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두무사시에 대한 좋은글[퍼온글]
소개] 근래에 보기드믄 무사시에 대한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무술인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필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휼륭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사전에 동의없이 게재하는 점 사과드리며
다른 의도는 없으며 인터넷에 잘못된 무술정보가 진짜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좋은 글을 무술네티즌에게
알려야 된다는 저희의 의도입니다.
삭제를 원하시면 연락주십시요.
대한격검연맹신무관 031-767-0661
[펌]미야모도 무사시에 관한 길지만 읽을만한 글(내생각에) | KenDo 2004/06/23 12:39
http://blog.naver.com/dellmom/140003508200
영화 자토이치
미야모토 무사시란 인물의 상황판단과 적응등의 감각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미야모도 무사시와 二刀流에 관해 일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 1584년경~1645) 라는 검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거기다 무술에도 관심이 있다면 그가 평생 60여회의 진검승부를 벌여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전설적인 검객이자 쌍검술이라는 독특한 검법을 창안한 무사로
기억할 것이다.
미야모도 무사시라는 일본의 사무라이 캐릭터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도 무사시"와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만화 "베가본드" 혹은 수없이 리메이크된 영화나
드라마로 우리나라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전후(戰後)에 일억부가 넘게 팔렸다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로 그가
더욱 대중적인 인물로 부상했지만, 그 전에도 일본 사회에 전해져 내려온 무술담인 이천기(二天記), 단치봉균필기(丹治峰均筆記),격검총담(擊劍叢談)을 비롯해 민간에 전해져 오고 기록된 미야모도 무사시의 전설적인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일생이 오랜세월 숭무정신이 지배했던 일본사회에서 사람들
에게 강한 매력과 흥미를 느낄만한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야모도 무사시는 그의 저작인 오륜서라는 일본 무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병법서
와 국보로 까지 지정된 그의 예술작품들을 볼때, 우리가 그를 단순히 싸움질에만
능했던 사무라이로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그의 병법이나 무술관을 소개한 "오륜서(五輪書)"는 교쿠신 가라데를 창시한
최영의 관장을 비롯해 동양의 많은 무술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해외에 까지 소개
되어 외국 CEO들에게 극찬을 받으며 ‘아마존’ 인터넷 서점에서 한때 베스트셀러
가 되기도 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오륜서만큼 무술에 관해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게
정도를 제시한 책은 드물고 그가 일본사회에서 검성(劍聖)으로 추앙받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무술에 관심있는 사람들 중 미야모도 무사시의 구도자적인 무술인생에는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그가 창안한 검술이나 무술철학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
특히 검도인들 중에는 그의 이도류(二刀流-원래 이름은 二天一流)의 실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다수이다. 예를 들어 "이도류라는 쌍검술은 효용성
이 없어 일도를 휘두르는 검도에 비해 실전성이 떨어진다.
이도류는 천재인 미야모도 무사시만을 위한 무술이다.
그 예로 그 이후 이도류를 구사하는 명인이 등장한 적도 없고 이도류가 부흥한적도 없다.
즉 무술로서 실전적이지 못해 시대에 버림받았다" 라는 것이 그 주장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들여다 보면 미야모도 무사시라는 인물이나 오륜서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미야모도 무사시는 죽은지 오래고 필자가 그런 주장들에 반박해 이천일류
(二天一流)의 실전성을 눈으로 증명해 보일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에는 병장기를 다루는 무술의 효용성이나 실전성을 눈으로 제시
해 보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선 그저 관념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기에 어떤 주장에 대해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건 이분법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륜서에 감명을 받고 연구해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야모도 무사시의
무술에 대한 평가절하 혹은 오해에 대해 나름대로 다른 해석을 제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칼럼에선 미야모도 무사시의 일생과 그의 무술철학에 대해 간략하게
되짚어 보고 이도류의 평가절하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오륜서와 독행도, 병법35개조로 표현되는 미야모도 무사시의 무술철학과 기술에
대해 이해하자면 그의 무술인생을 간략하게나마 훑어 보는게 필요하다.
