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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전하는 것을 말하여도 억지인가?



당서(唐書)에 의하면,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동옥저국(東沃沮國)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가 있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여기서 개마대산에 있는 개마현(蓋馬縣)의 이름은 현도군(玄 郡)에 속하며, 그 산이 있는 곳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다.즉 평양성은 왕험성(王險城:王儉城)이라고 되어있다.

※ 왕검성(王儉城)은 왕험성(王險城)이며, 일명 험독성(險瀆城)이라고 사기(史記)에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검성인 평양성은 고구려의 건국 당시에는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평양성의 서쪽에 개마대산이 있었고, 고구려가 있던 평양성 서쪽에는 옥저국이 있었음을
후한서(後漢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398쪽에 보면, 동옥저국(東沃沮國)은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었다고 했다.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지금의 서경(西京)인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 고구려의 도읍지(都邑地)에 대하여, 후한서(後漢書)에는 개마현(蓋馬縣)이라 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 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라 했다.

즉 평양(平壤)은 왕험성(王險城) 또는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왕험성(王險城) 즉 왕검성(王儉城)은 중국 서안(西安)에 있는 성(城)이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高句麗) 편에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은 漢나라의 옛 땅인 낙랑군(樂浪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당서(唐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高句麗本扶餘別種也. 중략.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 高句麗故地爲西京.』

고구려왕이 살고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인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漢나라 때의 낙랑군이며, 거리는 경사(京師:서울)로부터 5천리이다.
본시 고구려의 옛 땅은 서경(西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68쪽에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BC.140∼135년),
즉 조선왕이었던 우거(右渠)가 두었던 조선의 땅으로서 서경(西京)이라고 했다.

※ 통전(通典)에서는, 고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며, 한나라 무제(武帝)가 두었던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삼한(三韓)의 군주로 이어져 온 것은 고구려이며, 중국대륙이 고토(故土)이며,
먼 조상은 요순(堯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三國史記 高句麗篇을 보면, 10대 산상왕(山上王, AD.55년)) 13년 10월에
환도(丸都)에 도읍지를 옮겼다.
여기서 환도성(丸都城)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다고 했다.
환도성은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동쪽이라 했다.

북사(北史) 고구려(高句麗)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구려왕은 좋은 궁실을 수리하여, 도읍을 평양성(平壤城)이라 했다.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동으로 6리라고 적고 있다.

※ 여러 正史를 통해 고증해 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대륙의 중심부였던 西安 즉 옛 西京이었던
平壤城인 長安城에 도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반도에는 장안성이 없다. 장안성은 섬서성(陝西省)의 서경(西京)이자
서안(西安)이며 평양성(平壤城)이었다.
장안성에서 고구려가 도읍했음을 모든 正史들은 고증하고 있다.

※ 평양(平壤)은 처음에는 서안(西安), 낙양(洛陽), 안양(安陽), 대동부(大同府),
다음은 심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구려, 부여, 말갈, 발해 등은 만주로 밀려나며 망하고 만다.

요동·요서는 시대의 전환에 따라 달라졌다.
지금의 서안(西安)을 서경(西京)이라고 기록하는 사서가 많아졌다.
한마디로 요동·요서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보면 조선현(朝鮮縣)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가 도읍했던 곳은 서안의 왕검성(王儉城), 즉 장안성(長安城)이며
평양성(平壤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서(隋書) 고구려(高句麗) 편 원문(原文)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이고, 남북으로는 1천여리요, 도읍지는 평양성이다.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로 6리이다.

※ 당서(唐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高句麗本扶餘別種也. 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濟. 西北度遼水與營州接. 北靺鞨.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고구려는 본시 부여의 별종이다. 동쪽으로 바다와 면해 있는 신라가 있고, 남쪽 역시 바다와
면해 있는 백제가 있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말갈이 있다.
고구려왕이 살고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인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771쪽에는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句驪國》 其先出自扶餘. 漢時避難居於卒本水. 因稱卒本扶餘. 地爲漢之玄 郡. 屬有三縣.
高句驪其一也. 因以爲國號. 其彊域西距遼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扶餘接.
今奉天通化縣以北 於吉林伊通一帶皆是. 其後至隋而大. 北越夫餘至於靺鞨. 卽今郭爾羅斯界.
唐總章元年. 爲李勣等所滅. 一作高句驪. 又稱句麗. 高麗. 又作高 .

