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역사의 시원에 따라 무예의 근본도 달라진다!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일제 식민지의 잔재에 의한 역사교육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 부재,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부작용에 시달려온 것은 부인못할 사실입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일제시절 우리역사의 말살의 선두인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에 의한 "조선사 편수회"
에 참여해 일본의 역사조작과 조선고대사서 50만권을 태우는 작업에 적극 참여한 조선인 고 이병도씨(전 서울대 교수),고 신석호씨(전 고려대 교수)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의 시원을 만들었으며 그 제자들은
그 스승들이 배운 왜곡된 역사의식과 50만권의 고대사서 증거인멸후 증거를 대라는 식의"실증사관"으로
무장하여 자기들의 스승들이 행했던 행적을 감추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재 한반도의 지도가 조선의 고유영토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것도 이들 스승과 일본인의 작품
입니다. 오늘날 전하는 대동여지도는 일제에 의한 조작입니다. 아마도 원본은 인멸 혹은 감추었을
겁니다. 대동여지도가 가짜인 이유가 뭔줄 압니까? 먼저 지도가 결정적으로 발달하게 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지도에 관한 최고 선두의 나라는 구한말 영국입니다. 식민지의 관리에 있어서 지도의
역할은 절대적 이었습니다. 당시 이 지도를 만들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인원 수많은 수학,물리학,지리학,
천체학의 권위자들의 참여가 필수적 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가 발행한
김정호의 전기에서 가난한 김정호가 지도를 그렸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영국도 위와같은 경로로 지도작업을
하는데 김정호가 그린 지도는 당시 영국이 그린 지도 보다 더 정확하고 더 한반도의 형세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김정호가 지도를 그렸다는것은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일제가 한국의 역사를 말살하고자 하는 정책으로 식민지 관리를 하였는데 유독히 김정호의 전기를
출간하고 김정호가 그렸다던 대동여지도의 영인본을 보급한 사실들이 더욱 큰 의심이 가게 합니다.
또 결정적으로 김정호의 지도가 조작이라는 근거는 김정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청나라에서 그려진 지도
때문 입니다. 청의 황제 강희제때 그려진 "황여전람도"에서는 조선의 영토가 간도와 도문을 포함하고 더
북쪽으로 가면 현재 요동반도의 중간지점인 "봉황성"까지가 조선의 강역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겁니다.
또 위 지도 후에 나온 청나라의 "대청국지도"에는 요동의 봉황성을 뺀 간도와 도문까지 조선의 강역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나온 지도인데 과연 김정호가 국경관념조차 몰랐겠습니까?
또 1894년 조선을 다녀간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의 라는 책에도 비슷한 시각이 담겼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봉황성문과 의주(요동반도의 義州) 사이를 왕래할 때는 조선측이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른스트는 19세기 중엽, 열강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보상심리가 발동한 청나라가 무력으로 압록강 대안 지역의 대부분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 연세대 김우준 교수는
"이런 자료들을 볼 때 당시 청나라는 남만주 일대를 조선영토로 묵인, 인정했음을 알수 있다"고 설명하였고, "봉황성 일대까지가 우리 영토임은 유럽에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정도의 대동여지도를 일제에 의한 조작이라는 겁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역사왜곡의 현 주소가 이것 뿐 이겠습니까? 수 없이 많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서울대 박창범 교수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천문관측을 한 결과 삼국시대의
삼국은 한반도에 없다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부에 백제는 중국의 중부와 해안가에,신라는
중국의 남부와 신라후기에는 한반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살수
(薩水)는 지금의 청천강이 아닌 중국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 부근의 강입니다. 이 오대산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사찰로 중국 불교의 성지 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의 역사에서 고구려의 변방이 지금의 요동
이라고 알고 있는것은 역사의 왜곡에 의한 역사교육에 의한 현상 입니다.
고대사에 있어서 요동 요서의 기준이 된 산은 중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기준으로 갈석산의 동쪽이
요동이며 서쪽이 요서가 되었던 겁니다. 이는 중국의 사서가 입증합니다. 이 갈석산은 중국 하북성에 있는
산 입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변방이 지금의 요동이 아닌 현재의 북경 옆의 당산시라고 합니다.
