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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계광의 기효신서가 전부는 아닙니다!


무예에 관련된 우리나라의 옛기록인 "고려사"와"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이 두 사람의 기록이 매우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 권3(高麗史券三)에, 두경승은 전주 만경현 사람인데 성품이 온후하고 도타우며 꿈임이 적고 용기와 힘이 있었다. 처음 공학군에 들어갔을 때 수박(手搏) 하는 사람이 경승을 불러 한패로 삼았다... 또, 고려사 권36 충혜왕(忠惠王)의 기록에는 1342년 5월 계사(충혜왕3년)에 왕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구경하시었다 , 1343년 2월 기유(충혜왕4년)에 왕이 화비궁에 돌아와서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 임금이 말바위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그리고, 고려사 권128 결절41에는 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 하였다. 의종이 아껴서 대정(隊正)을 삼았다가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 라는 구절이 있고, 수박의 위력에 대하여 이의민과 두경승이 자리를 같이하여 서로 힘 자랑을 하는데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 , 이의민이 의종의 등뼈를 꺽으니 손이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지르는 지라 문득 크게 웃었다 등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회의 수박은 고도로 발달한 맨손 무술인 동시에 체계화된 무예(武藝)이며 또한 고위계급(王家貴族)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행(盛行)하였으며, 신분상승(身分上乘)의 수단이 될 정도로 매우 중시되는 국가의 무술(武術)이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러, 조선왕조신록(朝鮮王祖新錄)등에 의하면 수박은 군사를 뽑는 정규시험 종목이었다.
병조에서 수박희로 사람을 시험하여 방패군을 보충하였는데 세 사람을 이긴 사람을 뽑아 섰다 , 병조에서 홍인문 안에 무사를 모아놓고 갑사를 보충하였는데 달리기와 수박을 시켜 3인 이상이긴 자를 모두 뽑아서 섰고.... , 담양의 향리, 관노 등이 나라에서 수박으로 재주를 시험한다는 말을 듣고 다투어 서로 모여 수박희를 하였다 든가, 기제잡기 권7의 임진록에 금산에서 왜병이 몰려오니 의병들은 무기가 떨어져 할 수없이 맨손으로 수박희로 적과 대결하다가 의병장 조헌도 죽고 영규도 싸움터에서 죽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역시 수박이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국가적으로 군대의 제정비가 필요했던 시절 신분을 초월(超越)해 모든 사람들이 즐겼던 대중적인 경기(競技) 이고 또한 강력한 무술성(武術性)까지 지니고 있는 국방무예(國防武藝)로 까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곽(安廓)은 에서 수박희(手搏戱)를 바로 지금의 택견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는 고려 시대에 주로 손 기술에 의존하던 수박(手搏)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발기술에 중점을 둔 탁견으로 발전되었고.. 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1921년에 지어진 에서는 탁견희(托肩戱)와 수벽타(手癖打)는 분리되어 한시(漢詩)로 그 동작을 읊은 것이 전한다. 탁견(托肩)은 각술(脚術)이고 수벽타(手癖打)는 수박(手搏) 곧 수술(手術)이라... 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 두 글을 볼 때 안곽의 에서는 손 기술에서 발기술의 변화를 탁견(托肩)의 탄생이라고 보고 있으며,
의 기술은 탁견희와 수벽타로 분리 구분하여 족술(足術)의 탁견(托肩), 수술(手術)의 수박(手搏)으로 구분하였다.


백제의 검법 본국검
백제시대의 문화 및 예술이 일본에 전해져,일본문화의 바탕이 되었다는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입니다.