고구려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한나라 때 피난하여 졸본수(卒本水)에 살았다.
그로인해 졸본부여라고 했다.
그 땅은 한(漢)나라가 있던 현도군(玄 郡)이며, 속해 있던 세 곳의 현(縣) 중 한 곳이
고구려(高句驪)였다. 그런 까닭에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했다.
고구려 건국 초의 현도군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을 말한다.
이곳 태원은 북경(北京)의 서남 쪽이며,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 정도이다.
그러나 그후 현도군은 섬서성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으로 옮기게 되었다.

※ 고구려의 강역은 서역(西域)에서 요동(遼東) 1천 리까지였다.

고구려가 현도군(玄 郡:산서성 太原)에 건국할 당시, 남쪽으로는 조선(朝鮮)과 예맥(濊貊)이
있었다. 동쪽으로는 옥저(沃沮)이며, 북으로는 부여(扶餘)가 인접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봉천(奉天)이었던 심양(瀋陽)과 길림성 통화현(通化縣)의 북쪽 일대 모두가
고구려의 강역이었다.
그후 수(隋)나라가 강대해질 무렵 북쪽 월(越)나라와 부여에 이르고, 이어 말갈(靺鞨)까지였다.
즉 지금의 곽이라사(郭爾羅斯) 경계까지였다.
여기서 곽이라사 경계라면, 지금의 내몽고 철리목맹(哲里木盟)의 사부(四部)의 하나다.
이곳은 길림성 서북 지방을 말한다.

※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 AD.601∼633년) 때까지 엄청난 강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第182卷 수기(隋紀) 7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煬黃帝下…初帝謀伐高驪器械資儲皆積於 郡.

  郡人物殷阜屯兵數萬.

又臨朔宮多珍寶諸賊競來侵掠…

수양제 하…
초에 양제는 고구려의 기계와 자재를 모두 쌓아둔 탁군을 칠 것을 도모했다

☆ 탁군( 郡)에 대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822쪽

漢置. 三國魏改爲范陽郡. 卽今京兆 縣治.

탁군. 한나라 때 두었다.
삼국시 위(魏)나라가 범양군이라 이름을 고쳤다.
즉 지금의 경조 탁현에서 다스렸다.

☆ 탁현( 縣)

爲 郡治. 唐改 縣曰范陽. 置 州於此. 宋名 水郡.

…屬京兆尹…

당나라 때 탁현을 범양이라 했다. 탁주를 이곳에 두었다.
송나라 때 탁수군이라 했다.…
경조윤에 속했다…

☆경조윤(京兆尹)
중국고금지명대사전 424쪽

漢治. 爲三輔之一. 今陝西長安以東至華縣之地
(三輔決錄注. 京. 大也. 天子曰兆民)
故首都曰京兆. 猶之京師也.

경조윤.
한나라 때 두었다. 삼보의 하나로 삼았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 동쪽인 화현 땅이다.
(삼보결록 주에 의하면 경은 크다, 천자를 조민이라 했다)
고로 수도를 경조라 한다. 경사와 같다.
삼국 위나라 때 경조군이라 했다.

※ 또한 자치통감(資治通鑑) 196권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5년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있던 곳은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사군(四郡)이란 낙랑(樂浪)·현도(玄 )·임둔(臨屯)·진번(眞番)을 말한다.
이곳은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 이상과 같은 기록을 고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자치통감(資治通鑑) 200권 당기(唐紀) 17 高宗
이치(李治 AD.650∼655년) 용삭(龍朔 AD.661∼663년) 2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麗百濟河北之民.』

즉 고구려 백제는 지금의 북경 지방인 하북성(河北省)의 백성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AD.669년에 망하기 18년 전만 하더라고,
서역(西域)과 월남(越南) 북쪽, 서경(西京), 그리고 섬서성(陝西省)을 기점으로 하여 신강성(新疆省),
청해성(靑海省), 감숙성(甘肅省), 산서성(山西省), 사천성(四川省) 일부와 하북성(河北省),
길림성(吉林省), 몽고의 남부 일대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니까 고구려의 옛 고도가 요동군 낙양 3천6백 리요, 현도군 낙양 동북 4천 리라고,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 4편에 기록되었다
(개국마한왕검성 금서경지「대동부」와 고구려현명제왕음기, 참조).

