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예계에서의 임동규 선생의 위상
한국 무예계에서의 임동규 선생의 위상
서울대학교 라영일 박사는 도올 김용옥의 [태권도 철학의 구성 원리] 라는 저서에 대한 임동규 선
생의 비판을 통해서 한국 무예계의 철학적 기반이 확립된 것이라고 평가 하였다.
가위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보다도 차원 높은 한국 무예계에 대한 기여라고 보지 않을수 없다.
더욱이나 도올 김용옥 마저 임동규 선생에 완전 승복 하였다.
이처럼 한국 무예계의 이론가로서의 남다른 위상에 문파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소이
가 된다 할것이다.
사실 무예계의 어떤 고수들도 각문파의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경당에 들어가 임동규 선생에게 배우
게 되는것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것이다.
지난해(2003)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지금까지 무예도보통지 관련 연구현황을 소개하면서 단계적으로
김위원 선생의 국역 무예도보통지. 심우성 선생 해제의 무예도보통지. 임동규 선생의 완역 실연 무
예도보통지의 사례를 들면서 임동규 선생에 이르러서 사진판으로 동작의 진행과정을 제시함으로서
누구나 알기 쉽게 번역된 것으로 소개하여 명실상부하게 가장 진전된 연구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도 같이 구전(口傳) 심전(心傳)이 없는 무예도보통지 소재 24반 무예는 어디까지나
복원이기 때문에 완전하다고는 할수 없다.
앞으로도 이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것임 말할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15년이상 보급 되면서 대중적으로 검증 되기도 하고 각기 날카로운 안목의 지적들
이 수용되는 과정, 그리고 영문으로의 번역 과정에 이르기 까지 전반적 재검토 등이 반복되는 과정
에서 적어도 이제는 상승무공 으로서의 기반정립을 자부하기에 이르렀다고 선생님은 자평하고
계신다.
무예를 비롯 모든 가르침, 전수 작업은 어차피 형식의 전수 일 뿐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부단한 연마과정에서 진수는 각자가 터득하기 마련이라는 가르침을 수없이 들어
왔지 않는가?
현행의 기법들은 사실상 경당 본당 초기에 사범들이 뭉쳐서 협의에 의해서 정해진 약속이며 보다
좋은 기법의 발견이나 새로운 해석은 각자 연구 하였다가 발표 하기로 한것이다.
따라서 기법의 해석이 달라서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거나 순수 무예를 하겠다는 논리는 분열하기 위
한 트집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대표 선출의 경선에 까지 참여해놓고 경선 불복이라는 오명을 벗을 길이 없다.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과정에 대해 다만 본국검의 경우, 맹호은림세에서 안자세로의 연결과정 조천
세에서 좌협수두세로의 연결과정은 오랜 논의 과정에서 초보자를 위한 기초기법을 익히게 하기 위
해서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본골격은 통지가 제시한 방향대로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 좌요격세에서 우요격세로의 연결과정에서의 왼쪽 목을 씻는다 (洗左項) 또는 오른쪽 목을 씻
는다는 (洗右項) 말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것이냐?
당시로서는 왼쪽 허리힘으로 상대의 왼쪽 몸을 씻어버리고 다시 오른쪽 허리 힘으로 상대의 오른목
을 씻어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 하도록 하여 90년대 신화를 창조한 좌우요격세가 사실상 고안(?) 된
셈이다.
그러나 총도를 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금계독립 - 왼 다리 들고 - 왼 다리 놓고 오른다리 나아가면서 칼을 자신의 왼쪽 목을 씻드시 휘감
아 - 오른쪽 다리들고 - 오른다리 놓고 왼다리 나아가면서 오른쪽 목을 씻드시 휘감아 뒤를 한번
찌르는 (後一刺)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진행 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수행해오고 있는 본국검법은 초보자를 위한 약속하의 기법이고 이것을 토대로
보다 완성된 복원으로 나아갈수 있는것이다.
예도 24세의 경우도 보다 정밀한 분석과 관찰로 일부수정이 불가피한 곳이 있어서 비디오를 통한
교안 작성에 임하고 있으며 보다 완성된 세계화된 상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영문 자막을 삽입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은망세의 해석에서 수정이 불가피했음을 알리지 않을수 없다.
어찌 됬던 무예도보통지의 해석상의 의견 새로운 기법의 발굴은 얼마던지 수렴되고 있고 권장 되기
까지 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개방된 자세 무제한의 자유토론이 민족도장 경당의 강점이었다.
이와 같은 강점은 민족 도장 경당이라는 이념과 결합하여 경당의 실체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저버린 집단은 도당일 뿐이며, 잔재주(未技) 일 뿐이다.
오늘날 미군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있지만 한낱 전투 기술자 집단으로 무도한 횡포
를 부리고 있는 것은 이념이 없기 때문인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변혁운
동 진영에서의 임동규 선생의 위상
가만히 앉아서 세계를 조직해 나간다 는신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동규 선생은 변혁 운동에 평생
을 몸담아 오셨다.