우선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 의 출생과 인생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어
어떤 것이 분명한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야모도 무사시가 죽기직전 직접 서술한 오륜서나 생전에 그와 친교가
있었던 태승사의 하루야마 화상이 1645년에 쓴 묘비명에 기록된 사실들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미야모도 무사시는 예전에 반슈라 불렸던 지금의 효고현에서 1584년경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신멘무니사이 (新免無二齋)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미야모도 자신도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평생동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부인 히라다 쇼강(平田將監)은 검과 짓테(十手術:포졸 등이 휴대하고 다니는
갈고리가 달려 있는 쇠막대)의 명수로서, 다케야마(竹山) 성주인 신멘 이가노가미 (新免伊賀守)를 섬겼는데, 그 성주로부터 신멘이라는 성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아버지인 무니사이는 이 쇼강의 아들 혹은 손자라는
설이 있으며, 그 역시 짓테와 검술을 밤낮으로 익혀 달인이란 명성을 얻었다 한다.
무니사이에 관해서도 몇몇 일화가 남아 있는데, 당시 쇼군인 요시아키가 무술을
좋아하여 당시 교토에서 검의 달인이라 일컬어 지던 요시오카 겐보와 대결하도록
하여 무니사이가 세번 싸운끝에 두번을 이겼다고 한다. 이에 쇼군 요시아키가
무니사이의 무술을 칭찬하여 일하무쌍 병술자 (日下無雙 兵術者)]라는 호를 수여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야모도 무사시도 어릴때부터 집안의 가풍에 따라 그의 아버지로부터 짓테등의
무술에 대해 배웠고, 그의 묘비명을 보아도 무사시가 가업을 이어받고 아침저녁
으로 연마하여 짓테의 이치가 칼보다 나음을 알아 이도(二刀)에 짓테의 이치를
응용하여 이도법을 창안했다는 내용이 있다.
오륜서의 서문에 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병법,
무예의 길에 전념하여 13세 때에
처음으로 결투해서 신도류(新當流) 아리마 기헤이라는 병법자와
대적하여 이겼다.’ 라고 씌여있다.
우리나라 나이로 14~5세 되는 나이의 소년이
무술로 단련된 어른을 목검으로
두들겨 패서 타살한 것이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도 어렸을 때의 미야모도 무사시는 체격이 장대한 데다 성정이
거친 소년이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으로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성정이 거칠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로운 아버지에게 살해 위협을 받는 등 여러모로 고향하고는 인연이
없던 모양으로, 고향을 떠난 뒤에는 두번 다시 찾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이와 같은 고독한 성장배경과 오랜 무자수행(武煮修行)의 경험으로 인해 독행도에
씌여진 대로 철저한 구도자의 마음과 행동가짐을 체득한 것이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오륜서에서 미야모도 무사시는, 그 자신의 입으로 13세에 처음으로 승부를 겨룬
후 16세에 아키야마라는 강력한 병법자와 싸워 이겼고 그 후 21세에 교토로 상경
하여 29세때까지 여러 유파의 무예자와 만나 60여 차례 승부를 겨뤄 한 번도 실수
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미야모도 무사시에 관한 전설적인 진검승부의 일화는 이 시기에 비롯된 것이며
교토의 명문 무술가문인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결, 간류의 사사키 고지로, 장술의
무소 곤노스케, 창술의 대가인 다카다 마다베와의 대결이 기록에 남아있는 중요한
승부이다.
30세 이후에는 이제까지 이겨왔던 승부가 자신의 병법의 연구가 깊어서가 아님을
깨닫고 조석으로 단련을 거듭한 결과 50세 무렵에는 병법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그 이래로 특별히 탐구할 길도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도
말한다.
오륜서를 펼쳐서 읽어보면 첫 장부터 비슷한 시대의 일본의 병법서와는 확연히
틀린점이 느껴진다.
미야모도 무사시 스스로가 ‘책을 저술함에 있어 옛 것의 오래된 말을 빌리지 않고 ‘니덴이치류’의 견해와 진실한 의미를 써 내려고 하늘의 도리를 거울삼아 쓰기
시작했다’ 고 밝히듯 그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은 현대인이 쓴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이고 비슷한 시기의 다른 병법서와 비교해 볼 때 설득력이나 진실성에서
현격한 차이가 느껴질 정도이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승부가 기록된 ‘이천기’등의 서적들은 모두 그가 죽은지 백여년 뒤의 저술된 것이라 그가 진짜로 어떤 무사들과 승부를 겨룬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가 미야모도 무사시 하면 떠오르는 숙적 사사키 고지로 조차 실제 인물이다,
아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고, 무사시 자신이 생전에 사사키 고지로를 언급한
공식적인 기록도 없다.
그러나 오륜서를 깊이 읽다보면 그가 생전에 어떤 무술인과 대결하였다는 등의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미야모도 무사시가 자신의 경험과 단련을 통해 얻은 무술철학과 기법
에 대해 후세사람들이 정확히 이해하는데 있다고 본다.