이 지역이 요동인 겁니다. 일제 식민지 사학자들은 역사왜곡을 위하여 갈석산이 황해도에 있다 했고,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은(殷)나라의 후예 백이,숙제의 고향인 고죽국이 황해도 있다고 했습니다.
갈석산이 있는곳에 만리장성이 지나 갑니다. 황해도에 만리장성이 있는지요? 또 동이족의 국가 고죽국은
열국지(列國志)에 있는 내용을 토대로 하면 오늘날 북경의 당산시 동남으로 100리 거리 라고 합니다.
중국 하북성 북단에 있었던 나라가 고죽국인 겁니다.
또 중국의 남제서(南濟書남제의 역사서)는 대륙에 백제가 존재한 사실을 증언 합니다.
또 우리가 알고 있던 백제의 흑치상지 장군은 한반도인이 아닌 양자강 남부인이라고 중국의 사서는 증언
합니다. 백제의 대표적인 8대성(八代姓)도 현재 중국에 고스란이 남아 있습니다. 8명의 백제 귀족으로
그들이 중국의 해안가와 중국의 중부를 지배한 영주들 이었던 겁니다.
신라의 역사를 보면 오늘날 경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왕릉이라 할수 없는 묘가 부지기수 입니다.
왕릉인데 어찌 묘비하나 제대로 없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궁금증으로 어는 재야 사학자에 의한
기록을 소개한다. "삼국사기에 신라왕은 56명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왕릉은 31곳이며, 17명의 왕은 불행하게도 무덤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면 31명의 왕릉이 비석과 함께 있어야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백제왕릉 32곳도 모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정되는 무녕왕릉 이외에는 하나도 없다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고려왕릉 34곳도 모두 한반도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모든 왕릉들은 흔적도 없다.
다만 경주에 있는 왕릉 몇 개는 다닥다닥 공동묘지처럼 붙어 있는데, 정작 비문이 없다.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른다.
공동묘지라도 비석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왕릉에 비문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삼국시대에는 왕의 위치와 왕족, 그리고 군신의 지위는 대단하였다.
더구나 신라 992년간을 지배했던 왕의 묘지가 경주에만 공동묘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언제인가 인위적으로 조성했음을 쉽게 추리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묘를 파 옮기면 삼족(三族)을 몰살시키는 무서운 법이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고증이 사실인가를 알기 위해, 1993년 대륙으로 직접 신라왕릉지를 찾아나섰다.
삼국사기의, 신라 27대 선덕왕(AD.629년)의 기록에 의하면, 시왈 선덕 장우낭산(諡曰 善德 葬于狼山)으로 되어있다. 31대 신문왕(神文王) 역시, 시왈 신문 장낭산(諡曰 神文 葬狼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보면, 낭산은 사천성 검강현 동쪽 2리에 있다고 되어있다.
在四川省 黔江縣 東二里
과연 그곳에 묘터가 있을까가 의문을 품고, 일행은 현지사변공실(縣誌史辨公室)을 찾았다.
편집장 포조정(浦祖政)씨는 편집주임 왕학군(王學軍)씨를 시켜 안내를 해 주도록 했다.
안내를 받아 낭산이 있는 곳을 찾았다. 검강의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낭산이 있었다.
낭산은 수낭산과 암낭산이 있었다. 그러니까 수낭산 바로 아래에 묘 터의 흔적이 있었다.
묘지가 하나 같지는 않고 약 100m 이상의 길이에 묘지가 두 쌍 있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1958년 공산당 대약진 때 모두 파괴시켰다고 왕학군씨가 일러주었다.
본시 백제(百濟)가 호북성(湖北省), 사천성(四川省) 일대에 있었지만,
망한 후(AD.660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왕과 신문왕 정명(政明 AD.678년)의
묘지가 있을 수 있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낭산에 도착해 보니 과연 묘 터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고,
수낭산 밑에 선덕왕과 신문왕의 묘지가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사기(史記)의 기록대로 위치와 지명,
그리고 묘지의 위치가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틀립없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한국에 신라가 있었다고 한다면 낭산(狼山)이란 지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찾아볼 길 없다.
헌덕왕릉지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은, 장우천림사북(葬于泉林寺北)으로 되어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천림사 재산동성 사수현 동 오십리 배미산하
(泉林寺 在山東省 泗水縣東五十里 陪尾山下)로 되어있다.
