캐나다로 망명(반박운동 시작).
68년 동백림 사건에 관여(60년 중후반은 해외 활동으로 박씨의 눈밖에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음).
역사에 대한 제 개인의 추정은 가능한 하고 싶지 않으나 ITF와 WTF의 배경 설명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시대와 정치적 관계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최의 일본 체류 기간은 앞에서 말했듯이 불과 5년 정도 이 기간에 최의 가라테 역사는 아마 평안형(하이얀) 1형에서 5형 그리고 잘해야 나이한찌(철기)나 바체(발색)이 정도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헌류의 기술적 구조적인 내용이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창헌류의 창작 시기는 대체로 그가 59년 군 태권도 시범단으로 아시아 및 유럽으로 순방을 마치면서(이 때는 수박도라고 하는 가라테를 했음) 새로운 형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며 5. 16 혁명 이후 61년(훈련 소장) 좌천된 최는 주 말레시아 대사로 있을 때부터 64년 전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마 창작 작업에 동원된 사범들은 그가 군 지휘하에 있을 때 알았던 장병 사범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수박도(가라테)를 했던 세대들이고 총명하고 명철한 최는 군사 정부의 숙청에 대한 돌파구 작업으로 창헌류를 만들기 시작 했을 것이다.
여기서 김운용 씨의 출현인데 68년 말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박종규 씨로부터 미국에서(유학 중) 부름을 받고 청와대 대통령 통역 보좌관으로 전격 활동하게 되고 이 때 창작된 품새도 마찬가지로 품새 창작 세대들도 가라테의 사범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로 인해 품새의 문제점도 많다고 하겠다.
만약 최가 망명을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창헌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백림 사건으로 연루되고 그와 친밀한 최덕신 주 베트남(1959) 후에 주 독일 대사의(1965) 천도교와 관계되어 캐나다로 망명을 하고 반박 운동과 함께 친북 인사로서 ITF의 총재로서 해외 할동을 하고 있는 최에 대한 모든 것은 한국에서 금지되었다. 어릴 때에 내가 운동하는 체육관에는 최씨의 글과 그림이 체육관 벽에 걸려져 있었는데 70년 정도에 어느 날 그 그림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지금에와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것은 현대판 황장엽 사건과 비슷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군사 정부의 언론통제및 제재 밑에서 공개가 잘되지 않고 극비에 붙여져 얼마 전만 해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고 이 공백의 자리를 70년에 김운용 씨가 드디어 박정희 씨의 후광으로 WTF를 창설하고 품새를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 태권도의 현대사이며 창헌류와 품새의 역사이다.
박정희와 최홍희는 소위 말하는 단구(체격이 작은)이며 나이는 박이 한 살 많으나 군 경력에는 최가 4년 정도 앞선다. 이들은 모두 소위 말하는 무인이라기 보다는 학자풍으로서 군에서 정보 기관에서 활동했으며 5.16혁명 전에는 최가 승승 장구하고 (청와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범식 등)혁명 후에 곧바로 좌천이 된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 의식이 대단했으리라 생각 한다.다음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심리적인 어떤 갈등을 알 수 있다.
혁명직후의 군요직의 인사들이 대사로 많이 파견시키고, 당시 외무부 장관인 이동원씨와 박정희씨와의 말레시아 대사관 임명을 두고 이동원 장관이 최규하 전 대통령을 말레시아 대사로 임명을 추천하고 박정희씨는 그 답으로 신경질적인;그럼 최홍희는 어짜고;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는 박정희씨의 최홍희에 대한 일말의 염치와 경쟁 의식에서 오는 대화라고 할까? 이외무부 장관의 회고의 말은 이 때부터 최씨가 반박 운동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또한 최씨는 말레시아 대사직에서 소환된 후로는 태권도를 통한 국제적인 활동이 박씨의 눈밖에 벗어났으리라 그리고 그의 대한민국 정치 생명도 끝이었다.
이것은 최씨 만이 아니라 그 당시 박씨 보다 군 서열이 높은 대다수의 장성들에게 해당된다고 하겠다.
나는 사학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더욱 아니며 평범한 일개 태권도 사범이다. 그러나 어느 날 나의 너무나 어두운 태권도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에 대한 스스로의 불만으로 하나 둘씩 알고 싶었고 그 결과 전체적인 흐름을 알게 되었다. 나의 태권도 발전에 이것은 분명히 필요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또다시 이러한 불행한 정치사로 인해 태권도가 고통스런 전철을 반복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단체나 세계 역시 지도자는 하층 구조의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정도에 의해서 지도자가 탄생된다고 한다. 우리가 똑똑하고 현명하다면 거기에 맞는 지도자가 우리에게로 온다는 것이다.