오륜서는 자신의 죽음이 구박했다는 것을 깨달은 무사시가 평생의 병법을 글로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기 위해 구마모토 긴부산의 차가운 동굴안에서 저술한 책이다.
독행도에서 스스로도 철저한 구도자의 자세를 강요했듯이 오륜서에 씌여진 문장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의 마음속에 한점의 명예욕이나 사심이 없이 오로지 진실과 진리만을 써내려간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와같이 읽는 이로 하여금 저자의 진실을 말하려는 순수한 의지를 느끼게 하여 시대를 초월한 공감과 감동을
느끼게 한다.
얘기가 미야모도 무사시의 생애에서 갑자기 오륜서에 대한 독후감으로 빗나갔지만, 그의 무도인생에서 수많은 진검승부와 병법 수련은 오로지 병법의 진리의 추구와
무사로서 입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륜서에서도 그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위엄을 보이려고 돌려 말하거나
은연중 자기자랑 같은 걸 하지 않는다.
그는 제1권 땅의 장(章)에서 ‘무사가 무술을 수련하는 이유는 어떤 일에서든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싸움에서 이겨 주군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이름을 높여 입신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덧붙여 세상 속에서 병법을 배웠어도 실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며
언제라도 도움이 되도록 훈련하고 어떠한 사태에도 소용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병법의 도라고 설파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륜서를 처음 읽을 때 처음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많은
충격과 개안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처럼 솔직하고 명확하게 현실을 말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철학이나 무술에 대해 써놓은 책을 보아도 복잡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장황
하게 늘어놓아 저자의 위엄과 명성을 꾸미려는 책이 너무 많다.
또 세상에서는 그런 내용을 수준 높은 차원인양 치켜세우지만 사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위와 같은 말과 더불어 검술이란 상대를 베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둥의 주장을 검성이라 불리는 무사시가 한 말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
한다면, 오늘날 고지식한 무술인들 중 대부분은 그런 말을 한 사람을 두고 천박
하다거나 차원이 낮은 인간이라 욕할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미야모도 무사시는 오륜서의 곳곳에 드러나 있듯이 어떤 편견이나 고루한
사고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매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란걸 알 수 있다.
그렇기도 한 것이 그는 평생 60회 이상의 진검승부를 경험하고 진짜로 이기기
위한 무술을 수련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자나 진짜 무술이
아닌 것을 간판으로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을 매우 싫어 하였다.
오륜서 전체에 걸쳐 차분하고 자상한 문맥 중에서도 ‘가짜 병법과 병법자’들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선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세상을 살펴보건데, 모든 병법이나 기예를 앞세워 마치 파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자기 자신을 상품화하는 사람이 많다.
그 기능을 보완하기보다는 팔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경향
이 있다.
그것을 꽃과 열매의 이치로 따져 볼 때 꽃보다 열매가 적다고 할 수 있다.
열매보다도 꽃 즉, 보기에만 좋고 내용은 허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륜서中 ‘
병법의 도란 무엇인가?’ 부분에서- 그리고 그는 그의 병법을 검술로 작게 한정
시키는 것을 싫어하였고 병법의 이치로서 무사의 치(治)을 실천해 보고 싶어했다.
즉 전쟁시에는 군대를 통솔하고 평화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그는 평생동안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병법의 덕을 쌓아 입신하는 것을 원했지만
전쟁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무사시로서는 좀더 빨리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 안타까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청년시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고 오사카 전쟁에선 히데요리
측에서 싸웠다.
생전에 무사시는 오사카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증인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미야모도 무사시의 전공이 기록된 적은 없다.
그러기도 할 것이 그는 일개 무예자일뿐 병사나 군대를 통솔한 대장도 장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술가로서 점점 이름이 높아져 갔지만 무술을 작은 재주라 부르며 천시했던
노부나가나 도요토미에 비해 무술인을 중용했던 에도막부에선 이미 오노 다다아키나 야규 무네노리가 병법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한 뒤였다.
그래도 에도막부가 들어선 이래 무예자를 사관으로 임관하는 풍조속에서 무사시도
여러 번 임관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도쿠가와家에서 한사코 6천석에서 한 석도
빼지 않아야 임관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6천석이라면 하나의 군대를 지위하는 장군의 위치라 할 수 있고 이는 무예자로서
턱없는 대우였다.