배미산 아래에 절이 좌우로 있으며, 모두 숲으로 무성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천림에는 크고 작은 샘물이 10개 정도 있다고 되어있다.
물이 너무도 맑고 깨끗하므로 천림이라고 했다고 한다.
산동성 사수현에서
동으로 50리에 있던
천림.
천림(泉林)이라는 지명처럼, 왕릉지 주위에는 천수(泉水)가 퐁퐁
솟아 오르고 있었다.
왕릉지 뒷편 연못의
돌배.
배 길이 약 30미터,
폭은 약 3미터였다.
이처럼 우리의 고대사는 철처히 왜곡되어 있다. 대륙의 역사를 한반도에 어거지로 이주시킨것은 일제였다.
우리나라는 조선초기까지 대륙의 역사라는 설이 있다. 더욱이 고려만 해도 대륙에서 흥하고 대륙에서
망한것이 라는 주장도 있다.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만 해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고려인고
서긍이 간 여행경로를 보면 불과 몇일 걸리지도 않게 고려에 도착한 사실과 그가 전하는 여러 기록을
보아도 고려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단적으로 고려의 수도는 송악인데 이 송악이 우리나라만 있는게
아니다. 중국의 산서성의 성도가 과거의 송악이었고 그곳에서 건국한 왕이 고려 태조라 중국사는 기술하고
있다. 더 우스운일은 그 수도의 강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는 조선조 실록의 기록이다. 또 조선조 실록에서의 한수도 동쪽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지금의 한강이 동쪽으로 흐르는가? 전주이씨 족보에는 이성계의 조상묘의 부근에 만리장성이 있다 했다.
이러하거늘 일제와 친일 사학자는 이성계의 조상묘가 있는곳을 오늘날 함흥쪽 이라 했다.
이 얼마나 역사왜곡인가? 이것뿐인가?
고대사의 수도에 대한 개념적 명칭은 경(京)즉 서경,남경,동경 등등 우리말로 수도에 대한 명칭은 서울..,
그러나 언제적인가 부터 수도를 "장안"이라 했는데 이를 두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번성을 가리켜
수도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라고 말하고 싶다. 고구려 시절의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가
될수 있는 시기가 아닌것이다. 당나라가 건국되기전 900년전에도 고구려는 있었다. 나라의 전통과
역사도 고구려가 더 유구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평원왕때 장안성에 수도를 옮겼다는 기사가 있다.
그 장안을 일제는 수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오늘날 장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당시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가 될수 있을 만큼 당의 역사가 유구하지 않음을 일제는 모르고 하는 조작의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 장안이 현재의 장안이라는 유물의 증거가 평양에서 발굴된 고구려인 유주자사 진의 묘이다.
유주자사가 통치한 지역에서 장안도 포함되는 지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발굴당시 일본,중국인
조차도 이를 인정했는데 유독 한국학자만 부인하고 중국인이라 괘변을 했다. 이를 인정하면 여태껏
이룬 역사왜곡의 진실이 탄로나 파국으로 진행되는 사실을 묵과할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장안이 발전되었고 그로 인해 장안이 수도로서 명성이 빛났을 것이다.
고대로 부터 우리는 중국인들 부터 동이족(東夷族),조선족(朝鮮族)이라 불리기도 했고 또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친일사학자들은 동이족=조선족 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역사왜곡의 진실이 탄로날까봐 라는 식의 회피적 왜곡이다. 중국의 정사에서는 동이족의 다른
명칭으로 조선족이라 했고 조선족의 다른 명칭을 동이족이라 했다. 우리민족을 일컸는 대명사로서의 명칭이
동이,조선족이고,그외 예족,맥족,예맥족,숙신족(만주원류고 라는 청나라 책에서는 숙신의 어원이 조선이라함)
여기서 갈라져간 민족들이 거란(契丹:동이족의 국가 은(殷)의 시조인 설(契)의 후손이라 함),몽고(한단고기
에서는 단군의 동생을 몽고족 왕으로 봉했다는 기사가 나옴),말갈,흉노,돌궐,선비,여진(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신라를 사랑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뜻 신라의 왕족 후손이라함)
부여,북부여,동부여,은(殷)...등
한자(漢字)의 시원이 우리민족 동이,조선이고 한국인들은 그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국민입니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한자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한자는 동방의 글자이지 중국의 글자는 아닙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인들은 입성(入聲;받침글자)의 발음이 잘 되지 않는 민족들 입니다.