창헌류의 창헌은 최홍희 씨의 호이고 그는 탁월한 정치인적인 군인이었으며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서예 방면에서도 탁월한 필체( 이것은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의 검성이자 검신인인 미야모또 무사시의 필체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필체가 힘있게 흘리고 긴 것이 이것을 뜻함)을 가졌고 조직의 명수였다.
총명한 그는 가라테의 명인인 니시야마 히데다까의(준수한 미남 가라테 인으로서 영국에서 활동했음)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주위의 사범들과 연무선 구조의 방법을 알고 창헌류를 만들었으나 그 당시의 무력이나 운동 원리와 지식이 충분하지 못해 가라테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하겠다.
물론 창헌류의 기술의 양과 질에 있어서 솔직히 품새보다는 한수 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현자가 어떻게 동작 처리를 하느냐가 문제이다. 요즘 그들이 하는 동작은 무언가 빗나가고 있다.
초창기의 창헌류 즉 최씨가 ITF를 창설하기 전에의 국내에서의 시현은 흡사 가라테를 보는 듯 했으나 이후의 형의 움직임에는 상당히 변해 있었다.
좋은 방향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싶다.
태권도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어떤 역사의 운명과 물리적인 힘의 작용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여러 보도 자료와 관계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최홍희 씨는1918년 영천군 하가면에서 태어 났고 선천적으로 약골인(학자 풍) 그는 어릴 때는 서예로 심신을 단련했고 36년에 태껸을 배웠다고 본인의 저서인 태권도 지침에서 말하고, 1940년에 도일을 했으며 45년 제 2 차 대전 중에 일본의 학도병으로 불려갔고, 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국)하고, 46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 한다.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의 프로필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17년 생으로 42년 만주 군관 학교 2년 수료. 45년 육군 대위에 진급 한다. 50년 정보국 과장. 55년 5 사단장. 박은 58년에 육군 소장을 진급 했고, 최는 50년 정보대. 53년 정보 일반논 저술. 52년 1군단 참모장. 52년 5사단장. 54년에 육군 소장에 진급 한다. 55년 제 3 군관구. 57년에 태권도 총 본부장을 역임. 59년 국군 태권도 시범 단장. 60년 태권도 협회장.
다시 박정희의 프로필을 살펴 보자.
61년 5월 16일 혁명 성공.
61년부터 63년 까지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
63년부터 79년 대통령.
최씨는 하늘 높이 승천하는 용으로 5.16혁몀 후에 그 꼬리를 잡혔다.최는 여기서 좌천의 신세로 전방에서 61년 제 2 훈련 소장 역임.군의 이별과 함께
62년 주 말레시아 대사.
62년부터 65년 국내 대기 및 대한 태권도 협회장.
60년 후반에 캐나다로 망명(반박운동 시작).
68년 동백림 사건에 관여(60년 중후반은 해외 활동으로 박씨의 눈밖에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음).
역사에 대한 제 개인의 추정은 가능한 하고 싶지 않으나 ITF와 WTF의 배경 설명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시대와 정치적 관계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최의 일본 체류 기간은 앞에서 말했듯이 불과 5년 정도 이 기간에 최의 가라테 역사는 아마 평안형(하이얀) 1형에서 5형 그리고 잘해야 나이한찌(철기)나 바체(발색)이 정도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헌류의 기술적 구조적인 내용이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창헌류의 창작 시기는 대체로 그가 59년 군 태권도 시범단으로 아시아 및 유럽으로 순방을 마치면서(이 때는 수박도라고 하는 가라테를 했음) 새로운 형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며 5. 16 혁명 이후 61년(훈련 소장) 좌천된 최는 주 말레시아 대사로 있을 때부터 64년 전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마 창작 작업에 동원된 사범들은 그가 군 지휘하에 있을 때 알았던 장병 사범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수박도(가라테)를 했던 세대들이고 총명하고 명철한 최는 군사 정부의 숙청에 대한 돌파구 작업으로 창헌류를 만들기 시작 했을 것이다.
