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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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


아침에 남행 버스를 탔다가 한밤중이 되어서 잘 곳으로 돌아옵니다.
약 14시간의 기행 ... 그런데 여기 우리를 깨우는 글 한 편이 있군요.

아래 학인님의 5월 22일 기사 "극진 가라데 사이트를 방문하고 ..,"
또 "가라데의 언어학, 고고학, 역사학적인 고찰"이 그것인데, 누군가
필생의 각오로 써야 할 를 위해, 여기 몇 편을 더 붙입니다.
(글의 흐름을 위해, 영문 사이트 내용을 그대로 옮긴 점 이해바라며 ...)

제목: FAQ History
출처: www.soobahkinternational.org/html/faqhist.htm

Most history is written by the winners. Sometimes, politically,
they had to erase the good qualities of the losers which might be
harmful to their royal legitimacy. In Korea, there were the Koryo
(918-1392) and Chosun (1392-1905) dynasties which rose up by
the power of warlords, but later expelled opposition military
personnel, sometimes by using foreign forces, others by using
Confucian principles.

After 1275, according to a history book in an Okinawan library,
the kingdom of Okinawa received 1,000 boat people who had been
expelled from Koryo (they were, presumably, army personnel and
family members who had fought against the Mongols and had been
defeated by the Mongol-Koryo alliance. The history of Koryo tells
us that many army leaders trained themselves in SooBahk. But
some of their offspring were called rebels after the Mongols
invasion into Koryo. The Koryo dynastic history indicates that
these rebels were defeated and moved to Jin-Do and, later,
Jeju-Do islands). We might guess that these people chose to hide
their ethnic identity under the name Tang instead of Koryo
to try and avoid further persecution.

After 1592, the Japanese invaded Chosun and kidnapped thousands
of Chosun people for labor in the production of china, porecelain,
weaponry, even tofu. (The Japanese would repeat this process during
their 1910-1945 occup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forcing native
Koreans into the service of their military-industrial complex, to include
comfort women, or sex slaves, for Japanese troops across Asia).

In any event, the Japanese warlords who invaded in the late 16th
century prepared a P.O.W. reservation to service the needs of their
lifestyle and industries. The reservation was called TangInJung
(Tang Dynasty Peoples Street/Avenue). They couldnt call it Chosun
Street for obvious political reasons.

In 1609, Okinawa, the Ryukyu kingdom, was defeated by a warlord of
Kagoshima and was ultimately ceded to Japan in 1879. The people of
Okinawa were discriminated against and were prohibited from owning
or even handling weapons. So, they refined their bare hand and foot
techniques and called this TangSoo, not TangSooDo. Once, Hwang
Kee of SBDMDK said he added the do. In my memory, until the late
1970s, we called our style TangSoo. After the TaeKwonDo organization
rose up, we found we were called TangSooDo. In any case, the
Japanese governments drive had united these styles under the
name karate (empty+hand).

Additional Note for Q&A about TangSooDo History 당수도
(TangSooDo)의 역사에 관한 영문 Q&A에 더하는 말:

[# 답변의 한계를 이해하시도록 제 이력을 말씀드리면; 1960년대 중엽까지
놀이의 일종인 "까기"가 전부였다가 체계적인 무술을 시작한 것은 "당수"로부터
였습니다. 70년대가 시작되며, 무덕관 설립자 황기님의 "수박도대감"에서
"당수(도) + 수박(도)"를 보기 시작했고요. 70년대 말 사범 자격을 받은 뒤 2001년
까지 몸담으며 그 사이 두어 번의 도장운영과 10년쯤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 다시 10년 이상, 지금 일하는 곳에서 또 새로운 조직 "국제수박(手搏)연합"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많은 무술가들을 만났으며, 이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형태의
"수박"을 찾는 데 대한 영감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 보고 듣고
경험한 개인적인 내용이지만,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2001-2002년 사이에 KBS-TV와 SBS-TV에서 방영한 몇 개 역사물들은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간 문물 전래의 역사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대개의
역사가 승리자에 의해 씌여지며, 또 승리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정통성
유지를 위해 역사를 왜곡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위 방송에 나온 다수의
양심있는 사학자들의 증언과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서의 전적, 사료들은 한반도에
있던 고려(918-1392)와 조선(1392-1905년) 또 일제의 40년 점령기를 아울러
전혀 다른 각도에서 무술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 1275년 전후의 기록으로서, 오끼나와 현립도서관 서지의 "내도인(외지에서
섬에 들어온 사람)" 관련 기록, 동경대학교 도서관의 미분류 외교문서, 고려자기와
도요지의 분포 및 난파선 발굴기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음식 또 한반도에
가까운일본 섬들의 문화현상과 "당인정(당나라 사람 거류지?)"에 대한 내용 등은,
흔히 알려진 고려의 대외교역, 송 및 원과의 외교관계, 대몽항쟁, 삼별초의 난과
그 패퇴행적에 연결되는 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오끼나와(유구국)
의 문물제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더 확실한 것이 밝혀질 것으로 봅니다.]