고대 한자의 음운사전인 동국정운,강희자전의 발음원칙은 한글자 한발음의 원칙입니다.
다시말해서 모(毛)를 모 라 하고,북(北)을 북이라 하고,해(海)를 해라 하는 것이 음운사전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모(毛)를 마오라하고 북(北)을 ;뻬이라하고,해(海)를 하이라고 발음하는 것은 한자의
본래의 취지인 음운사전 상의 취지와 맞지 않는 겁니다.
본래 대륙에 존재한 한자의 주인공들인 단군조선,부여,고구려,신라,백제와 그 이후의 고려,조선에 의한
한자는 음운사전의 원칙에 맞게 발음되던 것이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인해 중국의 "하북"지방의 사투리가
표준어가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음운사전 상의 원칙과 다른 방언을 쓰게 된 겁니다.
언어학적인 고찰로 보면 초기조선이 대륙에 존재한 이유로 세종대왕에 의한 훈민정음 어지를 알것입니다.
國之於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기존해석;국어가 중국에 다르므로 문자가 서로통하지 않으므로..,
이 당시 중국이라 칭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이라는 국호를 처음사용한 사람은 "신해혁명"의 손문입니다.
중국학자들도 세종 당시에 중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나라는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중국이라는 뜻은 나라의 가운데 즉 "수도"를 뜻하는 뜻으로 사용 되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중국인의 발음체계 처럼 지방마다 다른 음운체계를 표준화 하고자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겁니다.
한민족으로 협소한 국가의 영토내에서 발음이 다르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 입니다.
커다란 영토내에서 이민족까지 포괄할수 있는 통일 발음체계의 필요성으로 한글을 창제한 겁니다.
이 한글의 용도는 한자를 바로 읽을수 있는 통일된 발음기호의 역할인 겁니다.
문화,역사의 고찰로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였지,한반도의 역사는 아닌것 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대륙의 문화가 여타의 작은 중소국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오늘날 "가라데"라는 무예의 원류도 우리 민족에서 찾는다는것은 큰 무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부작용에 시달려온 것은 부인못할 사실입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일제시절 우리역사의 말살의 선두인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에 의한 "조선사 편수회"
에 참여해 일본의 역사조작과 조선고대사서 50만권을 태우는 작업에 적극 참여한 조선인 고 이병도씨(전 서울대 교수),고 신석호씨(전 고려대 교수)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의 시원을 만들었으며 그 제자들은
그 스승들이 배운 왜곡된 역사의식과 50만권의 고대사서 증거인멸후 증거를 대라는 식의"실증사관"으로
무장하여 자기들의 스승들이 행했던 행적을 감추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재 한반도의 지도가 조선의 고유영토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것도 이들 스승과 일본인의 작품
입니다. 오늘날 전하는 대동여지도는 일제에 의한 조작입니다. 아마도 원본은 인멸 혹은 감추었을
겁니다. 대동여지도가 가짜인 이유가 뭔줄 압니까? 먼저 지도가 결정적으로 발달하게 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지도에 관한 최고 선두의 나라는 구한말 영국입니다. 식민지의 관리에 있어서 지도의
역할은 절대적 이었습니다. 당시 이 지도를 만들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인원 수많은 수학,물리학,지리학,
천체학의 권위자들의 참여가 필수적 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가 발행한
김정호의 전기에서 가난한 김정호가 지도를 그렸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영국도 위와같은 경로로 지도작업을
하는데 김정호가 그린 지도는 당시 영국이 그린 지도 보다 더 정확하고 더 한반도의 형세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김정호가 지도를 그렸다는것은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일제가 한국의 역사를 말살하고자 하는 정책으로 식민지 관리를 하였는데 유독히 김정호의 전기를
출간하고 김정호가 그렸다던 대동여지도의 영인본을 보급한 사실들이 더욱 큰 의심이 가게 합니다.
또 결정적으로 김정호의 지도가 조작이라는 근거는 김정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청나라에서 그려진 지도
때문 입니다. 청의 황제 강희제때 그려진 "황여전람도"에서는 조선의 영토가 간도와 도문을 포함하고 더
북쪽으로 가면 현재 요동반도의 중간지점인 "봉황성"까지가 조선의 강역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겁니다.