여기서 김운용 씨의 출현인데 68년 말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박종규 씨로부터 미국에서(유학 중) 부름을 받고 청와대 대통령 통역 보좌관으로 전격 활동하게 되고 이 때 창작된 품새도 마찬가지로 품새 창작 세대들도 가라테의 사범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로 인해 품새의 문제점도 많다고 하겠다.
만약 최가 망명을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창헌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백림 사건으로 연루되고 그와 친밀한 최덕신 주 베트남(1959) 후에 주 독일 대사의(1965) 천도교와 관계되어 캐나다로 망명을 하고 반박 운동과 함께 친북 인사로서 ITF의 총재로서 해외 할동을 하고 있는 최에 대한 모든 것은 한국에서 금지되었다. 어릴 때에 내가 운동하는 체육관에는 최씨의 글과 그림이 체육관 벽에 걸려져 있었는데 70년 정도에 어느 날 그 그림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지금에와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것은 현대판 황장엽 사건과 비슷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군사 정부의 언론통제및 제재 밑에서 공개가 잘되지 않고 극비에 붙여져 얼마 전만 해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고 이 공백의 자리를 70년에 김운용 씨가 드디어 박정희 씨의 후광으로 WTF를 창설하고 품새를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 태권도의 현대사이며 창헌류와 품새의 역사이다.
박정희와 최홍희는 소위 말하는 단구(체격이 작은)이며 나이는 박이 한 살 많으나 군 경력에는 최가 4년 정도 앞선다. 이들은 모두 소위 말하는 무인이라기 보다는 학자풍으로서 군에서 정보 기관에서 활동했으며 5.16혁명 전에는 최가 승승 장구하고 (청와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범식 등)혁명 후에 곧바로 좌천이 된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 의식이 대단했으리라 생각 한다.다음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심리적인 어떤 갈등을 알 수 있다.
혁명직후의 군요직의 인사들이 대사로 많이 파견시키고, 당시 외무부 장관인 이동원씨와 박정희씨와의 말레시아 대사관 임명을 두고 이동원 장관이 최규하 전 대통령을 말레시아 대사로 임명을 추천하고 박정희씨는 그 답으로 신경질적인;그럼 최홍희는 어짜고;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는 박정희씨의 최홍희에 대한 일말의 염치와 경쟁 의식에서 오는 대화라고 할까? 이외무부 장관의 회고의 말은 이 때부터 최씨가 반박 운동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또한 최씨는 말레시아 대사직에서 소환된 후로는 태권도를 통한 국제적인 활동이 박씨의 눈밖에 벗어났으리라 그리고 그의 대한민국 정치 생명도 끝이었다.
이것은 최씨 만이 아니라 그 당시 박씨 보다 군 서열이 높은 대다수의 장성들에게 해당된다고 하겠다.
나는 사학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더욱 아니며 평범한 일개 태권도 사범이다. 그러나 어느 날 나의 너무나 어두운 태권도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에 대한 스스로의 불만으로 하나 둘씩 알고 싶었고 그 결과 전체적인 흐름을 알게 되었다. 나의 태권도 발전에 이것은 분명히 필요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또다시 이러한 불행한 정치사로 인해 태권도가 고통스런 전철을 반복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단체나 세계 역시 지도자는 하층 구조의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정도에 의해서 지도자가 탄생된다고 한다. 우리가 똑똑하고 현명하다면 거기에 맞는 지도자가 우리에게로 온다는 것이다.
창헌류의 창헌은 최홍희 씨의 호이고 그는 탁월한 정치인적인 군인이었으며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서예 방면에서도 탁월한 필체( 이것은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의 검성이자 검신인인 미야모또 무사시의 필체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필체가 힘있게 흘리고 긴 것이 이것을 뜻함)을 가졌고 조직의 명수였다.
총명한 그는 가라테의 명인인 니시야마 히데다까의(준수한 미남 가라테 인으로서 영국에서 활동했음)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주위의 사범들과 연무선 구조의 방법을 알고 창헌류를 만들었으나 그 당시의 무력이나 운동 원리와 지식이 충분하지 못해 가라테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하겠다.
물론 창헌류의 기술의 양과 질에 있어서 솔직히 품새보다는 한수 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현자가 어떻게 동작 처리를 하느냐가 문제이다. 요즘 그들이 하는 동작은 무언가 빗나가고 있다.
초창기의 창헌류 즉 최씨가 ITF를 창설하기 전에의 국내에서의 시현은 흡사 가라테를 보는 듯 했으나 이후의 형의 움직임에는 상당히 변해 있었다.
좋은 방향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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