이같은 사실을 정리해보면 중국 동부와 서역 일부, 몽고,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는 모두 고구려의
영토임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지리 4편에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는 성들을 열거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바로
「돈성까지였다」라는 대목이다.

돈성이란 중국의 곤륜산과 천산산맥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청해성 위쪽과 신강성 끝쪽, 영하성 끝쪽의
세 부분이 맞물린 곳에 돈황이 있었던 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얼마나 넓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고구려 26대 영양왕( 陽王 AD.563년) 18년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高句麗本箕子所封之址』

이 말은 고구려는 본시 기자가 도읍해 있었던 땅에 있었다. 그렇다면 기자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름 아닌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일대이다.
다음 문장을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漢晋皆僞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城, 先帝欲征之久矣』

한나라, 진나라가 모두 함께 있었던 군과 현의 땅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고로 그곳은 별천지인 다른 곳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대의 왕들이 그곳을 정벌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도록 욕심을 갖고 있었던가,
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에는 여덟 성(姓)이 있었다.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 氏)·해씨(解氏)·정씨(貞氏)·국씨(國氏)·목씨(木氏)·묘씨(苗氏).
백제의 성을 지닌 후손들이 한반도에 살지 않는 것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백제(百濟)는 처음 십제(十濟)라 하여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진평이군(晋平二郡)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그리고 10명의 신하들이 건국했다.

※ 수서(隋書)와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십제(十濟 BC.213년) 때 구태씨(仇台氏)가
진평이군(晋平二郡)에 도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양서(梁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 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백제는 후한 말 부여왕이었던 구태씨(仇台氏) 이후에 백가(百家)가 모여 바다를 건넜다.
그로 인해 백제(百濟)라고 했다.

※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을 간략하게 소개해 본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高句麗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中略.
未畿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此曰溫祚. 中略.
遂與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中略.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中略.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 帝鴻嘉三年也. 中略.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帶方故地. 中略.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이다. 혹 고구려 주몽(朱蒙)이라 했다.
스스로 북부여에서 험난한 길을 따라 멀리 도망갔다.

★ 北扶餘:그 당시 내몽고의 창도현(昌圖縣). 만주에 있는 長春의 西南이며 심양(瀋陽)의 西北인
내몽고의 과이심사지(科爾沁沙地) 지방이다.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온 곳은 졸본(卒本)이 있는 부여(扶餘) 땅이다.
언제인가 부여왕이 죽고 주몽(朱蒙)이 왕위에 올랐다. 주몽의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자는 비류(沸流)였고, 차자는 온조(溫祚)였다.
비류와 온조는 오간(烏干)과 마여(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南行 길에 올랐다.
많은 백성들이 따라왔다. 열 명의 신하가 말하기를, 오직 하남(河南)의 땅이 좋다고 하였다.
북쪽에는 대방(帶方)과 한수(漢水)가 있었다.

★ 帶方:後魏가 있던 곳. 즉 지금의 洛陽縣 東北二十里.

★ 漢水:春秋戰國時 河水임. 지금의 黃河支流.

한수(漢水)는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播 山)에서 흐르는 물을 말한다. 중략.
열 명의 신하들이 말하여도 비류는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나뉘어졌다.
비류(沸流)는 미추홀에서 살게 되고, 온조(溫祚)는 하남(河南) 땅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 후 열 명의 신하가 날개처럼 도왔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이때가 漢나라 제홍가(帝鴻嘉)가 3년이었다. 중략.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었다. 인의가 돈독했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 중략.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구당서(舊唐書) 一白九十九上 列傳 第一百四十九上 東夷篇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國.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中略.
又外置六帶方管十郡. 中略.』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한 갈래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이다.
백제의 서울에서 동쪽으로 6천리다(중국 四川省 萬縣에서 보면 上海까지 6천리이다).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북으로는 신라가 있었고, 서해(西海)로는 월국에 이르고, 남해(南海)로는 왜국에 이르며,
북해(北海)로는 고구려에 이른다.
왕이 거하는 곳으로는 동서에 두 개의 성이 있었다. 중략.
그리고 나라 밖으로 여섯 대방(帶方)을 두어 십군(十郡)의 관할을 두었다. 중략

※ 양서(梁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 晉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晋平二郡.』

진(晉)나라 때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있었고, 백제는 요서(遼西) 지방의 진평이군(晋平二郡)에
있었다. 위서(魏書)에 의하면 부여국의 북쪽 천리에 고구려가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 통전에 의하면 백제가 있었던 곳은 요서(遼西)에 있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이다.