백제의 무예 집단인 싸울아비가 일본에 전해지며 사무라이가 되었다는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정설로 통하고 있으며,백제의 8대성이었던 목씨 가문의 검법이 목씨 가문의 후손인
불세출의 검객 목만치(삼국사기 개로왕편에는 목협만치로 기록되어 있음)에 의해 일본에 전해지
게 되어 당시 왜(일본)에 있던 백제인들에 의해 본국검이라 불리게 된것이며 현대 검도의 원형이
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원의(茅元義)는 15년간의 각고 끝에 1621년 를 간하였다. 고금의 병서(兵書) 2천여권을 연구, 검토, 정리한 소산이라 한다. 이 속에 우리의 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원의는 임진왜란(1592년)후에 이를 조선에서 얻은 것이 분명하다. 그간에 수만의 중국인 들이 전쟁을 빌미로 우리 나라에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때서야 무기고를 열어보니 칼은 녹이 슬어 칼집에 붙어 뽑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당시 우리의 현실이었다. 간신히 를 얻어 군사 훈련시켰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바로 한교(韓嶠)의 그 명문엔 일본,중국도 나오고 조선을 표현한 글귀가 너무도
이채롭다 합니다. "빼어난 문물의 나라 조선을 중심으로" 이글귀에서 추론을 근거로 조선,고려의
역할에 대해 재일 사학자가 일본내 사학자와의 토론을 해도 다들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유가
뭘까요? 그 뿐입니까? 그곳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도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주민 집단이 다수가 존재 했었다는 결과도 발표되었습니다.
만국진량종,고려기와도 일본인 학자들이 발굴 발표한 겁니다.
또 오키나와에서 일본본토식이 아닌 오키나와식의 국수요리가 전해온다고 합니다.
국수에 양념을 넣는데 그 양념이름이 뭔줄 압니까?
"고레구스"라고 합니다.한자로 표기 하면 "고려약" 그건 아주 매운 고추가루 양념이라고 합니다.
또 오키나와식의 씨름은 한국의 씨름과 같은 삿바씨름입니다.
또 세계에서 하나뿐인 한국식의 "줄다리기"놀이와 거의 일치하는 민속놀이가 있다 합니다.
수 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유독 조선식의 민속과 음식을 오늘까지 전통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사실이라는 실증이 존재하거늘 또 일본인들이 발표한 고고학적인 실증도 존재하거늘
마치 그 당시를 카메라를 동원하여 찍어야만 그 사실의 연결 고리의 사실을 믿겠습니까?
일본에서 "당(唐) "자를 쓰면서 그 원류는 한국 즉 조선을 나타내는 곳이 비일비재 하다고
일본인 사학자들은 지적합니다
류쿠국 즉 오키나와의 수도의 이름이 뭔줄 압니까? "슈리"라고 합니다.
이말의 어원 역시 한반도에서 온 서라벌즉 서울 이란 뜻이라고 일본사학은 말합니다.
그 오키나와의 수도터에 그들의 자랑 "守禮門"이 서있는데 이는 조선의 "崇禮門"은 모방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라 합니다.
일본에서 언어 표기의 변천은 다양합니다. 또 특이합니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습니다. 어원은 한국어의"큰나라"
일본전통방식으로 읽으면 "구다라"라는 발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고구려를 가리켜 "고쿠라이",또는 "고마"또는 "고레"
신라를 가리켜 "시라기"표기는 다양함 ,표기는 다르나
신라를 나타내는 지명들.
"가라"라는 말의 원류격인 가야가 일본에 제일 먼저 문물을 전수해서 인지 고구려,신라,백제,가야
등을 통칭해 "韓"자를 표기하고 "가라"로 발음. 표기가 변천되며 ,
등을 표기하며 한국을 나타낸다고 함.
심지어 이런 현상은 지명에 국한된게 아니라 문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나라와 교역을 한 오키나와 류쿠가 유독 그나라의 수도터와 문,풍속,음식이 조선식과
일치하거나 크게 유사한 사실을 뭐라 설명 하실렵니까?심지어 그나라에서 나온 유골또한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단의 것이라는 발표에 뭐라 답변하시겠습니까?
문헌에는 없는 고고학적 유물은 실증증거 입니다.
유구가 여전히 독립국으로 존재해 왔다는 근거는 1854년경 미국과 유구간에 이루어진
수호조약으로 알수 있다. 그 유구가 독립된 왕조 였다는건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기록하고있고,
그 왕들의 계보도 기록하고 있다. 그후 천황중심제에 의한 중앙집권 권력에 의해 유구는 일본에
완전 병합되고 그들의 역사도 잊혀져 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데나 쇼도쿠씨는 빈약한 유구의 역사를 복원코자 한국의 조선왕조 실록등의
사료를 많이 참고하고 조선 성종때 쓰여진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의 "팔중산 군도 표류기"(오키나와
표류기)등은 오키나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라고 한다.
(유구국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다한다. 왜 그럴까?