또 위 지도 후에 나온 청나라의 "대청국지도"에는 요동의 봉황성을 뺀 간도와 도문까지 조선의 강역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나온 지도인데 과연 김정호가 국경관념조차 몰랐겠습니까?
또 1894년 조선을 다녀간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의 라는 책에도 비슷한 시각이 담겼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봉황성문과 의주(요동반도의 義州) 사이를 왕래할 때는 조선측이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른스트는 19세기 중엽, 열강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보상심리가 발동한 청나라가 무력으로 압록강 대안 지역의 대부분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 연세대 김우준 교수는
"이런 자료들을 볼 때 당시 청나라는 남만주 일대를 조선영토로 묵인, 인정했음을 알수 있다"고 설명하였고, "봉황성 일대까지가 우리 영토임은 유럽에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정도의 대동여지도를 일제에 의한 조작이라는 겁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역사왜곡의 현 주소가 이것 뿐 이겠습니까? 수 없이 많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서울대 박창범 교수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천문관측을 한 결과 삼국시대의
삼국은 한반도에 없다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부에 백제는 중국의 중부와 해안가에,신라는
중국의 남부와 신라후기에는 한반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살수
(薩水)는 지금의 청천강이 아닌 중국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 부근의 강입니다. 이 오대산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사찰로 중국 불교의 성지 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의 역사에서 고구려의 변방이 지금의 요동
이라고 알고 있는것은 역사의 왜곡에 의한 역사교육에 의한 현상 입니다.
고대사에 있어서 요동 요서의 기준이 된 산은 중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기준으로 갈석산의 동쪽이
요동이며 서쪽이 요서가 되었던 겁니다. 이는 중국의 사서가 입증합니다. 이 갈석산은 중국 하북성에 있는
산 입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변방이 지금의 요동이 아닌 현재의 북경 옆의 당산시라고 합니다.
이 지역이 요동인 겁니다. 일제 식민지 사학자들은 역사왜곡을 위하여 갈석산이 황해도에 있다 했고,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은(殷)나라의 후예 백이,숙제의 고향인 고죽국이 황해도 있다고 했습니다.
갈석산이 있는곳에 만리장성이 지나 갑니다. 황해도에 만리장성이 있는지요? 또 동이족의 국가 고죽국은
열국지(列國志)에 있는 내용을 토대로 하면 오늘날 북경의 당산시 동남으로 100리 거리 라고 합니다.
중국 하북성 북단에 있었던 나라가 고죽국인 겁니다.
또 중국의 남제서(南濟書남제의 역사서)는 대륙에 백제가 존재한 사실을 증언 합니다.
또 우리가 알고 있던 백제의 흑치상지 장군은 한반도인이 아닌 양자강 남부인이라고 중국의 사서는 증언
합니다. 백제의 대표적인 8대성(八代姓)도 현재 중국에 고스란이 남아 있습니다. 8명의 백제 귀족으로
그들이 중국의 해안가와 중국의 중부를 지배한 영주들 이었던 겁니다.
신라의 역사를 보면 오늘날 경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왕릉이라 할수 없는 묘가 부지기수 입니다.
왕릉인데 어찌 묘비하나 제대로 없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궁금증으로 어는 재야 사학자에 의한
기록을 소개한다. "삼국사기에 신라왕은 56명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왕릉은 31곳이며, 17명의 왕은 불행하게도 무덤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면 31명의 왕릉이 비석과 함께 있어야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백제왕릉 32곳도 모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정되는 무녕왕릉 이외에는 하나도 없다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고려왕릉 34곳도 모두 한반도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모든 왕릉들은 흔적도 없다.
다만 경주에 있는 왕릉 몇 개는 다닥다닥 공동묘지처럼 붙어 있는데, 정작 비문이 없다.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른다.
공동묘지라도 비석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왕릉에 비문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삼국시대에는 왕의 위치와 왕족, 그리고 군신의 지위는 대단하였다.
더구나 신라 992년간을 지배했던 왕의 묘지가 경주에만 공동묘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언제인가 인위적으로 조성했음을 쉽게 추리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묘를 파 옮기면 삼족(三族)을 몰살시키는 무서운 법이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고증이 사실인가를 알기 위해, 1993년 대륙으로 직접 신라왕릉지를 찾아나섰다.
