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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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데의 원류 찾기는 역사적인 고증과 고찰부터..,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님은 일본의 사학계의 통합적인 역사인식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한 말씀드립니다.
일본의 정사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서기"에 허구와 거짓으로 가득한 야마토 정권 이야기와
신공황후에 관한 글이 나옵니다. 그 신공황후가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기사도 나오구요.
7세기경 지어진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를 하여 소위 "황국사관"이라는 "식민사관"의
원류가 되었고요. 이러한 사관에서 시작한 일본이 한국이 문물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고마운 존재 라는 인식을 하면서 임란과도 같은 커다란 희생의 전쟁을 행하는 만행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부의 반란과 불만을
대외적으로 이끌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게 하려는 의도라는건 잘 알려진 역사지식 일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또 하나의 명분의 근거는 7세기 경에 집필된 "일본서기"라는 겁니다.
그 고마운 존재에게 임란후 조선이 교역을 하지 않고 외교단절 하겠다 하니 다시 한번 출병을
하겠다고 협박한 도쿠가와 막부이기도 한 일본입니다.
류쿠! 즉 오키나와! 고려,조선과 문물의 교류가 활발이 이루어진 나라!
님의 말처럼 고려,조선 외에 그밖의 많은 나라와 중계무역을 했었다는건 역사적인 상식입니다.
님 적어도 가라데 라는 무술은 일본이 1800년대에 오키나와를 통합하면서 그들의 문화마저 일본의
것인양 흡수 되었습니다. 그 결과 류쿠국의 역사마저도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단편적인 기록들이
주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과거 류쿠국 사신이 중국에서 조선의 학자 정염선생에게 역학을 전수
받았다는 기록도 단편적으로 홍만종의 "해동이적"에 전합니다.
일본의 역사 감추는 작업은 아주 교묘합니다. 문물이 전해진 실증적 자료가 없다구 하는데요?
오키나와에서 대단위적인 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었는데 그곳에서 나온 "고려기와",
커다란 동종인 "만국진량종"...>그 명문엔 일본,중국도 나오고 조선을 표현한 글귀가 너무도
이채롭다 합니다. "빼어난 문물의 나라 조선을 중심으로" 이글귀에서 추론을 근거로 조선,고려의
역할에 대해 재일 사학자가 일본내 사학자와의 토론을 해도 다들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유가
뭘까요? 그 뿐입니까? 그곳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도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주민 집단이 다수가 존재 했었다는 결과도 발표되었습니다.
님 저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말하는건 아닙니다. 이 유골들은 "귀화인"이 아닙니다.
일본 사학에선 도래인과 귀화인의 개념은 하늘과 땅 차이 입니다.
도래인은 옛적 그 스스로가 정치적,사회적 사유로 인해 그들이 살고 있는곳을 나와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영위해 가는것.
귀화인은 노예등으로 끌려와 권력자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것.
이러한 개념은 일본 학자들이 내린 개념 들 입니다.
이처럼 일본 사학계도 오키나와에서 발굴한 유골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집단이란걸
인정하면서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위의 만국진량종,고려기와도 일본인 학자들이 발굴 발표한 겁니다.
또 오키나와에서 일본본토식이 아닌 오키나와식의 국수요리가 전해온다고 합니다.
국수에 양념을 넣는데 그 양념이름이 뭔줄 압니까?
"고레구스"라고 합니다.한자로 표기 하면 "고려약" 그건 아주 매운 고추가루 양념이라고 합니다.
또 오키나와식의 씨름은 한국의 씨름과 같은 삿바씨름입니다.
또 세계에서 하나뿐인 한국식의 "줄다리기"놀이와 거의 일치하는 민속놀이가 있다 합니다.
수 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유독 조선식의 민속과 음식을 오늘까지 전통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사실이라는 실증이 존재하거늘 또 일본인들이 발표한 고고학적인 실증도 존재하거늘
마치 그 당시를 카메라를 동원하여 찍어야만 그 사실의 연결 고리의 사실을 믿겠습니까?
일본에서 "당(唐) "자를 쓰면서 그 원류는 한국 즉 조선을 나타내는 곳이 비일비재 하다고
일본인 사학자들은 지적합니다
류쿠국 즉 오키나와의 수도의 이름이 뭔줄 압니까? "슈리"라고 합니다.
이말의 어원 역시 한반도에서 온 서라벌즉 서울 이란 뜻이라고 일본사학은 말합니다.
