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유적으로 보는 홍길동과 유구국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최초의 민중영웅이다.
동시에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며 역사상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오키나와의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고증에 의하면 홍길동은 조선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
좌절과 울분 속에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민중을 규합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받을 받던 중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무리를 이끌고 탈출하여 일본 오키나와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조선에서 처럼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되어 왔으나, 이제 홍길동은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에서 역사상 실존인물로, 반역자 또는 도적에서 영웅으로 부활하였다.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일본 최남단 섬 오키나와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홍길동은 고려왕조 외척이며 명문세도가였다 남양홍(洪)씨 집안의 서자로 태어났다.
밀직부사였던 홍길동의 할아버지 홍징은 이성계와 더불어 서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무찌렀으며, 동북명의 오랑캐(여진족)가 소란을 피우자 정몽주와 함께 사태를 진압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다.
공민왕과는 동서지간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파주염씨 중시조인 염제신의 맏사위이기도 했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 최영과 이성계가 홍징의 처남 영흥방을 모반사건의 주모자로 내몰아 1000여명의 신하들이 죽임을 다하는「무진참화」가 일어났다.
이때에 염흥방의 매부인 홍징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고려말의 충신이자 명문세도가였던 파주염씨와 남양홍씨는 위기를 피해 전남 장성, 나주, 전북 고창 등지에 내려와 청착하게 되었다.
◀ 97.11.5 서울 전경련회관 3층 국제회의실에서 연세대 설성경
◀ 교수, 이희덕 교수, 건국대 김일근 교수, 전남대 송진한 교수,
◀ 이병직 장성 문화원장 등이 홍길동의 출생에 대한 역사성, 홍
◀ 길동의 사상, 국내·외 활동상에 대하여 발표와 토론
98.10.24 장성군청 회의실에서
◀ 연세대 설성경 교수의 "홍길동
◀ 의 관련기록은 이렇게 왜곡되었
◀ 다"라는 주제와 양권승 연구원
◀ 의 "일본 유구 열도에서의 활동
◀ 가능성"에 대한 주제 발표 및 일
◀ 본 오키나와 문화원장의 "오야
◀ 케아카하치 난에 대하여"라는
◀ 주제로 세미나 개최
유구신보 4월 26일자 홍길동 연구팀의 6차 오키나와 학술 답사를
▲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2001.5.4 장성군청 회의실에서 국내학자 3명, 일본학자 2명, ▶
일본 오키나와 석원시장 외 일본인 25명 참석
마사나오 카미모리(오키나와 중학교 교장)오키나와에 있는 성(城)들이 외부인에 의해서 축성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홍길동과 홍가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 규명
미와자토 카즈오(오키나와 대학교수)홍길동이 한일 교류의 키워드임을 천명하고 양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홍길동 연구 주장
설성경(연세대교수)구양, 조선왕조실록, 해동이적 등 문헌에 나타난 행적을 통해 한국의 홍길동과 일본의
홍가와라가 동일인물일 가능성 제기
손승철(강원대교수)조선과 일본 오키나와 양국의 교류사 설명
양권승 연구원;홍길동과 홍가와라는 동일인물 주장
홍길동의 출생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이복형 홍일동은 1419(세종1년)에 태어났다.
또한 일본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홍길동의 처남)의 족보에는 홍길동이 정통(正統) 8년 즉 1443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 가문의 족보 이 족보에는 김씨,
나씨, 윤씨 성을 가진 조선인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키나와에 진출한 홍길동 일행이
대규모 집단이었음을 반영하고있다.
홍길동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에서는 몇 백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감나무와 시누대(山竹)에 둘러 쌓인 생가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 30여m 아래 계곡(암탉골)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길동샘이 있다.
홍길동 생가터 산죽이 둘러 쌓인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
◀ 의 홍길동 생가터, 6·25때 소실되었다.
생가터 30m 아래 암탉골에 있는 홍길동의 먹고 자란 길동샘. 1970년대 새마을 운동사업
① 으로 주변이 훼손되기 전까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
② 황윤석이 쓴 증보해동이적에는 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엽 이전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② 있었는데 재상 홍일동의 서자 동생이다.(홍일동은 장성(長城)의 아차곡에 살았다.)
