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 때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9, 이 때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1945년 9월부터 12월까지 - 이 시기 미군정은 각 지방의 자치기구인 인민위원들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우파. 민족주의자 일부와 일제 때의 관헌 등을 군정 지방기관에 등용한 후 전 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무렵 왜놈 앞 잽이 하던 놈들을 앉혀놓고 인민위원회를 해체하라고 하니 어느 누가 고분고분 듣겠소.
이때 빨갱이로 몰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말하자면 대일전이 승리하는 날 남한의 일본경찰은 2만 명 그중 8천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미군의 보호아래 명령 하에 한국인 애국자들을 무자비하게 무지막지하게 살해하고 다녔다.
1946.1.15일 - 미 연합군 총사령관은 남한주재 미군정으로부터 특정 인물의 입국 요청을 받았을 때 일본인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한다는 취지를 발표했다.
1946.3.5일 - 처칠이 트루만의 동의를 얻어 미주리주 홀튼시에서 연설을 하면서 세계적인 냉전을 선언했다. 여기서부터 남한 군대가 미군정에 완전 예속되는 것이 정식으로 출현 된다.
1946.6월 - 미 국무장관 마샬은 한국에서 소련 비협조적인 태도 비난.
1946.9.24일 - 미군정에 의해서 강요되는 온갖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으로 필연적 민중항쟁은 총파업투쟁으로 가 1946년 이 한 해만도 170건 파업에 총 5만7,000여 명의 노동자 참가 각계각층 민중들이었다.
1946.10월 - 3백만이 넘는 인원이 참가 항쟁을 했다. 대구 폭동 등등. 10월1일-9월24일까지 대구 400여개 공장의 노동자들은 학생 및 일반 시민 약 1만여 명은 미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로 외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1946.10.7일 - 도처에서 야만적인 민중학살이 다반사로 자행될 때. 마산에서는 미군과 경찰과 시위중인 애국시민 6,000여명을 향해 무차별 사격에 선지피가 강을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1,500명 학살사망. 2만6.000여명 중상. 1만5,00여명 체포 연행.
1946년10월부터 양키들은 통역관을 앞세워 시골 집집마다 다니며 삭 삭이 뒤지며 강제로 쌀을 막무가내로 공출을 해갔다. 이 것으로 우린 쌀이 없어 굶어 죽어야만 했고 미 양키들은 이 쌀을 오키나와로 빼서 군사기지 건설사업에 썼고 우린 날자 지난 미국제 밀가루 몇 포대로 살아야 했다. 이 것이 밀가루 원조다. 또 이 밀가루 USA 마크 달린 포대로 당수도(공수도) 도복을 만들어 입어야 했다.
1946.중순 - 전주 민주 청년단체 계획된 당국허가아래 평화적으로 행진.
1946.12.31일 - 전라도 화순 탄광 노동자 파업 돌입 5,000여 명. 이중 3,000여명 광주로 도보 행진.
이 지음 일본에서는 -(역사의 증언에 기타 표현)
1946년12월24일 - 조선인 생활보장위원회는 동포의 모든 권리 옹호를 위한 궁성 앞에서 열고 대표 10여명 검거 폭도로 죄명을 씨워군률 재판에 송치 추방.
1947년1월 전쟁 후 도적이 성행하여 골머리를 앓던 일본 방범주간에 그것을 알리는 포스터에다 태극기를 머리에 붙인 도적놈을 그러놓고 도적놈은 모두 조선인이니 잡아 죽이라고 떠들어 댔다.
왜놈들은 미군사령부를 등에 업고 동포들이 세운 학교들을 폐쇄시키려고 획책했다. 이에 동포들은 이러한 조치를 철회하기위해 일본 전역에 시위운동을 했다.
1947년9월11일 - 북해도 북견에서 일본인 80명이 동포40명을 집단 구타 2명 죽고 5명의 변사자가 생기는 불상사 등등.
미군이 남한 땅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8일이였다. 8.15일 해방이 반대로 읽어보면 방해로 된 날로부터 약3주 후다. 그때 미군 선발대가 비밀리에 도착하여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되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보하였다. 15일부터 3일 동안 휘날리던 태극기가 다시 8월18일 오후에 일장기로 바꿨다.