※ 송서(宋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 有遼東. 百濟 有遼西.
百濟所治謂之. 晉平郡晉平縣.』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에서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의 진평군, 진평현에서 다스렸다

※ 이것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예전편에,
중국 곤륜산 길 서쪽의 가까운 길목에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목천자전(穆天子傳) 예전편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百濟)는 약 1백 나라라는 방대한 국가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 신강성(新疆省) 토노번현(吐魯番縣)과 선선현을 서주(西州)로 나누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의 작은 나라는 사방 1백 리였으므로 약 1만 리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三國의 역사를 자세히 발표함).

※ 백제는 기원전 213년 진(秦)나라가 건국된 후 마한 땅에 십제(十濟) 또는 백제(百濟)라 하여
건국되었다. 진나라가 세워진 후 8년 후의 일이다.
이때는 흉노의 잦은 침략으로 하북 지방에 있던 백성들이 남쪽인 홍콩, 광주, 남해 그리고
월남 북쪽 지방으로 약 5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이주하던 시기였다.

흉노들은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하였다.
흉노들은 하남성 땅까지 내려와 모두 점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백제는 이런 와중에 차츰차츰 남하를 시작했고, 강대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성기의 백제 강역은 대단했다. 패수(浿水)의 북쪽이 거의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면,
남쪽의 거의 모두라 할만큼 백제의 강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도(大道), 즉 큰 섬인 필리핀, 보르네오, 자바, 기타 동남아시아에 널려 있는
모든 큰 섬들이 백제의 영토였으며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史記 五帝 夏本紀 참고)

그러나 남조(南朝)의 진통으로 백제의 국운이 쇠해 갈 무렵, 당나라가 건국하면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 백제에 야금야금 침공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때부터 사방에서 소모적인 전쟁이 끊일 사이 없이 없었고, 강역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화되어 갔다.

한때는 하북성, 산서성 북방까지 성을 쌓을 정도로 강했던 백제가 당과 신라의 틈새에서 점차로
그 강역이 좁아져 갔다.
결국 백제는 당과 신라의 합공, 그리고 말갈과 해(奚), 왜(倭)의 틈새에서 결국 견디지 못했다.
백제의 많은 백성들이 주류성에서 굴 집을 짓고 끝까지 항쟁했다.
그러나 주류성에서 왜인(倭人)과 만나 싸우고, 백강구에서는 4번 싸워 이겼지만, 4백여 척의 배가
불타는 바람에, 백제 32대 마지막 왕인 풍(豊)이 몸을 피해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AD.66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말갈(靺鞨)과 백제와의 관계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선과 맞물려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온조왕 2년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역시, 북쪽 국경선과 접한 말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 의자왕 15년의 기록을 보자.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신라본기의,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의 기록을 보자.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말갈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 그런데 수(隋), 당(唐) 시의 지도를 보면, 말갈은 요동 흑수(黑水)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 그리고 각종 정사(正史)에는 고구려의 북쪽에 말갈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蓋肅愼之地. 中略. 東至於海. 西接突厥. 南界高麗.』

말갈은 숙신의 땅에 있다. 중략.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해 있다.
남쪽 경계에는 고구려가 있다.

★ 수서(隋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在高麗之北』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는 말갈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갈에 대한 기록】

▼ 1대 온조왕(溫祚王)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十八年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四十年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하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 역사서에 보면, 낙랑은 평양, 황해도 일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있어야할 것이다.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웠다.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의 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




※ 梁書 新羅篇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去之以秦人故. 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뿌리이다. 辰韓은 역시 말하자면 秦韓이라고 했다.

서로 거리가 만리(萬里)였다.

전하는 말로는 진(秦)나라 세상이었으나, 진나라가 망하자 사람들이 마한의 동쪽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므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 마한(馬韓)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산서성(山西省)・하북성(河北省) 지역을 말한다.