② 재기를 믿고 스스로 호탕해 하였으나 과거를 보아 청훈과 현직을 맡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② 국법에 구속되어 하루아침에 홀연히 도망갔었다. 라고 기술됨
관기(官妓)출신 옥영향(玉英香)으로 홍상직이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배가 다른 홍길동의 두 형(귀동,일동)의 어머니는 남평 문씨이다. 소설에서 길동의 어머니는 춘섬(春蟾)인데, 이는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이 자신의 애첩 이름이 추섬(秋蟾)인데서 착안하여 명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춘섬은 봄 두꺼비라는 뜻으로 집안에 부귀와 복을 가져다주는 염원이 담겨있다.
이름은 고을노로 슬하에 3남2녀를 두었으며,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을 오키나와로 가져갔다.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安南米)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다.
현재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지역에서는 고을노를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홍길동 집단이 해외로 떠나면서 오곡의 종자를 항아리에 담아 함께 가져갔음을 추정할 수 있다.
▲ 홍길동의 아내 고을노는 조선을 떠나면서 이 볍씨를 항아리에 담아 오키나와에 가져갔다.
▲ 구양연구회에서 가데나 쇼도꾸씨가 조선사를 연구하기 위해 교재로 사용한 조선왕조실록
▲ 필사본 - 조선과 유구왕국간의 교류 관련기사를 빠짐없이 기록하고있다.
홍길동 체포전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편
② 홍길동의 오키나와 진출 사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③ 조선 중기의 문신 (택당)이식(1584~1647)의 시문집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술됨
홍길동의 1460~1500 년대 조선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행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규(琉球:일본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했던 한 일본인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단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구, 즉 일본 오키나와 군도와 홍길동은 과연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일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홍길동의 오키나와로 탈출 가능성에 대한 사학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그는 유구사를 새롭게 고찰하면서 홍길동의 유구행 가능성을 최초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홍길동의 집단은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떻게 탈출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을 꼽히는 홍길동전, 조선중엽의 문신인 허균 선생이 지은
① 경판본으로 현재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영인본은 국회 박물관에 소장 됨)
② 조선 숙종때 홍만종이 지은 「해동이적」에 훗날 황윤석이 증보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② 야담집. 홍길동의 해외탈출과 영웅적 일대기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③오키나와 대백과사전 - 조선인의 오키나와 표류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양 홍씨 남양군파 족보, 서자인 길동을
삭제 하고, 홍상직의 아들로 일동과 귀동만
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발행한 호적대장, 직계가족은 물론 외가 처가까지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서얼출신들의 관직등용을 근복적으로 감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명문가의 족보들을 모아 성씨별로 주요 인물만을 기록한것으로, 1920년경 편찬되었다. 만성대동보에 홍길동은 형 일동과 함께 홍상직의 아들로 올라 있으며. "도술을 부렸던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 정착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대병촌) 후루수토지역에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 등 )
미야코지마(궁고도)의 추장인 나카소네의 혹독한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 추장을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중국해의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
위도왕전(한문본 홍길동전)에서 그의 나이 70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홍길동의 후예들이 해상 무역 활동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들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라 하여 중국(明)에 돌려보냄
일본 본토의 싸쓰마 번의 유구국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지배권이 일본에 넘어감. 이로 인해 홍길동이 세운 오키나와 열도의 해상왕국도 복속됨
홍길동의 후예들이 고국인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탈출, 망명을 시도하여 배를 타고 경상도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재침공으로 오인하여 한양(서울)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홍길동은 1460~1500년대 조선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행적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했던 한 일본인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단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구, 즉 일본 오키나와 군도와 홍길동은 과연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일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홍길동의 오키나와로의 탈출 가능성에 대한 사학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그것도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닌, 일본 오키나와 현립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가데나 쇼도쿠(嘉手納宗德)씨였다.
