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do
게시판

태권도와 게임의 룰: 선수에겐 격려를..비난보다는 비판이 필요할 때.

특이하게도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에게는 격려보다 비난을 많이 하고 있다. 금메달리스트에게 말이다. 분명 비판은 좋은 것이지만 비난은 무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문화에 유독 두드러지는 예의 혹은 자존심의 발로라고 본다. 즉 내가 속한 공동체 또는 바라는 공동체가 그외의 집단에 의해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그러한 풍류적 기질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굴절된 근세 이후를 따라 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글을 쓰는 이유는 비난이 비판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1. 태권도와 축구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죽음의 조에서 탈락한 나이지리아와 아르헨티나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팀은 영국과 스웨덴 물론 충분한 자격을 갖춘 팀들이다. 특히 영국과 아르헨의 경기는 먼저 초반에 선취득점한 영국의 지루한 지키기였고 영국은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가깝게는 이번 올림픽에서 8강진출의 업적을 세운 한국의 말리전을 들수 있다.

10분새에 3골을 따라잡은 한국의 이후 플레이는 아마도 이번 태권도 금메달 결정전의 승자 장지원 선수의 경기처럼 혹자들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필자 역시 끼어 있다. 두 경기 모두 필자는 화를 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경기의 비난자 혹은 비판자는 동일한 감정을 다르게 적용하는 이중잣대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영국이나 한국의 축구대표팀의 버티기와 김빼기를 욕하는 것은 그 종목 자체나 룰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권도나 축구경기나 여타의 게임은 그 룰을 누가 더 능숙하게 할용하는 가가 커다란 변수가 된다. 장지원 선수는 경기의 룰을 적절하게 활용했고 송명섭 선수는 그 룰에 의해서 결승전을 눈앞에 두고 실족했다.

두 선수는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한다. 장선수는 심각한 다리 부상속에서 최선을 다해 결승전을 치렀고, 송선수는 보다 큰 패배와 부상을 이기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선수들에겐 우선 여타 경기의 메달리스트에 못지 않은 격려와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올림픽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일등지상주의의 강박관념을 벗어던지게 된 최초가 아닌가 한다. 그 정도의 여유와 자신감이 이젠 우리에게 생겨난 것이라 본다. 세계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초고속 압축성장과 기적같은 민주화의 달성, 88올림픽 4위와 월드컵 4강..이러한 것들이 하나 하나 밑바닥에 거시적인 흐름이 되어 있을 것이다.


2. 게임의 룰은 변화한다.

게임은 놀이이다. 놀이는 원초적인 것이다. 재미와 삶의 노동과 본래가 하나이듯이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 시대와 공간에 따라서 변화하고 일정한 계기를 통해 통합되고 분열한다. 오랜 전통을 지니고 살아남은 게임은 그만큼 재미있고 현실적인 것이며 잘짜여진 것이다. 또한 세계 각양의 게임은 저마다 선호를 달리하기도 하고 보다 원심력이 크거나 작거나 한다.