그러기 전 태평양 방면 미육군총사령관 맥아더는 1945년 9월2일 포고령 제1, 2, 3호를 발표했다. 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침략)한다.
제1호 38도 이남의 모든 행정권이 당분간 맥아더 사령부의 군정 하에 시행된다. 조선 인민공화국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제하 행정기관 직원의 계속근무와 미군정에 대한 절대복종을 명령한다.
제2호 군정하의 한국인은 군정청에 소속되는 법정에 의해 재판받게 된다.
제3호 군정하의 법화는 조선은행권과 미군 표(MPC)임을 규정한다.
45년9월9일 포고령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 하에서 시행한다. 등등 6조까지 날렸다.
특히 미 상륙군에 항의를 하면 “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될 것”이라고까지 경고했다. 이렇게 무자비한 공격으로 한국 민중과 국토를 죽이고 파괴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그리 고 나서 일주일 후 1945년 9월9일 04시30분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일본 국기가 빨리 내리고 미국 국기로 바꿔 엄숙히 게양 되었다고 매일신문 1945년9월11일자로 기사가 나갔었다. 이 것으로 사대의 주인님이 바꿔졌다. 인수인계가 잘된 폭이다.
1945년 9월8일 하지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공군의 엄호아래 완전무장을 하고 마치 적진에 상륙하듯 무시무시하게 인천에 상륙했으며 미리 일본 군경을 동원, 한국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자기들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금지 당했다. 36년간 우리를 매우 못살게 억압했던 일본인들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마치 동지를 대하는 것과 같은 극히 우호적 이였다고 한다.
이 주인의 충견(忠犬)은 미국인 기독교 장로인 승만 리‘를 앞세우면서 미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미군정은 치안위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기구를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군정 정책의 결과 경찰 간부의 8활은 과거 일제의 주구 똘마니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으며 특히 그 중에는 북한으로부터 쫓겨 내려온 민족에 대 죄인들 지주 및 친일파 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하였다.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증거도 없이 경찰의 편파적인 생각에 따라 체포되었다. 어떤 경찰관은 저놈은 맘에 안 드니 데려다가 두들겨 패고 감옥에 처넣자고 말했다.(당시 경찰 간부를 지낸 바 있는 최능진의 증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43-61쪽.
그러니까 미군정은 대부분 친일 경력이 뚜렷한 인사들을 각종 고문과 군정관리 자격으로 채용함으로써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거역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후에도 시종일관 이들 친일파를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아 나갔다. 바야흐로 미군정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일제시대라는 지나온 깊은 터널 속으로 다시 밀어 넣고 말았다.
말하자면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서울에 진주하자 구 총독 관리인 일인들을 행정고문이라는 명칭으로 그냥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고 특히 당시 민중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던 총독시대의 한국인 경찰 관리들은 그대로 유임하며 군인(군인에게는 민주주의 없다.)인 하지는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라고 자처하면서 미군정은 민중의 여론을 전혀 돌보지 않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이중에는 고등경찰로서 민족운동자들을 검거, 고문, 학살한 반역자들도 우굴 우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일본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할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즉 친일파들이 대지(大地)구락부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승만 리‘의 지지를 받아 친일파숙청을 주장하는 자는 무조건, 무자비하게 빨갱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한 예로 당시 이종형 자신이 경영하던 대한일보에 소급 법을 만들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을 즐겁게 하는 처사라고까지 했다.
1948년8월5일부터 시작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실천을 민족의 반역자 승만 리은 김구, 김성수 및 한민 당이 자기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하여 민족이 아니고 자기 식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 친일 매국노들을 포용, 등용하였고 처벌하자는 반 민법을 앞장서 국회에서 통과된 법을 자기 정치의 힘으로 적극 반대를 했다.