그런데 그러한 변혁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감시 감독의 대상으로 사실상 전국 단위로서도 요
시찰 제1호 인 것이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내용이야 어찌됬던 남민전 무력부장이라는 직함. 쌍무기수. 미전향 출소
1호등 여러가지 조건들 때문일 것이다.
공안 기관의 입장에서는 24반무예 경당 동아리들이 대학가를 휩쓸고 민민 운동 진영에 신선한 충격
을 주고 있을때 자신들은 돈과 권력을 갖고 서도 엄두도 못낼일들을 그처럼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한수를 더 뛰어 넘어 세계를 조직해 나가는데 가만 둘수 없다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공안기관도 일정 부분은 엄중 감시를 강화하되 민간 부분에서의 활동은 제한 할수 없
다고 판단 하였을 것이다.
임동규 선생은 전통 무예 분야에서 신지식인으로 맨 처음 지정 되셨고, 민족도장 경당 본당 일대가
민속 마을과 함께 완결된 민속 무예 도장이라는 관광 벨트로 지정하여 국고보조 216억이 확보 되었
다. 앞으로 5년간 단계적으로 서남해안 제일의 관광 거점도시로 건설 되어 갈 마스터 플랜이 확정
된것이다.
마스터 프랜에 의하면 저수지위 용진산 계곡 25,000 평 지역에 궁궁장 승 마장, 기수련장 등이 들
어
서서 이른바 기의 장(氣의 場)으로 건설될 예정이며 세계 무예의 순례지로서의 위상의 정립이 임동
규 선생의 세계화 작업과 맞물리면서 진행될 전망이다.
그를 위한 정지 작업으로서 육태안 선생과의 결합을 통한 민족 도장 경당 제2창립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무예계의 두 태두 (泰斗) 들께서 연출하실 감동의 스토리들을 기대해 봄직 할 것이다.
공안 논리로 이제는 임동규 선생을 견제 탄압의 대상에서 지원 협조의 대상으로 전환 한것을 알아
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임동규 선생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의혹의 눈은 오히려 경당 내부에만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당인이 국회의원이 되고 경당을 이해하는 많은 민주적 인사들이 국회 다수당이 되는 마당
에 법인조직의 재정비, 문화제로의 지정 움직임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녘사회, 북녘사회를 통털어서 통일 운동가로서, 변혁운동가로서, 그리고 빗자
루 도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분도 드물 것이다.
선생은 한때 남측 본부 의장으로의 추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시기상조임을 감안하셔서 고사 하셨
고 민주노동당의 고위당직 역시 고사를 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모든 민민 운동 진영에서 백의 종군 하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에서 이시대의 큰 스승의 면
모를 엿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운동에 종사 하는것이 마치 범죄행위나 되는것처럼 착각하는 시대착오적 사
고방식에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분노하지 않을수 없다.
수도인 (修道人) 생활무예 (生活武藝) 의 체현자 (體現者)로써 임동규 선생
임동규 선생은 새벽 5시에 정확히 일어 나셔서 기공, 단공, 무공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목욕하고
나서 활터에 걸어 나가신다.
활터까지 왕복하면 1시간 반가량 소요 되는데 대략 1만보를 직접 걷는 셈이다.
걸으면서 어떤 구상들을 하게 되는데 무엇이던지 실행에 옮기기 전에 그 과정에서 부터 결과에 대
한 면밀한 분석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상은 구체적인 노동 과정에서 심화 되기도 한다.
임동규 선생은 한때 목검을 직접 제작하는 고된 노동 작업을 통해서 체력 단련을 하시기도 하였고
그것이 또한 생업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스폰서가 나서지 않는 조건에서 불가피한 선택 이었고, 또한 떳떳하고 당당한 생활 모습이기도 하
였다.
지금은 수천평에 이르는 잔디 수련장을 낫 하나로 가꾸어 나가는 셈이다.
임동규 선생의 초인적인 베기 능력은 이와 같은 일상적인 노동과정에서 오는 것이다.
예초기가 일반화된 조건에서 궂이 낫 하나로 잡초 제거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생활 무
예인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늬 사람은 예초기를 단 30분만 작동하여도 전신이 덜덜 떨릴 정도의 진통을 겪으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은 설사 예초기를 작동 하시더라도 7~8 시간을 계속하는 초인적 저력 보인다.
"생활과 무예의 결합 그것은 엄청난 단련이다."
고 말씀 하시는데서 상승무공의 경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즉 힘을 쓰면 쓸수록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그런 경지 말이다.
무예 수련에서의 경당 본당
현재 경당인의 무예 고수들은 본당 출신 들이다.
적어도 초기에는 본당 생활을 1개월 이상하여야만 심사자격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본당 생활의 그 무엇이 무예 고수의 기본 조건으로 되는가?