태권도는 근대게임 중에 막내에 해당한다. 본래 무도이지만 스포츠화되고 올림픽에 걸맞는 게임으로 채택된 것이다. 170여 개국에 수천만명의 수련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연륜만큼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다. 가라데와 우슈등을 제치고 올림픽의 제전에 입선한 것에는 올림픽 상위권을 수놓는 강대국과 수 많은 편파판정 논란의 승자가 되는 그러한 음습한 힘의 논리- 멋지게 말해서 국력과 외교력의 결실이기도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태권도 종목 자체의 힘과 한국 자체의 외교력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시아가 종주국인 올림픽 종목은 유도와 태권도 뿐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왜 보다 박진감 있을(?) 검도가 아직까지 채택되지 않고 펜싱만이 혹은 유도나 태권도만이 자리하고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자 일단 자랑스러워하자. 그리고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또는 보다 멋진 게임이 되기 위해서 발전적인 논쟁과 비판을 하자 라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태권도 겨루기의 룰은 많이 변해왔다. 과거에 무도에 가깝게 보다 격렬했고 아마도 북한에서 영향력이 강한 국제태권도연맹의 원형과 비슷하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복싱과 프로복싱과도 같은 차이가 올림픽 종목에는 존재한다. 태권도를 비판하면서 이종격투기를 들먹이는 것은 올림픽 게임의 "경기태권(택견의 결련택견과 흡사한)" 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엔 당연했던 얼굴공격과 몸통공격의 점수차가 이번에 다시 부활했다. 또한 전자장치가 된 보호대에 의한 전자채점이 이미 시험중이라 한다.(펜싱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자 그러면 다른 경기를 보자. 탁구룰이 바뀐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탁구공의 크기와 점수제가 변했다. 뿐만 아니다 양궁제도 역시 많이 변했다. 그랜드 피타로 올림픽 라운드로..권투경기 역시 채점방식이 변했고 펜싱도 그렇고 축구공의 탄성과 업사이드 규칙 연장승부 역시 변화한다. 야구도 유도의 세세한 룰 역시도 변화했고 변화 중이다. 두뇌 스포츠라는 바둑도 그러하지 않던가?

올림픽 게임으로서 스포츠로서의 태권도 역시 그 선상에 있는 것이다. 자 종주국의 자존심과 풍류 넘치는 비판자들이여. 폭넓게 사고하고 생산적인 논쟁을 하자는 것이다. 이중잣대와 성급함, 범주의 착각, 논리의 결여와 비약은 논쟁을 난장판으로 만들 뿐이다.

현재의 태권도의 규칙안에서도 축구경기와 마찬가지로 멋진 플레이를 할 수는 있다. 다만 한명의 퇴장이나 부상으로 인한 소극성이나 재미의 반감이 일상적으로 구조화 된다면 개선점을 찾아야 살아 남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미덕은 있다. 비판자들은 보다 자신의 논증과 비판 대안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고, 좀 더 열린 사고와 언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과거의 시범종목 시절의 태권도는 얼굴공격에 2점을 주지 않았어도 보다 큰기술이 많이 터져 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준결승 이하의 경기에서는 호쾌한 기술들을 볼 수 있을 것인데..이것은 여타의 격투기 종목이 모두 그렇다. 케이오승이며 폴승이며 한판승은 큰 기술이고 이는 기량차가 어느정도 나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월등하게 여타의 톱클래스보다 뛰어난 몇몇 명인급에 주어지는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고수끼리는 여간해선 불계승과 같은 틈이 보이질 않고 움직임은 적어지고 평범하다 싶은 잔기술이 나온다.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자전거나 자동차 교본만을 보고는 운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중적인 재미와 이해가 반감한다면 룰을 바꿔가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처방인 것은 다른 경기들을 볼때도 적절한 것이고 특히 종사자들이라면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것이다. 스포츠는 보다 대중적이어야 한다면 관중이 납득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미 스포츠가 아닐테니까 말이다. 한국의 독주를 저지하기 위해 양궁룰을 바꾸고 중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탁구의 룰을 바꾸고 해서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최강은 최강인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그 룰에서 완성된 형태가 되었고 갈수록 종주국을 위협 당하지만 회춘한 일본유도가 영원한 종주국이듯이 말이다. 경기장 크기를 줄이든지, 원형으로 만들든지, 장외 감점이나 벌점을 강화하든지 말이다.

"자 우리의 주특기 1분간 버티기 시간이 왔습니다" 항간에 인기리에 회자되는 레슬러 심권호씨의 유명한 어록이다. 레슬링이든 유도든 여타의 종목이든 일관된 잣대가 필요할 것이다. 태권도만이 유달리 예외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레슬러 정지현과 태권선수 장지연의 금메달에 대한 반응이 왜이리 엇나가야 하는 것인가? 정말로 장지연선수가 오노나 폴햄처럼 비난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은밀히 수놓는 이중잣대와 오버에 대해선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이 비난인지 비판인지를 말이다.