즉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반민특위 간부들인 법조인 및 애국 정치인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게, 테러하게, 암살 음모 하게끔 부추겼다. 결국 반민특위에 대한 습격 6.6사건이 발생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민족의 새로운 기틀을 튼튼히 바로 잡으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잡혀 들어가는 기막힌 사건들이 매일 발생하게 되었다. 04.30일-05.21일
1945년 9월부터 12월까지 - 이 시기 미군정은 각 지방의 자치기구인 인민위원들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우파. 민족주의자 일부와 일제 때의 관헌 등을 군정 지방기관에 등용한 후 전 국민의 열망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무렵 왜놈 앞 잽이 하던 놈들을 앉혀놓고 인민위원회를 해체하라고 하니 어느 누가 고분고분 듣겠소.
이때 빨갱이로 몰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말하자면 대일전이 승리하는 날 남한의 일본경찰은 2만 명 그중 8천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미군의 보호아래 명령 하에 한국인 애국자들을 무자비하게 무지막지하게 살해하고 다녔다.
1946.1.15일 - 미 연합군 총사령관은 남한주재 미군정으로부터 특정 인물의 입국 요청을 받았을 때 일본인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한다는 취지를 발표했다.
1946.3.5일 - 처칠이 트루만의 동의를 얻어 미주리주 홀튼시에서 연설을 하면서 세계적인 냉전을 선언했다. 여기서부터 남한 군대가 미군정에 완전 예속되는 것이 정식으로 출현 된다.
1946.6월 - 미 국무장관 마샬은 한국에서 소련 비협조적인 태도 비난.
1946.9.24일 - 미군정에 의해서 강요되는 온갖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으로 필연적 민중항쟁은 총파업투쟁으로 가 1946년 이 한 해만도 170건 파업에 총 5만7,000여 명의 노동자 참가 각계각층 민중들이었다.
1946.10월 - 3백만이 넘는 인원이 참가 항쟁을 했다. 대구 폭동 등등. 10월1일-9월24일까지 대구 400여개 공장의 노동자들은 학생 및 일반 시민 약 1만여 명은 미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로 외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1946.10.7일 - 도처에서 야만적인 민중학살이 다반사로 자행될 때. 마산에서는 미군과 경찰과 시위중인 애국시민 6,000여명을 향해 무차별 사격에 선지피가 강을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1,500명 학살사망. 2만6.000여명 중상. 1만5,00여명 체포 연행.
1946년10월부터 양키들은 통역관을 앞세워 시골 집집마다 다니며 삭 삭이 뒤지며 강제로 쌀을 막무가내로 공출을 해갔다. 이 것으로 우린 쌀이 없어 굶어 죽어야만 했고 미 양키들은 이 쌀을 오키나와로 빼서 군사기지 건설사업에 썼고 우린 날자 지난 미국제 밀가루 몇 포대로 살아야 했다. 이 것이 밀가루 원조다. 또 이 밀가루 USA 마크 달린 포대로 당수도(공수도) 도복을 만들어 입어야 했다.
1946.중순 - 전주 민주 청년단체 계획된 당국허가아래 평화적으로 행진.
1946.12.31일 - 전라도 화순 탄광 노동자 파업 돌입 5,000여 명. 이중 3,000여명 광주로 도보 행진.
이 지음 일본에서는 -(역사의 증언에 기타 표현)
1946년12월24일 - 조선인 생활보장위원회는 동포의 모든 권리 옹호를 위한 궁성 앞에서 열고 대표 10여명 검거 폭도로 죄명을 씨워군률 재판에 송치 추방.
1947년1월 전쟁 후 도적이 성행하여 골머리를 앓던 일본 방범주간에 그것을 알리는 포스터에다 태극기를 머리에 붙인 도적놈을 그러놓고 도적놈은 모두 조선인이니 잡아 죽이라고 떠들어 댔다.
왜놈들은 미군사령부를 등에 업고 동포들이 세운 학교들을 폐쇄시키려고 획책했다. 이에 동포들은 이러한 조치를 철회하기위해 일본 전역에 시위운동을 했다.
1947년9월11일 - 북해도 북견에서 일본인 80명이 동포40명을 집단 구타 2명 죽고 5명의 변사자가 생기는 불상사 등등.
미군이 남한 땅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8일이였다. 8.15일 해방이 반대로 읽어보면 방해로 된 날로부터 약3주 후다. 그때 미군 선발대가 비밀리에 도착하여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되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보하였다. 15일부터 3일 동안 휘날리던 태극기가 다시 8월18일 오후에 일장기로 바꿨다.