이에 3대 쇼군인 이에미쓰는 미야모도 무사시를 접견하고 6천석을 허락하였으나
주위 가신들의 반대로 무산된 사례도 있다.
무사시는 도쿠가와 家에서 일하고 싶어 했지만 그가 꿈꾸는 위치는 시대적으로도
현실적인 상황으로서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미야모도 무사시는 사관의 길을 포기하고 구도자의 자세로서 병법에만 전념
했는데, 말년의 57세에 이르러 오랜 인연을 맺었던 구마모도의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초청으로 17명의 하인과 쌀 18석으로 주종관계가 아니라 손님자격으로
대접 받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무사시의 자존심과 긍지를 배려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 후 번주의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자신의 무술의 기법을 정리한 ‘병법35개조’
를 저술하여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바쳤다. 병법35개조를 증정한 일개월 후 번주
호소카와가 사망하였고 무사시 역시 오랜 지병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과 인연을 끊고 시가, 차, 서화, 조각등에 전념하였고 고승들
과 교류하며 선(禪)에 몰두하였다.
미야모도 무사시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남긴 예술품들인데 그는
이미 병법뿐 아니라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살아 생전에도 미술로도 유명했다고
하며 스스로 말하기 ‘나는 하늘의 복인지 손재주가 있어 생활에 곤궁을 겪은
적이 없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오륜서에서도 무사는 스스로 도구를 수리하고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듯
그는 무술가이면서도 장인이었고 예술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양자를 셋 두었다.
그 중 미야모도 이오리 (宮本伊織)는 5세 때 아카시(明石) 번주의 시동이 되었다가 점차 승진되어, 후에는 봉록 4천 석의 원로직에 종사하다가 1677년 3월 사망하였다.
무사시의 건강은 호소카와가 죽은지 2년 사이에 급속히 악화되어 거처를 구마모토
의 이와도산(현재의 구모모도 시의 서쪽 아리아케 해에 면한 긴부산)의 운암사란
절의 한 동굴로 옮겨 좌선하며 선을 수양하였다.
여기에서 10월 10일에 오륜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겨울철의 동굴 생활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져 다음해
5월 12일 죽음에 임박하여 삶을 뒤돌아 보며 ‘독행도(獨行道)’를 써서 남긴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5월 19일 향년 62세로 삶을 마감한다.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살펴본 미야모도 무사시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륜서 첫 장의 서문을 보면 그의 무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병법의
도리에 따라 무예와 모든 기능의 길로 임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에 대해
나에게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었다.
모두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건방져 보이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동시대의 유명 병법가들인 야규 무네노리 (柳生宗矩),
오노 다다아키 (小野忠明) 처럼 스승에게 무술을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술을 연구하고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처럼 지극히 합리적이고 독자적인 성향은 미야모도 무사시가 기존의 일본 무술과는 성격이 다른, 뭔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오륜서에 흐르는 미야모도 무사시의 무술사상은 처음부터 평화
기의 에도 막부시대가 지향하는 무술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1686년경에 씌여진 세키운류검술서(夕雲流劍術書)에는 당시부터 100년 전에는 검술이 세간에 유행하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무술을 사용할 상황도 여유도 없었기에
전쟁을 위한 무술을 연습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평화가 오고 나서 무사나 낭인들이 한가하여
목도(木刀)를 들고 싸움의 승패를 연구하고 단련하는 사이에 많은 무술가가 나와
유파가 많아 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본의 검술은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때에 전쟁에서
의 실전을 위해서만 고안된 것이 아니다.