3.사족: 태권도와 가라데-도올 김용옥의 맹점 혹은 악영양?


이것은 사족이다. 올림픽의 "경기태권"에 관한 논쟁과는 비껴있지만,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인터넷상에서 아마도 근자에 무예나 격투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비슷하게 통용되는 것이 아마도 "태권도는 가라데 아류이다." 라는 것일게다. 이러한 상식(?)의 출발점은 아마도 도올 김용옥 선생의 태권도 철학이라는 저서 이지 싶다.

물론 도올 선생은 탁월한 인물이고 그의 저술은 사실에 기초하지만 한가지 간과했거나 악영향을 미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내 나름대로 삽살개의 비유를 들어 지적하는 바이다. 불과 10년전만해도 상식이 아닌 것이 우리나라에 토종 삽살개가 있다는 것이었다. 토종개라하면 진도개나 풍산개 정도로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나?

바로 일제강점기의 폐해였고 이는 광복 반세기 동안에도 청산하지 못한 근세사의 아픈 상처로 우리의 삶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문화 곳곳에 그 잔재를 안고 있는 것은 우선 36년간이라는 긴 그리고 간악한 일제강점기를 겪은 탓이다. 그들은 우리의 강산 곳곳에 맥을 끊는 쇠막대를 박아 넣고 언어와 역사를 혼을 말살했다. 가장 흔한 개였다는 토종 삽살개를 말살하고 가죽을 군용으로 사용한 그들이 진도개를 남겨둔 것은 그들의 자랑 아키다와의 유사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삽살개의 풍성한 모피도 유용했으리라.

말살한 삽살개를 첨단의 유전공학으로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복원한 부자지간의 두분 과학자의 열정의 산물이지만 잡종견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끈질긴 유전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잡종견들을 전국을 뒤지며 모아서 교배시키고 유전적으로 형질을 고정시키기 위해선 10년이 넘는 기간이 필요했고 아직껏 일반인에게 쉽사리 분양을 안하는 이유가 된다.

나라를 강탈당하기 전엔 (어떤 덜떨어진 인사들과 집단들은 국제법적으러 합법적이라느니 조선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근대화를 이룩했다느니 하고 매국의 댓가로 치부한 재산을 재판으로 돌려 받기까지 하는 작태를 보라!) 마을마다 수시로 행해졌던 결련택견의 전통과 민족무예들은 엄혹한 탄압과 함께 점차 사라지고 산중으로 사라지고 비밀리에 소수에게 전해지고 또는 근대화된 대동아 제국의 가라데와 검도 유도 레슬링으로 끓는 피를 의탁하지 않았던가? 극진 가라데의 최영의와 역도산 그리고 청도관이니 무덕관이니 태권도의 모태가 되었던 해방공간의 유파들이 그것들이다.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최홍희 장군에 의해서 태권도로 통합된 이후에 태권도는 서서히 가라데와 차별성을 확보한다. 박정희와 최홍희의 갈등과 함께 태권도는 둘로 분화하고 남한의 태권도는 캐나다에 본부를 둔 최홍희의 태권도와 경쟁한다. 외교관출신 김운용총재의 수완과 박정희정권의 전폭적지지는 각국에 공격적으로 파견되고 맨땅에서 도장을 개척하고 선점된 가라데 쿵푸 권투 도장과 무뢰배들의 거센도전을 격파하고 오늘날 170개국 수천만명의 수련생을 두고 올림픽 정식종목에 채택된 것이다.

숨은 공로자 실력자들은 미국의 태권도 대부이며 이소룡에게 발차기 기술을 선보인 이준구사범등의 해외사범들의 피눈물인 것이다. 태권도는 분명 가라데의 영향을 만이 받았지만 가라데가 아니다. 태권도는 택견과 가라데의 중간정도에 위치한다. 가라데가 중국무술이 아니듯 태권도는 오끼나와나 일본 무술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격투기가 그렇듯 무술이라는 큰 범주안에 있다. 무술은 모든것이 그렇듯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무술을 수련하는 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받아들이는 것을 주체적으로 해야지 유파의 이름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태권도는 잡종 삽살개일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자랑할 만한 고유의 품종이다. 전통무술은 아니더라도 한국의 무술이다. 가라데나 여타의 무술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태권도는 또한 스포츠이고 게임이다. 태권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 무도수련의 하나의 관문으로서 존재하는 광의의 개념이고, 하나는 게임으로서의 경기태권이며 협의의 개념이다.