그러기 전 태평양 방면 미육군총사령관 맥아더는 1945년 9월2일 포고령 제1, 2, 3호를 발표했다. 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침략)한다.
제1호 38도 이남의 모든 행정권이 당분간 맥아더 사령부의 군정 하에 시행된다. 조선 인민공화국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제하 행정기관 직원의 계속근무와 미군정에 대한 절대복종을 명령한다.
제2호 군정하의 한국인은 군정청에 소속되는 법정에 의해 재판받게 된다.
제3호 군정하의 법화는 조선은행권과 미군 표(MPC)임을 규정한다.
45년9월9일 포고령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 하에서 시행한다. 등등 6조까지 날렸다.
특히 미 상륙군에 항의를 하면 “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될 것”이라고까지 경고했다. 이렇게 무자비한 공격으로 한국 민중과 국토를 죽이고 파괴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그리 고 나서 일주일 후 1945년 9월9일 04시30분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일본 국기가 빨리 내리고 미국 국기로 바꿔 엄숙히 게양 되었다고 매일신문 1945년9월11일자로 기사가 나갔었다. 이 것으로 사대의 주인님이 바꿔졌다. 인수인계가 잘된 폭이다.
1945년 9월8일 하지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공군의 엄호아래 완전무장을 하고 마치 적진에 상륙하듯 무시무시하게 인천에 상륙했으며 미리 일본 군경을 동원, 한국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자기들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금지 당했다. 36년간 우리를 매우 못살게 억압했던 일본인들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마치 동지를 대하는 것과 같은 극히 우호적 이였다고 한다.
이 주인의 충견(忠犬)은 미국인 기독교 장로인 승만 리‘를 앞세우면서 미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미군정은 치안위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기구를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군정 정책의 결과 경찰 간부의 8활은 과거 일제의 주구 똘마니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으며 특히 그 중에는 북한으로부터 쫓겨 내려온 민족에 대 죄인들 지주 및 친일파 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하였다.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증거도 없이 경찰의 편파적인 생각에 따라 체포되었다. 어떤 경찰관은 저놈은 맘에 안 드니 데려다가 두들겨 패고 감옥에 처넣자고 말했다.(당시 경찰 간부를 지낸 바 있는 최능진의 증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43-61쪽.
그러니까 미군정은 대부분 친일 경력이 뚜렷한 인사들을 각종 고문과 군정관리 자격으로 채용함으로써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거역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후에도 시종일관 이들 친일파를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아 나갔다. 바야흐로 미군정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일제시대라는 지나온 깊은 터널 속으로 다시 밀어 넣고 말았다.
말하자면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서울에 진주하자 구 총독 관리인 일인들을 행정고문이라는 명칭으로 그냥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고 특히 당시 민중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던 총독시대의 한국인 경찰 관리들은 그대로 유임하며 군인(군인에게는 민주주의 없다.)인 하지는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라고 자처하면서 미군정은 민중의 여론을 전혀 돌보지 않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이중에는 고등경찰로서 민족운동자들을 검거, 고문, 학살한 반역자들도 우굴 우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일본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할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즉 친일파들이 대지(大地)구락부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승만 리‘의 지지를 받아 친일파숙청을 주장하는 자는 무조건, 무자비하게 빨갱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한 예로 당시 이종형 자신이 경영하던 대한일보에 소급 법을 만들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을 즐겁게 하는 처사라고까지 했다.
1948년8월5일부터 시작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실천을 민족의 반역자 승만 리은 김구, 김성수 및 한민 당이 자기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하여 민족이 아니고 자기 식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 친일 매국노들을 포용, 등용하였고 처벌하자는 반 민법을 앞장서 국회에서 통과된 법을 자기 정치의 힘으로 적극 반대를 했다.
즉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반민특위 간부들인 법조인 및 애국 정치인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게, 테러하게, 암살 음모 하게끔 부추겼다. 결국 반민특위에 대한 습격 6.6사건이 발생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민족의 새로운 기틀을 튼튼히 바로 잡으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잡혀 들어가는 기막힌 사건들이 매일 발생하게 되었다. 04.30일-05.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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