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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신흥무관학교"를 검색하세요.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전문 역사학자들은 누구나 압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 후신이 신흥대학(경희대의 이전 명칭)이며, 그래서 그같은 무관학교의 전통으로 인해 원래 부터 경희대가 무술분야에 강하다는 것을...예를 들어 1대 태껸인간 문화재 고 신한승옹이나 60년대 10년간 무패의 신화를 남긴 최영렬 선수 등..그때부터 이미 태권도와 체조등에서 최고였죠...국립 정신문화연구원이 간행한 민족문화 대사전에도 나와있듯, 60년대 한국 체육은 곧 "경희"를 의미했습니다. 체육학과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우리나라에 체육 단과대학을 최초로 만든게 "경희대"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잘 하시면 관련 자료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올리신 정보는 부정확한 것입니다.


*참고로 경희와 신흥무관학교의 적통관계를 보여주는 다음의 문건 올립니다.


Ⅴ. 해방이후의 신흥대학

1945년 광복 후 이시영은 귀국한다. 이건영·이석영·이회영·이철영·이호영의 다섯 형제는 모두 독립투쟁 중에 운명을 달리한 후였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후 곧바로 신흥무관학교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귀국 후 무엇보다 신흥무관학교의 부활에 박차를 가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은 이시영의 兄인 이석영의 자금으로 가능했다. 이석영의 전 재산으로 신흥무관학교는 설립을 보았고 초기 그의 재산이 모두 고갈될 때까지 재정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영감(이석영)깨서는 항상, 청년들의 학교가 없어 염려하시다가 토지를 사신 후에 급한 게 학교라, 春分 후에는 학교건설을 착수하게 선언을 하시고, 지단(地團) 여러 천 평을 내놓으시고 시량(柴糧)까지 부담하시고 아우님 오시기를 기다리셨다. 3월 초순에 우당장(이회영)이 오시니, 여러 형제분은 자리를 못 잡은 모모 동지들께도 5간 방자에 1년 지낼 땅과 1년 농사 지을 시량까지도 주어 안전케 하셨다. 그 외의 농군 방청으로 조선서 땅 사서 소작 주면 가을에 도조(賭租) 가져오듯 하는 건 외방청이고 내방청은 일꾼 두고 자농(自農)하면 일꾼 식구는 다 먹이고 가을에 3분의 1은 일꾼의 삯용으로 주는 게니, 우리 동포 구하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 시숙 같으신 분은 금세(今世)에 없으신 분이지만 어느 누가 알리요, 생각 곧 하면 원통한 어찌 적으리요.




위의 회고문에 기초할 때 교주(校主)로서 이석영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는 국권회복을 위한 무관양성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조국광복 후에는 국가 재건을 위한 각 부문의 인재 양성이 요구되었다. 이에 1947년 2월에 신흥무관학교의 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新興專門學院을 설립하였다.
당시 운영진과 교수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설립자
李始榮

학장
(初代)李圭昶 (二代)李允榮

부학장
李圭鉉

사무장
趙成集

총무과장
姜鍾根

서무과장
張學葉

교무과장겸 전임교수
金在訓

학생과장겸 전임교수
元喜得

전임교수
崔近植, 羅善微

전임강사
朴孝二, 石宙明, 白龍基, 陳承錄, 鄭鏞源,丘彙洙, 金海均,
崔泰永, 朴仁守, 梁柱東,玄受吉, 金龍培, 邊宇昌, 李建鎬,
李承鉅,韓泰熙, 李鍾晥, 劉在勳, 崔仁活, 尹永春,金永義

시간강사
朱宰璜, 白云出, 金秉旭, 李容漢, 閔瞳植,金致傑, 姜春熙,
李承烈, 朴勝維, 沈鉉尙,沈在原, 柳在軒, 金容達, 洪 又,
扈章煥, 楊世植, 郭福祿



신흥전문학원을 위해 1946년 3월 7일에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覺皇寺를 불교총무원에게서 구입하였다. 신흥전문학원이 명실공히 신흥무관학교의 부활임을 보이는 모임이 다음해인 1947년 7월 19일 각황사에서 열렸다. 이 모임을 알리는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韓末의 혼돈한 정세를 바로잡고 사직을 부뜨러가려는 新興武官學校는 소위 한일합방으로 폐쇄되고 교육받은 무관들은 가슴에 벅차는 서러움을 안고 혹은 중국으로 혹은 시베리아로 흩어져 이미 뼈를 남의 강산에 묻은 이를 뒤로 한지 四十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직 조국의 광복을 염원 투쟁하여 오늘 선배들도 해방조국의 안온한 품속에 도라와 지나간 젊은 혈기의 옛일을 회상하며 오는 十九일 상오 十시 시내 수송동 覺皇寺자리에 모이기로 되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 선배들은 해방 후 조국에서의 모임을 각황사에서 열었다. 각황사는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세워진 신흥전문학원이 있던 자리였다. 모임의 성격과 관련하여 모임장소를 신흥전문학원으로 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흥전문학원에서 선배들이 모임을 가짐으로써 신흥전문학원을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학교로 인정한 것이 된다.
이 학원은 그 후 1949년 2월 15일에 재단법인 省齋學園 新興大學으로 발전하여 同年 3월 20일에 정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당시의 임원진에 대한 「官報」(1949년 3월 29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다음 쪽 박스기사 참조)



문교부 제四七二호

재단법인 성재학원 설립자 이 시 영

단기 四二八二년 三월 二二일부로 신청임원취임의건을 하기와 같이 인가함.

단기 四二八二년 三월 二十일
대한민국문교부장관 안 호 상

이 사 장 李圭鉉

상무이사 趙成集
이 사 李圭昶
이 사 李圭旺
이 사 李龍術
감 사 朱幹欽
감 사 李圭悅



신흥대학은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부산으로 피란했다. 전란 중의 막심한 경영난에도 불구하고 명맥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이시영은 부통령의 직위에 在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이 대통령이던 이승만과 대립적이었다. 따라서 이시영의 장남인 이규창이 학장으로 있던 신흥대학에 대한 불이익이 많았다.
전쟁시기라는 혼란한 상황속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궁지에 있던 신흥대학은 1951년 5월 18일 趙永植에게 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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