그는 유구사를 새롭게 고찰하면서 홍길동의 유구행 가능성을 최초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홍길동의 집단은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굴절된 역사 속에서 「도적」으로 폄하되어온 홍길동은 조선왕조의 신분차별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지배계급으로부터 갖은 핍박과 수탈을 당해오던 민중을 구하기 위해 탐관오리를 응징했던 「민권운동가」이자 「영웅」이었다.
민주주의의 효시라는 영국 크롬웰의 공화정 보다 무려 1백 50년이나 앞서 홍길동이 주창했던 공동체 「활빈당」의 실체는 무었일까?
놀랍게도 실존인물 홍길동이 활빈당의 무리를 이끌고 의적활동을 벌였던 마지막 은거지 「홍길동 산성」이 충남 공주의 무성산(해발 614m) 정상에 남아 있다.
민권 운동의 선구자로 기록된 오야케아카하치(홍가와라)의 추모비가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머나 먼 타국 일본 오키나와에 왜 세워져 있는 것일까?
홍길동의 추모비가 오키나와에 세워지기 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 500년 전의 먼 옛날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하자!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 기원
◀ (崎原)공원에 세워져 있는 홍가와라 추모비
◀ 「자유민권운동의 선구자」로 기록돼 있다
오야케아카하치(赤蜂)는 별명을 홍가와라(洪家王) 아카하치라고도 칭하였다. 그는 군웅할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호하마촌(大兵村)을 근거지로 집단 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문명(文明) 18년(서기 1486년) 오키나와 본도 중산왕조의 상진왕은 사신을 야에야마 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리키야아마리 축제를 음사사교(陰邪邪敎)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는데 이 신앙탄압에 대하여 섬주민들은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오야케아카하치는 선두에 서서 중산정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는 중산에 대한 조공을 3년에 걸쳐 중단하여 중산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상진왕은 대리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미도의 신녀인 군남풍과 함께 정예부대 3,000여명과 병선 46척을 보내 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저원(低原)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명응(明應) 9년(서기 1500년) 지금부터 454년 전의 일이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대해 반항하여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섬 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운 것이다.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으나, 그의 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이다.
먼저 오키나와 역사에 등장하는 의문의 인물 홍가와라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조선에서 떠난 홍길동이었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홍길동은 하떼루마지마에 정착하면서 “홍가와라”(홍씨성을 가진 왕)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먼저 홍가와라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부군을 도와 홍가와라에 맞서 싸운 ‘장전대주’라는 인물의 행적을 통해 홍가와라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는 홍가와라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최남단의 섬인 하떼루마지마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전해진다.
과연 장전대주와 홍가와라는 실제로 하떼루마지마에서 태어났을까?
▲ 야에야마의 두 영웅인 장전대주와 홍가와라의 탄생기념비가
일본 오끼나와의 최남단 하떼루마지마에 세워져 있다.
이는 두 영웅이 조선에서 건너간 도래인임을 상징적으로 암시해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의 가데나 쇼도쿠씨가 기록이 빈약한 유구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을 깊이 연구하던 중, 유구와 조선과의 왕래가 빈번하던 15세기 말 조선에서 의적활동을 하다가 종적을 감춘 홍길동에게 관심을 갖게 된 까닭도, 1500년경 야에잔 군도에서 활약했던 홍가와라, 장전대주 같은 군웅들이 현지인이 아닌 도래인일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같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가 에 들어 있는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 일행의 『팔중산 군도 표류기』이다.
성종 10년에 씌어진 『팔중산 군도 표류기』는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 일행의 조난과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① 오키나와 「구양 연구회」 조선왕조실록 읽기 모임에서 교재로
① 사용한 가데나쇼도쿠 선생의 친필 조선왕조실록
② 오키나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는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
② 일행의 오키나와 표류기. 당시의 오키나와 풍속을 이해하는데
② 소중한 역사 문헌이다.
▲ 성 축조 방법이 얇은 돌을 기왓장처럼 포개는 오키나와 방식과는 달리
충남 공주시 무성산 정산에 있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쌓은
홍길동 산성과 거의 흡사하다. (오키나와 구지천성)
오키나와에는 지배자의 거주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 신에게 제사드리는 신성한 구역 등의 역할을 지닌 성들이 무수히 남아있다.