세키운류검술서나 여타의 병법서에서도 언급되듯이 그 당시에 유행하는 검술법과
유파는 전쟁이 끝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던 평화기에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전국시대때 이름있는 무장들이 연습했던 무술은 검술등의 무술이라고 한정
지을 수 없는 성질이었고 그나마 대다수는 그런 것을 따로 지도 받고 연습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군대에서의 연습과 도장에서의 연습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전국시대때 존재했던 유파들이 전쟁에서의 실전을 도외시한
연습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전시였기 때문에 그들의 기술이 매우 실전적인 상황을 염두해둔 것이었지만, 그
기술이 도쿠가와 막부때처럼 높이 받아들여지고 지위 높은 무장들이 그것을 연습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즉, 검술등의 무예라는 것은 당시 낭인들이나 하급무사가 연습하는 하찮은 잡기에
해당되었고, 전쟁에서의 실전과는 그다지 큰 연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가고 평화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낭인과 무사들은 오랜 전란의
숭무적인 사회분위기 속에 편승해서 전쟁과는 큰 연관이 없는 작은 의미의 검술
유파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정국을 안정시킨 에도 막부는 사족(士族)계급을 위한 나라를 다스릴 사상
과 이념이 필요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도쿠가와 가문의 무술사범에서 시작해서 다이묘 까지 오른
야규 무네노리의 ‘천하치국의 검’의 사상 등이다. 즉 당시 일본은 조선이 유교
를 나라의 이념으로 삼았듯 무(武)를 나라를 다스리는 사족(士族)의 이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시대적으로는 어느 유파의 검술이나 병법이 전쟁에 효용성이 있느냐 실전성이 있느냐는 별로 연관이 없었고 말로만 무술과 전쟁을 연관짓는 관념론적인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점차로 실전이라는 것은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검(사무라이가 들고 다니던
태도(太刀)는 전장의 도구가 아니었다)의 승부만으로 한정 지어지게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전국시대때 대 여섯개만 존재하던 병법유파가 에도 시대
에 들어서는 수백개로 쪼개져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미야모도 무사시는 이런 시대가 막 시작될 때 태어나 에도 막부가 안정기에 들어설 때 사망한 셈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는 무술에 있어서 실전에서의 효용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그리고 그 실전이란 큰 의미에선 전쟁에서의 병법이었고 작은 의미에선 두개의
칼을 차고 다니던 사무라이 끼리의 대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병법이 점차 관념론적으로 변질되어가고 진정한 병법의 이치
에서 멀어지는 현실에 대해 한탄했으며, 병법을 상품화하거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비 실용적인 무술과 유파들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했다.
그리고 미야모도 무사시가 생각하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의 표출이 두개의
칼을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사시의 니덴이치류가 쌍검술만 사용하는 기술인줄 오해하지만,
두개의 칼은 그가 생각하는 기술의 한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다.
오륜서에서도 미야모도 무사시는 이도(二刀)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도는 두개의 칼이든 하나의 칼이든 그것을 상황에 따라 자유롭고 유용하게 구사
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도의 철학은 사무라이가 가타나(대도)와 와카자시(소도)를 항시 차고
다니므로 실전에 부딪쳤을 때 가지고 있는 무기를 남김없이 유용하게 사용하자
는데 있다.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그는 하나의 칼을 양손으로 잡는건 전혀 실전적이지 못하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도법을 고안해 양손에 검을 휘두르며 한 손으로도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기술을 터득해 한손으로 싸울때가 유용하면 한손으로 싸우고 많은 적을 상대할 때
등에는 양손에 검을 들고 싸우라 주문한 것이다.
거기다 무사라면 자신이 무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하며, 상황에 따라 어떤 무기든
쥐고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병법의 도라고 강조했다.
즉 때에 따라 좁은 장소에선 소도로 싸우고 넓은 장소에서 창이 있으면 창으로
싸우는 등 상황과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도구를 가리지 말고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천기(二天記)에 기록된 사사키 고지로와의 결투가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대결에 대한 묘사만큼은 이런 무사시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승부에서 승리를 위해 어떤 무기라도 사용하라고 썼고,
실제로도 긴 장검을 휘두르는 고지로에 맞서 그 보다 더 긴 노를 깎아 만든 목검으로 이겼다고 전해진다.
무사시의 무술철학은 이처럼 병법의 본질에 대한 접근과 실전에서의 이득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은 이미 안정기에 들어서고 무술은 계급을 지배하는 이념이며, 실전은 관념에 불과한 에도 막부시대와는 맞지가 않았다.
사무라이의 다찌(太刀)는 사족(士族)의 지배이념으로써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고
실전의 개념은 칼을 찬 사무라이들 간의 다찌만의 승부에서만 통용되었다.
즉, 미야모도 추구하는 이도류의 철학은 창술이나 짓테,나기나다등의 전장의 기술
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에 시대에 부합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볼 때 이천일류(二天一流)가 실전성이나 실용성이 없어서, 혹은
원리 자체가 무사시만을 위한 것이라 유파가 몰락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이도류가 널리 퍼지지 못한건 그렇게 될 만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철학이나 관념은 어떤게 더 낫다고 시비를 가리거나 승부를 낼수 없다.
막부시대의 사무라이 들에게 검술은 검으로만 이루어지는 작은 승부 혹은 관념의
대상이었지 전쟁의 도구가 아니었다.
