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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류쿠국), 오키나와를 말한다!

유구국과 과거 고려,조선과의 관계는 외교적으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였다.
단순히 활 같은 재료나 수입하고 있는 그러한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유구국은 일찌기 중국 명나라와 사대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조선과는 그 관계 이상의
교류를 하였다. 이는 조선의 학자 신숙주가 왕명으로 집필한 "해동제국기"등에도 나타나는 바라.
유구국은 독립된 왕조 였으나 임란때 코무덤,귀무덤의 주인공 사스마번에 의해 임란후에
지배를 당하고 임란시 시마즈번에서 참전을 요구 하나 거부 하였다.
그 전에는 1388년경 유구왕 쥬만왕 찰도가 고려에 국서를 보내고 고려인을 송환했다는 기록도 있다.
유구가 여전히 독립국으로 존재해 왔다는 근거는 1854년경 미국과 유구간에 이루어진
수호조약으로 알수 있다. 그 유국가 독립된 왕조 였다는건 해동제국기에도 기록하고있고,
그 왕들의 계보도 기록하고 있다. 그후 천황중심제에 의한 중앙집권 군력에 의해 유구는 일본에
완전 병합되고 그들의 역사도 잊혀져 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데나 쇼도쿠씨는 빈약한 유구의 역사를 복원코자 한국의 조선왕조 실록등의
사료를 많이 참고하고 조선 성종때 쓰여진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의 "팔중산 군도 표류기"(오키나와
표류기)등은 오키나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라고 한다.
사스마번에게 1609년에 강제적 무력 침공으로 일본의 강점이 있으면서 그들의 민속행사는
여러모로 탄압받거나 일본화(가라데)되었다고 본다.
major씨는 이러한 역사적인 실례를 망각한 채 1609년 이전이 아닌 그 후에 쓰여진 1700년대의 기록
으로 가라데의 역사를 말하려 한다. 그때는 일본 번주의 강점기가 행해진 이후에 쓰여진 기록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무예를 받아들이고 일반화 하면서 그 기원론에 관심조차
있었을까?
옛날 해동제국기에서는 왕외에 수많은 군소 추장들이 존재해 왔는데 그 군소추장들 중에
고인이 된 가데나 쇼도쿠씨는 유구국의 장전대주 라는 가문의 주인공이 실존인 "홍길동"일 것이라는
가설을 내 놓았다. 그 논거는 무수히 많으나 그 장전대주 가문의 족보가 박물관에 보존되어 오는데
그 장전대주 가문에 결혼을 한 성씨가 일본성이 아닌 김,나,윤씨등의 성을 가진이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라는 기록도 있고.참고로 이 장전대주 가문의 가계기록은 조선 세종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뿐만 아니다.오키나와 구지천성터에는 고려청자,조선백자,조선에서 채굴되는 선박용 닻으로 쓰이는
화강암,조선화폐(해동통보)..,이들 홍길동(장전대주)무리가 전했다고 하는 조선 재래종 볍씨.
이처럼 조선과 유구는 수백년간 조선과 왕래를 자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나타내는 글자가 이라고 했고 표기의 변천으로 으로 표기된다
이는 일본인 학자들의 학설이다.
그외에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1719년 사신으로 갔던 신수한이 대마도의 서기인 우삼동의 항의에 답변하여 말한 부분이다.
우삼동은 "조선사람들이 그들의 문집에 일본인을 왜놈,만추 로 표기하고 있고 사신의 하인들 조차
일본인을 왜놈으로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인을 사모하는 뜻에서 "당인(나라 당,사람 임)"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형평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이에 신수한은 과거 임란때 일본인들이 과거에 참혹한 만행으로 조선을
유린한 전과에 대한 당연한 반응 이라며 훈계했다.
이처럼 일본은 이 시기에도 한국=조선을 일컬어 "당인"이라 지칭했다.
과거 일본의 두부의 원조를 이룩한 "당인정"의 시조가 조선인 이종환이라는 사실을 보면
설득력이 있는 증거 랄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라데 즉 당수도도 조선에서 건너간 택견등이 시원이 되었을 것이다.
장전대주가 전한 풍속을 줄다리기,용왕굿,택견 이라 한다.
그리고 일본의 번주가 강점한 이후의 기록은 다분히 승자의 기록 중심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 했듯이..,그리고 우리의 문화인
불고기 마저 빼앗아가 그 문화의 종주국이 일본이 되었듯이.., 그것에도 만족못한 일본이
김치마저 종주라고 나서는걸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나?
이러한 과정으로 오키나와에서 전해진 가라데도 일본인의 의도 대로 일본식으로 일반화되고
역사의식을 망각시키고 왜곡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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