[# 1993년에 출판된 "오끼나와전무비지 (BUBISHI MARTIAL ART SPIRIT by
Geroge W. Alexander & Ken Penland)"라는 개인 저작물엔, 사료가치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진 "무비지"가 원전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명나라 (1368-1636) 때
모원의(Mao Yuen Yi)가 1621년에 또는 그 후 청조(1636-1912)에 들어와 완성을
보았다는 240항목의 91책을 말하며, 조선조의 "무예도보통지 (1790)"도 그의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1800년대 중말에 몇몇 무술가가 직접 중국에 가서
"무비지"를 복사해 온 것이 오끼나와 무술의 원조라 말하며 나아가 1393년에 완성된
오끼나와의 중국인 거류지와 대륙의 교류를 들어 시간적인 비약을 보이기도 합니다.]

[# 이것은, 위에 나온 "당인정 (즉, 당나라 사람의 거류지가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납치해 간 기술인력의 집단촌이었다는 일본 사학자의 주장이 있었음)"
에 근거해 조사가 더 필요하겠으나, 흥미로운 것은 그 때가 바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등장한 이듬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고려조의 무신정권 및 군사와 배의
숫자에 관한 기록, 진도, 제주, 그리고 위 역사적 편린들을 조합, 대몽항쟁의 주역이던
사람들이 오끼나와로 흘러 들어갔고, 현지 왕국에 협조하면서 고려의 문화를 전파하는
한편 조선기술을 이용해 원나라에 밀려났던 한족과 접촉을 시도하여 고려회복을
구하던 중 이성계가 반란으로 조선을 세움에 따라 역사의 본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가정합니다.]

[# 앞에 나온, 1592년 이후의 일본 "당인정"이 당나라 사람들의 거리였던 것이
침략주의의 추한 증거를 가리려던 정치적 목적에서 이름붙여졌다고 가정한다면,
오끼나와의 중국인 거류지 (또는 그 보다 앞선 시기의 고려국 유민들의 거류지)는
교역과 신분을 보호받을 수 있었던 장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조선말기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거의 40년 동안 한반도를
점거한 일제의 각종 수탈과, 정신대, 징용 등으로 재현된 바 있습니다. (강제징용의
증거는 일본의 북쪽 끝 섬 홋카이도에도 남았는데, 이 또한 TV에 방송되었습니다.)]

[# 어쨌거나, 오끼나와의 유구(Ryuku)왕국은 1609년에 이르러 가고시마의 한
군벌에 의해 무너지고 1879년에는 일본에 병합됩니다. 이때부터 오끼나와 사람들은
항상 본토인과 달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또한 무기를 다루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역사는 적고 있습니다. 즉 농기구에서 나중엔 맨손만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오끼나와의 무술가들이 중국 무술과 직접 접촉되기를 원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 말해지듯, 중국의 무술가들이 외국인에게 순순히
기술을 내어주지 않았고, 또 이들 오끼나와의 무술가들이 몇 년을 걸려 베껴온
"무비지"가 혹시 가짜였거나 아니면 별 것 아닌 내용이었다면, 이들에 기대고 있는
가라데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끝으로, 어떤 까닭에 당수(唐手)와 공수(空手)가
같이 가라데로 소리나게 된 것인가도 연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기타: TangSooDo/DangSooDo의 철자변화에 관해서는 Q&A -> History of
TangSoo (www.soobahkinternational.org/usfk/index.htm)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한글 사이트 soobahk.or.kr의 Q&A 2003/06/25 기사 "수박(手搏),
수박기(+技), 수박희(+戱), 수박도(+道)..," 2003/05/02 기사 "수박(手搏,
ShoeBo = SooBahk)의 역사는?" 및 공지사항 2004/03/26 기사 "수박의 역사
(야후 위키지식에서 검색됩니다)" 등의 관련 내용을 찾아주십시오. 또
www.soobahkinternational.org/html/discussion.html에도 참고할
내용이 있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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