삼국사기의, 신라 27대 선덕왕(AD.629년)의 기록에 의하면, 시왈 선덕 장우낭산(諡曰 善德 葬于狼山)으로 되어있다. 31대 신문왕(神文王) 역시, 시왈 신문 장낭산(諡曰 神文 葬狼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보면, 낭산은 사천성 검강현 동쪽 2리에 있다고 되어있다.
在四川省 黔江縣 東二里
과연 그곳에 묘터가 있을까가 의문을 품고, 일행은 현지사변공실(縣誌史辨公室)을 찾았다.
편집장 포조정(浦祖政)씨는 편집주임 왕학군(王學軍)씨를 시켜 안내를 해 주도록 했다.
안내를 받아 낭산이 있는 곳을 찾았다. 검강의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낭산이 있었다.
낭산은 수낭산과 암낭산이 있었다. 그러니까 수낭산 바로 아래에 묘 터의 흔적이 있었다.
묘지가 하나 같지는 않고 약 100m 이상의 길이에 묘지가 두 쌍 있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1958년 공산당 대약진 때 모두 파괴시켰다고 왕학군씨가 일러주었다.
본시 백제(百濟)가 호북성(湖北省), 사천성(四川省) 일대에 있었지만,
망한 후(AD.660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왕과 신문왕 정명(政明 AD.678년)의
묘지가 있을 수 있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낭산에 도착해 보니 과연 묘 터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고,
수낭산 밑에 선덕왕과 신문왕의 묘지가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사기(史記)의 기록대로 위치와 지명,
그리고 묘지의 위치가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틀립없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한국에 신라가 있었다고 한다면 낭산(狼山)이란 지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찾아볼 길 없다.
헌덕왕릉지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은, 장우천림사북(葬于泉林寺北)으로 되어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천림사 재산동성 사수현 동 오십리 배미산하
(泉林寺 在山東省 泗水縣東五十里 陪尾山下)로 되어있다.
배미산 아래에 절이 좌우로 있으며, 모두 숲으로 무성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천림에는 크고 작은 샘물이 10개 정도 있다고 되어있다.
물이 너무도 맑고 깨끗하므로 천림이라고 했다고 한다.
산동성 사수현에서
동으로 50리에 있던
천림.
천림(泉林)이라는 지명처럼, 왕릉지 주위에는 천수(泉水)가 퐁퐁
솟아 오르고 있었다.
왕릉지 뒷편 연못의
돌배.
배 길이 약 30미터,
폭은 약 3미터였다.
이처럼 우리의 고대사는 철처히 왜곡되어 있다. 대륙의 역사를 한반도에 어거지로 이주시킨것은 일제였다.
우리나라는 조선초기까지 대륙의 역사라는 설이 있다. 더욱이 고려만 해도 대륙에서 흥하고 대륙에서
망한것이 라는 주장도 있다.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만 해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고려인고
서긍이 간 여행경로를 보면 불과 몇일 걸리지도 않게 고려에 도착한 사실과 그가 전하는 여러 기록을
보아도 고려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단적으로 고려의 수도는 송악인데 이 송악이 우리나라만 있는게
아니다. 중국의 산서성의 성도가 과거의 송악이었고 그곳에서 건국한 왕이 고려 태조라 중국사는 기술하고
있다. 더 우스운일은 그 수도의 강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는 조선조 실록의 기록이다. 또 조선조 실록에서의 한수도 동쪽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지금의 한강이 동쪽으로 흐르는가? 전주이씨 족보에는 이성계의 조상묘의 부근에 만리장성이 있다 했다.
이러하거늘 일제와 친일 사학자는 이성계의 조상묘가 있는곳을 오늘날 함흥쪽 이라 했다.
이 얼마나 역사왜곡인가? 이것뿐인가?
고대사의 수도에 대한 개념적 명칭은 경(京)즉 서경,남경,동경 등등 우리말로 수도에 대한 명칭은 서울..,
그러나 언제적인가 부터 수도를 "장안"이라 했는데 이를 두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번성을 가리켜
수도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라고 말하고 싶다. 고구려 시절의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가
될수 있는 시기가 아닌것이다. 당나라가 건국되기전 900년전에도 고구려는 있었다. 나라의 전통과
역사도 고구려가 더 유구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평원왕때 장안성에 수도를 옮겼다는 기사가 있다.