일본과의 교역과는 달리 문화적인 패턴의 교역도 이루어 졌다는것을 조선왕조실록은 말하고 있다.)
사스마번에게 1609년에 강제적 무력 침공으로 일본의 강점이 있으면서 그들의 민속행사는
여러모로 탄압받았다한다.(용왕굿,줄다리기) 일본화(가라데)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역사에 무지한자들은 역사적인 실례를 망각한 채 1609년 이전이 아닌 그 후에 쓰여진 1700년대의 기록
으로 가라데의 역사를 말하려 한다. 그때는 일본 번주의 강점기가 행해진 이후에 쓰여진 기록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무예를 받아들이고 일반화 하면서 그 기원론에 관심조차
있었을까?
옛날 해동제국기에서는 왕외에 수많은 군소 추장들이 존재해 왔는데 그 군소추장들 중에
고인이 된 가데나 쇼도쿠씨는 유구국의 장전대주 라는 가문의 주인공이 실존인 "홍길동"일 것이라는
가설을 내 놓았다. 그 논거는 무수히 많으나 그 장전대주 가문의 족보가 박물관에 보존되어 오는데
그 장전대주 가문에 결혼을 한 성씨가 일본성이 아닌 金,羅,尹씨등의 성을 가진이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朝鮮人이라는 기록도 있고.참고로 이 장전대주 가문의 가계기록은 조선 세종무렵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뿐만 아니다.오키나와 구지천성터에는 고려청자,조선백자,조선에서 채굴되는 선박용 닻으로 쓰이는
화강암,조선화폐(해동통보)..,이들 홍길동(장전대주)무리가 전했다고 하는 조선 재래종 볍씨.
이처럼 조선과 유구는 수백년간 조선과 왕래를 자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나타내는 글자가 이라고 했고 표기의 변천으로 으로 표기된다
이는 일본인 학자들의 학설이다.
그외에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1719년 사신으로 갔던 신수한이 대마도의 서기인 우삼동의 항의에 답변하여 말한 부분이다.
우삼동은 "조선사람들이 그들의 문집에 일본인을 왜놈,만추 로 표기하고 있고 사신의 하인들 조차
일본인을 왜놈으로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인을 사모하는 뜻에서 "당인(唐人)"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형평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이에 신수한은 과거 임란때 일본인들이 과거에 참혹한 만행으로 조선을
유린한 전과에 대한 당연한 반응 이라며 훈계했다.
이처럼 일본은 이 시기에도 한국=조선을 일컬어 "唐人"이라 지칭했다.
과거 일본의 두부의 원조를 이룩한 "唐人町"의 시조가 조선인 이종환이라는 사실을 보면
설득력이 있는 증거 랄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라데 즉 당수도도 조선에서 건너간 택견등이 시원이 되었을 것이다.
장전대주가 전한 풍속을 줄다리기,용왕굿,택견 이라 한다.
아직도 그들 오키나와인들은 언젠가는 독립할 것이라 말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일본의 번주가 강점한 이후의 기록은 다분히 승자의 기록 중심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 했듯이..,그리고 우리의 문화인
불고기 마저 빼앗아가 그 문화의 종주국이 일본이 되었듯이.., 그것에도 만족못한 일본이
김치마저 종주라고 나서는걸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나?
이러한 과정으로 오키나와에서 전해진 가라데도 일본인의 의도 대로 일본식으로 일반화되고
역사의식을 망각시키고 왜곡시켰을 것이다.
님 저는 태권도의 원류를 말할려고 하는건 아닙니다. 또 태권도의 아류가 가라데라고 말할려는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가라데의 원류가 수박,탁견이라 불린 택견이 원류가 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말하는 겁니다. 적어도 태권도의 원류는 택견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오늘날 전하는 택견외에 옛날의 택견이라 불렸던 수박,탁견이 가라데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것에
대한 문화적으로 고증한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보고있습니다.
조선조 실록으로 보는 유구와의 교역관계와 유구국의 문화,유물,풍속을 통한 고증으로 보면 가라데의
형성에 조선의 무예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교역외에 문화적인 교역이 유구국과 이루어 졌다는것을 조선왕조실록은 말하고 있으며
그 문화라는 것을 토대로 현재의 오키나와의 유물,풍속등으로 다양한 추론이 가능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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