그 오키나와의 수도터에 그들의 자랑 "守禮門"이 서있는데 이는 조선의 "崇禮門"은 모방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라 합니다.
일본에서 언어 표기의 변천은 다양합니다. 또 특이합니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습니다. 어원은 한국어의"큰나라"
일본전통방식으로 읽으면 "구다라"라는 발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고구려를 가리켜 "고쿠라이",또는 "고마"또는 "고레"
신라를 가리켜 "시라기"표기는 다양함 ,표기는 다르나
신라를 나타내는 지명들.
"가라"라는 말의 원류격인 가야가 일본에 제일 먼저 문물을 전수해서 인지 고구려,신라,백제,가야
등을 통칭해 "韓"자를 표기하고 "가라"로 발음. 표기가 변천되며 ,
등을 표기하며 한국을 나타낸다고 함.
심지어 이런 현상은 지명에 국한된게 아니라 문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일본 고대문화에 크게 기여를 한 표기상으로 봐서
일제시절 중국인에서 귀하한 사람들이라 하였고 그렇게 믿었으나 일제가 항복한 후
문화적인 증거로 인해 중국귀화설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중국계열이라고 "고사기","일본서기"등에도 기록이 없다.
이는 일제 시절 황국사관의 관점에서 조작된 것이다.
일본은 하타씨;秦는 신라계로서 그들이 만든 사찰에 일본의 국보"목조 미륵반가사유상"
은 경주에서 발굴한 금동 미륵반가사유상 등과 문헌적으로 봐도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단이 틀림없다한다. 또 아야씨;漢는 당징의 금당벽화를 만든 집단으로 백제계 도래인 집단이다.
위의 사실들은 일본사학계가 드러내고 싶지 않는 자존심 상하는 내용이지만 그들이
발굴,연구 발표한 내용입니다.
첨언하자면 일본의 향가로 일컬어지는 만엽집이 있습니다. 고대의 시가 입니다.
이것을 일본의 소위 황국사관에서 일본의 언어적 지식을 동원해서 해석을 해 보아도 억지
춘향식의 해석만 나오고 아니 해석이 아닌 창작형태의 해석이 나오는 관계로 일본의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만엽집은 고대 조선어로 읽어라! 라는 것이 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제시절에 쓰여진 어원에 관한 책을 보면 일본어의 어원의 거진다가 고대 한국어 랍니다.
이는 제가 민족주의 사관에서 바라본 잣대가 아니라 일본 언어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들도 인정하기 싫지만 학자적인 양심과 곡해를 무서워 했던가 봅니다.
그들의 최초 국가로 말하는 "나라정권" 그 나라 정권의 어원은 한국어 "나라;국가"입니다.
위에서 말한 하타씨는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어원은 한국어 "바다"라고 합니다.
일본의 축제 "마쯔리"의 어원은 한국어"(북,장고 등을) 맞두리다 라는 한국어 어원에서 온말.
그 외의 다수 한국어 어원이 존재 합니다.
그리고 고대 한국문화의 잔재,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일본의 백제역,한국신사,
고구려에서 온 고려왕 약광의 후예라 말하며 지금껏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고려(고마)"로 살아오고 있는
고구려 후예인 일본인. 그 고마 가문에서 갈라져 나간 성씨가 약30여개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수 나왔다 합니다. 그 성씨중에 대표적인 성씨는 아베,가토,이노우에 등등
또 신라계 후예라 칭하는 마을이 있고 오늘날에도 계름을 상징하는 "닭"을 신성시하는
신라계 후예마을 등등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에서 "가라데"라는 무술의 근원적인 추론이 불가능 할까요?
가라데의 근원이 모호하다! 어떻게 설명이 어렵다?
수많은 나라와 교역을 한 오키나와 류쿠가 유독 그나라의 수도터와 문,풍속,음식이 조선식과
일치하거나 크게 유사한 사실을 뭐라 설명 하실렵니까?심지어 그나라에서 나온 유골또한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단의 것이라는 발표에 뭐라 답변하시겠습니까?
문헌에는 없는 고고학적 유물은 실증증거 입니다.




유구국과 과거 고려,조선과의 관계는 외교적으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였다.
단순히 활 같은 재료나 수입하고 있는 그러한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유구국은 일찌기 중국 명나라와 사대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조선과는 그 관계 이상의
교류를 하였다. 이는 조선의 학자 신숙주가 왕명으로 집필한 "해동제국기"등에도 나타나는 바라.