만리(萬里)라면 천수현(天水縣)에서 하북성(河北省)까지의 지역이 마한이다.



그럼 신라에 대하여 여러 정사(正史)를 인용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 후한서(後漢書) 東夷傳에 있는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韓.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



한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54개국이 있었다.
그 북쪽으로는 낙랑(樂浪), 남쪽으로는 왜(倭)가 접해 있었다.

진한은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2개국이 있었다. 그 북쪽으로는 예맥(濊貊)이 접해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개국으로 되어있다.
그 남쪽으로 왜(倭)와 접해 있는데, 모두 합해 78개 나라라고 적고 있다.



※ 三國志 辰韓篇에는, 진(秦)나라가 망하여 그 유민들이 마한(馬韓)인 한국(韓國)으로 피난왔으며,
진나라 사람과 마한 사람이 같았다고 했다.

다시말해 본래 낙랑 사람들의 남은 무리와 진한(秦韓)사람들로 처음 6개국을 이루었으나,
그 후 12개 나라로 나누어졌고, 그 중 일부인 육부(六部)의 사람들이 뭉쳐 서야벌(西耶伐)인
신라(新羅)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漢)나라 때의 낙랑지(樂浪地)

기존 국사교과서의, 낙랑은 평양 황해도 일대



※ 수서(隋書) 신라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國. 在高麗東南居. 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魏將母丘儉. 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歸故國留者. 遂爲新羅.



신라는 고구려의 동남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혹 사라라고도 한다. 위나라 장수 모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옥저로 달아났다.

그후 그 남은 무리가 고국으로 돌아와 신라가 되었다.



★ 기존 국사교과서에 의하면, 낙랑은 평양 황해도 일대로 되어있다.

또한 국사교과서에 따르자면, 옥저는 함경도 함흥평야 일대인데,
어떻게 남쪽 경상도 땅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가, 중원대륙에서 막강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위(魏)와 고구려의 싸움에 휘말려, 싸움터인 북쪽 옥저 지역으로 달아날 수 있겠는가.



※ 남사(南史)에는, 위(魏)나라 때 신라를 신로(新盧)라 했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또는 사로(斯盧)라 했다고 적고 있다.



※ 북사(北史)에는, 신라는 본래 진한(辰韓)의 뿌리인데, 고구려 東南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땅이라고 했다.

진한(辰韓) 역시 말하자면 진(秦)나라의 진한(秦韓)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진(秦)나라가 망하여 마한(馬韓)의 동쪽 경계에 와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 구당서(舊唐書) 卷一百九十九上 列傳 第一百四十九上 東夷篇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國 本變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也. 東及南方俱限大海. 西

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有城邑村落. 王之所居曰金城.



신라국은 변한이며 묘족의 후예였다. 한(漢)나라 때 낙랑의 땅이었다.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해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 1천 리, 남북으로 2천 리이다. 성과 읍, 촌락이 있었다.

왕이 있던 곳은 금성(金城)이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는 왕씨계보(王氏系譜)에 의하면, 왕씨(王氏)의 선조는
개마고려대족야(蓋馬高麗大族也)라고 했다.

여기서 개마고려(蓋馬高麗)라 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에 있던 고구려(高句麗)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개마대산은 개마현(蓋馬縣)에 있다고 되어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고, 개마대산이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며,
평양성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지도를 보면 섬서성(陝西省) 서안에서 서남쪽 태백산(太白山)이 있는 부풍현(扶風縣) 일대에
개마대산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왕씨의 선조들은 고구려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자 건현(建賢)이란 사람이
군장(君長:군신의 장)이 된 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때,
권지국사(權知國事)로 후당 명종(明宗 AD.926~930년)으로부터 임명받아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가 된 후에 고려왕으로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도경에서 보면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가 고려왕(高麗王)으로
봉작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건원(建元 AD.343~344년)은 동진(東晋) 때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을 말한다.