무덕관의 황기관장이 태권도로의 통합에 반대해 미국으로 건너가 수벽도협회를 만들었지만 그것 역시 전통의 수벽은 아니다. 택견의 달인이 말년에 추구한 유실된 택견의 부족함을 찾아 동분서주한 것이 전통의 수벽인지는 모르겠다. 신채호 선생이 거론한 백희의 권법의 원형이 무엇인지, 무신정권의 빌미가 된 수벽타 의 원형이 무엇인지도 학실치가 않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태권도는 어쩌면 박정권 시절 민주주의를 담보로 압축성장을 통해 절대빈곤을 벗어난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압축성장하여 세계로 뻗어 갔으며 말년에 비참하게 몰락해간 김운용 전총재는 박정희 총통의 전철을 밟은 건지도 모른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태권도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올림픽 논쟁은 "경기태권"에 국한되는 문제이지만..무도로서의 태권도는 분명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무도로서의 완결성은 스스로의 혁신에 있다. 교류에 있다. 상실한 정신적 영역에 있다.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태권도가 과거처럼 혹은 일본의 가라데처럼 특징적 분파가 있다면 오히려 무도로서의 특징은 발전했을 것이고, 스포츠로서의 위상은 얻지 못했었으리라. 최홍희의 국제태권도 연맹과의 통합논의도 하나의 변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비단 이러한 양질전환의 기로에 있는 것은 태권도 뿐만 아닐것이다. 이것은 구조적이며 시대적인 것이라고 본다. 어느시기엔 양적팽창과 획일적 저돌성이 최선의 가치가 되어 어떤 관문을 뚫는 시기가 있다면, 그 시기가 지나면 억눌린 또는 희생된 압축성장의 밑받침이 된 우리네 이름 없는 부모 형제들의 피땀과 국제사범들의 피땀..혹은 비주류와 소수파 사문난적이 디었던 또 다른 가치가 비로서 꽃피울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삽살개가 되살아나듯이 지금 한국의 비전 이라는 산중무술들이 심신수련법들이 새로운 가치로 등장하지 않는가? 기천문, 선무도,18기, 24반무예, 국선도, 택견..등등

불안전한 우리네 인간들은 모든 것의 인과율을 꿸수는 없다. 신이나 대성현이 아닌이상에 말이다. 하지만 그 불안정성을 메울만한 귀중한 것이 있으니..그것이 바로 인간의 미덕들이다. 관용, 겸손, 중용, 조화...
어쩌면 이러한 미덕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역사등을 공부하고 무예등을수련 해야 해썬 것은 아닌가?

지금은 그저 프로와 전문가들의 게임을 관전하고, 엄지 손가락을 올릴것인지 내릴 것인지를 탓하는 새로운 콜로세움의 시대가 아닐까? 이종격투의 최강자가 누구니..하는

아마도 분명한 것은 올림픽 격투의 최강자는 사격선수이고 다음이 양궁선수일 것이다. 덧붙여 또하나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폐해를 태권도만큼이나 극복하고 발전해온 분야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삽살개등을 제외하고 말이다. 노파심에 부연하자면 전환기나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와도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또한 일개인의 생각이기도 하다.

핵폭탄의 시대에 무술이 갈길은 무엇일까?

혹여 마지막 물음에 대한 궁금증이 계신 분들은 ..YTN 창사특집 한-중-일 무예다큐멘터리(5부작) 를 시청하시길 바란다.

http://www.ytn.co.kr/special/plan_view.php?m_cd=0701&idx=28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