전쟁과 실전에서 가장 실용적이라 하는 창술이 일본 무가사회를 지배하는 무술개념이 되지 못한걸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니덴이치류가 부흥하지 못한 이유에 여러 검도사이트에서 일도에 비해
실전성이나 실용성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라고 본다.
그렇다면 현대검도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북진일도류가 실전에서 강함을 증명해
보였다는 말인가?
북진일도류가 현대검도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건 당시 시대적으로 북진일도류를
수련하는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수련인구가 많았다고 실전적이고 실용적인 유파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또 실전적이다 라든가 실용적인 무술이라는 평은 그것을 검증 받을 수 있는 무대
에서만 확인이 가능할 뿐이다.
예를들어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기술을 가리지 않고 창과 검이 맞부닥치던 콜로세움 같은 공간에서라면 분명히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데 태권도 같은 동양무술이 전세계를 휩쓸던 90년대 이전에 브라질 주짓수
같은 무술이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아마 80년대에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주짓수가 ‘룰이 없는 진짜 실전에서라면 그 실전성을 입증해 보일 수 있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만약 93년도에 UFC라는 무규칙 이종격투대회가 열리지 않았다면 브라질 주짓수는
몰락해버린 니덴이치류와 같은 운명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이소룡이 영화속에서 괴성을 지른후 동양무술 붐이었던 당시에 시대적으로 브라질
주짓수와 같은 무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건 어느 무술이 실전적으로 강하다 약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브라질 주짓수
가 당시 시대상황, 즉 시류에 부합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러 무술유파가 충돌하는 가장 실전에 가깝다는 이종격투에선 다르다.
실전적이고 실용적인 무술만 통용되고 또 시대가 그걸 원하는 것이다.
예전에 "지구도전탐험대"란 프로그램에서 일본 검도인들과 옛날에 우리나라 등
에서 왜장도라고 불렸던 나기나다(長刀)를 수련하는 아줌마들과 이종대결을 벌인
걸 보여준 적이 있다. 결과는 검도의 패배였다.
전장무기로 불렸던 나기나다의 길이와 하단 공격기술등, 그들이 대처해 보지
못했던 기술과 전술에 완전히 말려들어 당했던 것이다. 그것도 한 개의 시를
대표하는 검사단이 취미로 수련하는 아줌마들에게 말이다.
이 방송을 본 사람은 당시 약간 충격을 받은 모양으로 아직도 무술사이트에 가끔
언급하는걸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은 초기 이종격투에서도 빈번하게 보여졌었다.
또 한 손으로 드는 칼이 두 손에 비해 실용성이 떨어진다면 왜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에서 한 손의 칼이 통용되었던 것일까?
한 손으로 드는 칼은 약해서 상대를 벨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두 손으로 칼을
잡는 검도를 익힌 사람들의 편견이다.
이에 대해 미야모도 무사시는 두 손으로 칼을 잡는 것은 실전에서 전혀 이로운
방식이 아니고, 마상에서나 수렁,진흙,돌밭,가파른 길, 사람이 많은 곳에서 불편
한 점이 있다고 말하며 익숙해지면 누구나 한 손으로 상대를 벨 수 있다고 설파했다.
에도 막부시대의 비교적 실용적인 병법서인 병술요훈(兵術要訓)에서는 온몸에
갑주를 걸치 전장에서 베거나 찌르는 검술법으로는 상대를 죽이기 힘드므로,
적의 목을 베려면 결국 격투해서 자르는 수 밖에 없다 라고도 씌여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중세시대의 전쟁관련 서적에도 똑같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일본의 와카자시(소도)와 서양의 대거(찌르기 위한 단도)는 그 쓰임새가 매우
유사한 것이 된다.
이처럼 현대검도의 대도법이란 것은 사실 그들이 말하는 전장에서 실전에는 별
실용성이 없다. 검도라는 것은 서양의 펜싱과 여러면에서 의미가 비슷하다고 생각
한다.
즉 그 기술은 평시의 검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무사 혹은 기사의 검으로서 관념
의 대상이었기에 실전과는 별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로 살펴볼 때, 미야모도 무사시의 니덴이치류가 실전성이 없어서 도태된
것라는 생각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만약 그 시대에 현대의 이종격투 같이 시합이 존재
했다면, 미야모도 무사시의 기술과 유파는 지금의 브라질 주짓수처럼 번영했으리
라 확신한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무술은 실전의 무대가 아니라 관념이 지배하는 시대에 버림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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