유구국은 독립된 왕조 였으나 임란때 코무덤,귀무덤의 주인공 사스마번에 의해 임란후에
지배를 당하고 임란시 시마즈번에서 참전을 요구 하나 거부 하였다.
그 전에는 1388년경 유구왕 쥬만왕 찰도가 고려에 국서를 보내고 고려인을 송환했다는 기록도 있다.
유구가 여전히 독립국으로 존재해 왔다는 근거는 1854년경 미국과 유구간에 이루어진
수호조약으로 알수 있다. 그 유국가 독립된 왕조 였다는건 해동제국기에도 기록하고있고,
그 왕들의 계보도 기록하고 있다. 그후 천황중심제에 의한 중앙집권 군력에 의해 유구는 일본에
완전 병합되고 그들의 역사도 잊혀져 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데나 쇼도쿠씨는 빈약한 유구의 역사를 복원코자 한국의 조선왕조 실록등의
사료를 많이 참고하고 조선 성종때 쓰여진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의 "팔중산 군도 표류기"(오키나와
표류기)등은 오키나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라고 한다.
사스마번에게 1609년에 강제적 무력 침공으로 일본의 강점이 있으면서 그들의 민속행사는
여러모로 탄압받거나 일본화(가라데)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역사적인 실례를 망각한 채 1609년 이전이 아닌 그 후에 쓰여진 1700년대의 기록
으로 가라데의 역사를 말하려 한다. 그때는 일본 번주의 강점기가 행해진 이후에 쓰여진 기록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무예를 받아들이고 일반화 하면서 그 기원론에 관심조차
있었을까?
옛날 해동제국기에서는 왕외에 수많은 군소 추장들이 존재해 왔는데 그 군소추장들 중에
고인이 된 가데나 쇼도쿠씨는 유구국의 장전대주 라는 가문의 주인공이 실존인 "홍길동"일 것이라는
가설을 내 놓았다. 그 논거는 무수히 많으나 그 장전대주 가문의 족보가 박물관에 보존되어 오는데
그 장전대주 가문에 결혼을 한 성씨가 일본성이 아닌 김,나,윤씨등의 성을 가진이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라는 기록도 있고.참고로 이 장전대주 가문의 가계기록은 조선 세종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뿐만 아니다.오키나와 구지천성터에는 고려청자,조선백자,조선에서 채굴되는 선박용 닻으로 쓰이는
화강암,조선화폐(해동통보)..,이들 홍길동(장전대주)무리가 전했다고 하는 조선 재래종 볍씨.
이처럼 조선과 유구는 수백년간 조선과 왕래를 자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나타내는 글자가 이라고 했고 표기의 변천으로 으로 표기된다
이는 일본인 학자들의 학설이다.
그외에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1719년 사신으로 갔던 신수한이 대마도의 서기인 우삼동의 항의에 답변하여 말한 부분이다.
우삼동은 "조선사람들이 그들의 문집에 일본인을 왜놈,만추 로 표기하고 있고 사신의 하인들 조차
일본인을 왜놈으로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인을 사모하는 뜻에서 "당인(唐人)"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형평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이에 신수한은 과거 임란때 일본인들이 과거에 참혹한 만행으로 조선을
유린한 전과에 대한 당연한 반응 이라며 훈계했다.
이처럼 일본은 이 시기에도 한국=조선을 일컬어 "唐人"이라 지칭했다.
과거 일본의 두부의 원조를 이룩한 "唐人町"의 시조가 조선인 이종환이라는 사실을 보면
설득력이 있는 증거 랄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라데 즉 당수도도 조선에서 건너간 택견등이 시원이 되었을 것이다.
장전대주가 전한 풍속을 줄다리기,용왕굿,택견 이라 한다.
아직도 그들 오키나와인들은 언젠가는 독립할 것이라 말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일본의 번주가 강점한 이후의 기록은 다분히 승자의 기록 중심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 했듯이..,그리고 우리의 문화인
불고기 마저 빼앗아가 그 문화의 종주국이 일본이 되었듯이.., 그것에도 만족못한 일본이
김치마저 종주라고 나서는걸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나?
이러한 과정으로 오키나와에서 전해진 가라데도 일본인의 의도 대로 일본식으로 일반화되고
역사의식을 망각시키고 왜곡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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