그런데 『성(城)』을 일본어로 음독하면 『조』가 되고 훈독하면 『시로』가 되는데, 유독 오키나와에서만 『구수쿠』라고 발음한다. 어떻게 해서 보통명사가 되었는지 학자들 마저도 유래를 규명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고 있다.
구수쿠에 얽힌 비밀은 조선에서 건너간 홍길동을 통하여 쉽게 풀어볼 수 있다. [홍(洪)]을 일본어로 음독하면 『고』 또는 『구』가 된다.
『수쿠』는 『소굴(巢窟)』의 일본식 발음으로 『집단 거주지』를 뜻한다.
결국 『구수쿠』는 『홍길동 집단의 거주지 또는 소굴』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보통명사로 정착되어 버린 것이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지배자의 거주지였던 구수쿠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을 『촌(村)』이라 하는데 구메지마에서는 마을(里)을 『간절(間切)』이라 적고 『마시쓰』또는 『마세쓰』등으로 발음한다.
우리의 『마을』을 뜻하는 마실과 음이 비슷하다.
지금도 충청·전라·경상도 지역의 시골 마을에서는 ‘마실’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어원 분석 외에도 문화적인 동질성의 측면과 간과할 수 없다.
이시가키지마 후루수토 바루에 있는 홍가와라 집단 거주지. 오랜 풍화로 담장이 무너져 있었으
① 나,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자치단체의 공동 출연에 의해 최근 일부가 원상복구 되었다.
② 하떼루마지마의 적의 침입을 관측하기 위해 세운 봉화대. 500년전에 축조한 것으로 전한다.
26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24년부터 1867년까지 유구국과 조선, 중국간의 왕복 외교문서로 현재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키나와 역대보안)
500년 연산군이 유구국 사신편에 보낸 방책
대장경을 봉안한 변재천당, 오키나와현의 수리성 앞 정천에 위치해 있으며 한글로 쓰여진 안내문이 있다.
(변재천당)
신숙주가 1467년에 일본, 유구 등의 풍물을
기록한 책으로 동아시아 일대의 지도가 들어있다. 1500년(연산군6년) 유구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에 유구국의 풍물을 물어 부록으로 보충하였다. 그림은 해동제국기 중 유구국기로써 유구국의 언어를 한글과 병행하여 싣고 있다. (해동제국기)
이외에도 1477년 김비을개 등이 표류하여 유구국에 도착했다가 그들의 도움으로 귀환해온 사례가 있다.
① 삼천리 바다건너 일본 유구열도에 이상향 율도국은 있었다. 국내에서 웅지를 다 펼치지 못한 홍길동은 무리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국땅 유구열도에서도 만민평등을 부르짖으며 새 세상을 건설했던 것이다.
② 궁고도 상비옥산 유적의 도래인 거주지(초가집)
③ 홍길동이 처음으로 정착한 일본 최남단의 섬 하떼루마지마 (파조간도)
최근 구지천성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의 돌(화강암)로 만든 선박용 닻이 발견되었으며, 세종 때에 주조한 상평통보와 함께 국적 미상의 용봉통보(龍鳳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최근 학계에서는 홍길동 집단이 오키나와를 지배하던 기간(1500-1612)에 오키나와 현지에서 주조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가장 대규모 축제인 ‘나하축제’
- 우리나라의 민속 전라도 고창줄다리기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2000년 일본 오키나와 석원 시장이 홍길동과 오야케아카하치(홍가와라)와의
동일인물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
그는 고려 명문가의 후손으로
무등의 정기를 받아
퉁퉁바위 염원을 안고
남도의 평화로운 땅
아치실에서 태어났으나
서자를 차별하는 국법에 묶여
사나이 울분을 가슴에 묻고
헐벗은 민중의 햇불이 되어
이 땅의 어둠을 밝히던
자유민권운동의 선구자
이 땅을 떠난 지 어언 오백년
뱃길로 삼천리 낯설은 이국땅
저 멀리 일본 오키나와 열도에
만민평등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세계화의 선봉에 서서
동중국해를 무대로
웅혼한 기개를 떨치던
대한의 남아 홍길동
오늘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 논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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