※ 고려도경에서 보는바와 같이 왕씨의 가문은 본래 고구려의 큰 부족인 군신의 집안에서
파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姓)은 왕씨(王氏)가 아니라 고구려의 씨족(氏族)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왕씨의 성은 본래 고씨(高氏)의 집안인 것을 고려도경에서는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에서는,
성골장군(聖骨將軍)에서 시조사찬(始祖沙粲)으로 이어지고, 후당(後唐)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인 이형지덕(李亨至德 AD.756~758년)의
왕비(王后)인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이어져 왔다.

그 후 경강대왕(景康大王)에서 마지막 당세조(唐世祖)인 장종(蔣宗) 이존욱(李存勖)
동광(同光 AD.923~926년)에 이어, 태조왕건(太祖王建)으로 혈통이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타난 태조왕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씨(王氏)는 성이며, 건(建)은 죽은 후의 휘호이다.

왕씨는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였던 아버지 융(隆)의 장자이며,
왕건의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때의 금성(金城)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임을, 후한서와 여러 정사(正史)에서
밝히고 있다.

당(唐)나라 희종(僖宗) 이현(李儇) 건부(乾符 AD.874~879년) 4년,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AD.874~884년) 3년인,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 14일에
태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본문에서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이라 했으므로, 한주(漢州)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고조선 때부터 삼한(三韓)과 삼국 때까지 한반도에는 한주라는, 한자로 된 지명은 없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한주(漢州)의 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때 두었던 곳으로, 당나라 때 이름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했다.
송(宋)나라 때는 한주덕양군(漢州德陽郡)이라 했으며, 원(元)나라 때 와서 한주(漢州)라고 했다.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에는 모두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였으나,
중화민국 때 와서 이름을 고쳐 광한현(廣漢縣)이라고 적고 있다.





※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혈손(血孫)으로 고려(高麗)를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인
한주(漢州)였던 송악군(松嶽郡)에서 건국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당(後唐)에게 망한 후 궁예(弓裔)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태조왕건이 전촉(前蜀)을 건국한 연대는 AD.918년으로,
거란(契丹) 태조(太祖) 신책(神冊 AD.916년)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태조왕건의 건국연대를 전촉(前蜀)을 세운
AD.918년으로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태조왕건의 계보와 건국은 이상과 같이 이루어졌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촉(前蜀) 나라 때 사천성 성도에서 도읍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 후
궁예(弓裔)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기원후 935년 고려는 송악인 개성(開城)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남송(南宋)과 북송(北宋), 그리고 거란을 차례차례 멸망시킨 후
삼한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려는 옛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에서 천자국(天子國)으로서서 위업을 떨치게 되었다.

고로 한국의 국제 칭호는 고려인 코리아로 현재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왕릉이 한반도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왕건의 활동무대와 지명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은 사천성 성도(成都)

※ 왕건은 기원후 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正月) 십사일(十四日),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남쪽인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태조왕건은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漢州松嶽郡. 唐改曰 德陽郡. 宋曰 漢州德陽郡. 元曰 漢州. 明淸皆屬. 四川省成都府.


한주송악군은 지금의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임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기록되어 있다.



※ 왕건이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한(後漢)에 의해 망한 후, 궁예의 장수로 활약할
무렵의 지명은 다음과 같다.

이 지명은 삼국사기・고려사・고려도경・삼국유사・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난 것을 정리해 본 것이다.

굳이 지명을 정리하고자 한 것은 과연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중국대륙에서 태조왕건과 궁예, 그리고 견훤(甄萱)이 활동했는지의 여부를
이 기회를 통해 확실히 해두려는 데 있는 것이다.



※ 남주(南州)는 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 서쪽이다.
당나라가 땅이름을 고쳐 초주(楚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다시 고쳐 남주군(南州郡)이라 했다. 그 후 다시 남주(南州)라 했고,
이곳은 현재 사천성(四川省) 기강현(綦江縣) 남쪽 90리라고 했다.
남당(南唐) 시에는 땅이름을 고쳐 장주(漳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송(宋)나라 때 다시 고쳐 장주(漳州)라 했다가, 송나라는 다시 기미주(羈縻州)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옛 서주부(敍州府)의 경계라 했던 것이다.



※ 철원(鐵圓)은 철주(鐵州)로서, 조선의 평양(平壤),
즉 중국의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의 서북인 감숙성 민현(岷縣)의 동쪽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1쪽에 기록되어 있다.

철원(鐵圓)은 옛 고구려의 땅으로서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곳이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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