그 장안을 일제는 수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오늘날 장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당시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가 될수 있을 만큼 당의 역사가 유구하지 않음을 일제는 모르고 하는 조작의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 장안이 현재의 장안이라는 유물의 증거가 평양에서 발굴된 고구려인 유주자사 진의 묘이다.
유주자사가 통치한 지역에서 장안도 포함되는 지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발굴당시 일본,중국인
조차도 이를 인정했는데 유독 한국학자만 부인하고 중국인이라 괘변을 했다. 이를 인정하면 여태껏
이룬 역사왜곡의 진실이 탄로나 파국으로 진행되는 사실을 묵과할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장안이 발전되었고 그로 인해 장안이 수도로서 명성이 빛났을 것이다.
고대로 부터 우리는 중국인들 부터 동이족(東夷族),조선족(朝鮮族)이라 불리기도 했고 또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친일사학자들은 동이족=조선족 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역사왜곡의 진실이 탄로날까봐 라는 식의 회피적 왜곡이다. 중국의 정사에서는 동이족의 다른
명칭으로 조선족이라 했고 조선족의 다른 명칭을 동이족이라 했다. 우리민족을 일컸는 대명사로서의 명칭이
동이,조선족이고,그외 예족,맥족,예맥족,숙신족(만주원류고 라는 청나라 책에서는 숙신의 어원이 조선이라함)
여기서 갈라져간 민족들이 거란(契丹:동이족의 국가 은(殷)의 시조인 설(契)의 후손이라 함),몽고(한단고기
에서는 단군의 동생을 몽고족 왕으로 봉했다는 기사가 나옴),말갈,흉노,돌궐,선비,여진(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신라를 사랑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뜻 신라의 왕족 후손이라함)
부여,북부여,동부여,은(殷)...등
한자(漢字)의 시원이 우리민족 동이,조선이고 한국인들은 그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국민입니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한자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한자는 동방의 글자이지 중국의 글자는 아닙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인들은 입성(入聲;받침글자)의 발음이 잘 되지 않는 민족들 입니다.
고대 한자의 음운사전인 동국정운,강희자전의 발음원칙은 한글자 한발음의 원칙입니다.
다시말해서 모(毛)를 모 라 하고,북(北)을 북이라 하고,해(海)를 해라 하는 것이 음운사전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모(毛)를 마오라하고 북(北)을 ;뻬이라하고,해(海)를 하이라고 발음하는 것은 한자의
본래의 취지인 음운사전 상의 취지와 맞지 않는 겁니다.
본래 대륙에 존재한 한자의 주인공들인 단군조선,부여,고구려,신라,백제와 그 이후의 고려,조선에 의한
한자는 음운사전의 원칙에 맞게 발음되던 것이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인해 중국의 "하북"지방의 사투리가
표준어가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음운사전 상의 원칙과 다른 방언을 쓰게 된 겁니다.
언어학적인 고찰로 보면 초기조선이 대륙에 존재한 이유로 세종대왕에 의한 훈민정음 어지를 알것입니다.
國之於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기존해석;국어가 중국에 다르므로 문자가 서로통하지 않으므로..,
이 당시 중국이라 칭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이라는 국호를 처음사용한 사람은 "신해혁명"의 손문입니다.
중국학자들도 세종 당시에 중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나라는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중국이라는 뜻은 나라의 가운데 즉 "수도"를 뜻하는 뜻으로 사용 되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중국인의 발음체계 처럼 지방마다 다른 음운체계를 표준화 하고자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겁니다.
한민족으로 협소한 국가의 영토내에서 발음이 다르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 입니다.
커다란 영토내에서 이민족까지 포괄할수 있는 통일 발음체계의 필요성으로 한글을 창제한 겁니다.
이 한글의 용도는 한자를 바로 읽을수 있는 통일된 발음기호의 역할인 겁니다.
문화,역사의 고찰로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였지,한반도의 역사는 아닌것 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대륙의 문화가 여타의 작은 중소국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오늘날 "가라데"라는 무예의 원류도 우리 민족에서 찾는다는것은 큰 무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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