우리는 본당 생활을 하여 보아야 만이 옛 선인들이 반드시 입산 수도를 하게 된 연유를 알게 된다.
본당이 위치한 용진산은 광주의 진북에 위치한 2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해발 350여 미터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지만 명산이 갖추고 있을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천혜의 자연 무예 도장이다.
잘 지어진 정자며 잘 닦어진 활터.
장승, 솟대와 어우러진 잔듸 수련장은 우리 문화의 원형을 실현하여 놓은 무예 성지로서 손색이
없다.
60 여명의 미국인 한국 무예 문화 체험 순례단도,노르웨이 수련단도 감동과 감탄을 연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길산의 촬영팀이 임동규 선생을 찾아 뵙고 무예 지도를 요청할때 둘러 보고 일부 촬영지로 활용
할 것을 제안할 정도 였다.
매트리스 위에서 수련하는 무예와 자연적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수련하는 무예 어떤것이 바람직하겠
는가?
"무예를 수련한다는 것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하시는 선생의 말씀을 음미
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 진화! 그것이 최적의 인류진화는 아닌것이다! 문명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소중한 본능적 감각
능력, 자연적응력을 상실 했다." 하신 말씀 또한 의표를 찌른다.
선생은 하루에 한순씩 습사를 하신다.
"과녘은 몸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절대로 맞지 않는것." 그리고 맞지 않아도 남의 탓을 하지 않
는것이 군자의 행동 양식이라고 공자의 말씀을 인용 하신다.
원칙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늘 곧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21 세기 마지막 선비
의 모습을 보는듯도 하고, 한번 단안을 내리면 결사적으로 추진하는 그 모습에서 우리 시대의 참된
무예 인상을 보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조직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제일차적으로 도덕적 기반이 확실해야 한다.
오비이락으로 임동규 선생은 가장 큰시련을 겪는중에 조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조직분규를
겪으신 것이고 그나마 팔공산 모임에 이르기 까지 경선에 참여까지 해놓고 경선 불복 하면서
적반하장을 하는 집단에서 무엇을 기대 한단 말인가.
***** 다음은 ITA가 임동규 선생에게 드린 감사폐이다. *****
MAY2004
INTERNATIONAL TAEKWONDO ALLIANCE
HWARANG KOREA TOUR
In Appreciation to
GRANDMASTER LIM, DONGKYU
Your contribution toKorean Martial Arts provides
a foundation message heritage and traditional philosophy
wevalue greatly.We thank you for your inspirational lessdn
that will serve as an artistic cdmpass for us as we continue
our jorney. Wevalue you as a great teacher, leader and artist.
It has been an hondr to be in your presence and learn from you.
서울대학교 라영일 박사는 도올 김용옥의 [태권도 철학의 구성 원리] 라는 저서에 대한 임동규 선
생의 비판을 통해서 한국 무예계의 철학적 기반이 확립된 것이라고 평가 하였다.
가위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보다도 차원 높은 한국 무예계에 대한 기여라고 보지 않을수 없다.
더욱이나 도올 김용옥 마저 임동규 선생에 완전 승복 하였다.
이처럼 한국 무예계의 이론가로서의 남다른 위상에 문파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소이
가 된다 할것이다.
사실 무예계의 어떤 고수들도 각문파의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경당에 들어가 임동규 선생에게 배우
게 되는것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것이다.
지난해(2003)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지금까지 무예도보통지 관련 연구현황을 소개하면서 단계적으로
김위원 선생의 국역 무예도보통지. 심우성 선생 해제의 무예도보통지. 임동규 선생의 완역 실연 무
예도보통지의 사례를 들면서 임동규 선생에 이르러서 사진판으로 동작의 진행과정을 제시함으로서
누구나 알기 쉽게 번역된 것으로 소개하여 명실상부하게 가장 진전된 연구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도 같이 구전(口傳) 심전(心傳)이 없는 무예도보통지 소재 24반 무예는 어디까지나
복원이기 때문에 완전하다고는 할수 없다.
앞으로도 이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것임 말할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15년이상 보급 되면서 대중적으로 검증 되기도 하고 각기 날카로운 안목의 지적들
이 수용되는 과정, 그리고 영문으로의 번역 과정에 이르기 까지 전반적 재검토 등이 반복되는 과정
에서 적어도 이제는 상승무공 으로서의 기반정립을 자부하기에 이르렀다고 선생님은 자평하고
계신다.
무예를 비롯 모든 가르침, 전수 작업은 어차피 형식의 전수 일 뿐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부단한 연마과정에서 진수는 각자가 터득하기 마련이라는 가르침을 수없이 들어
왔지 않는가?
현행의 기법들은 사실상 경당 본당 초기에 사범들이 뭉쳐서 협의에 의해서 정해진 약속이며 보다
좋은 기법의 발견이나 새로운 해석은 각자 연구 하였다가 발표 하기로 한것이다.
따라서 기법의 해석이 달라서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거나 순수 무예를 하겠다는 논리는 분열하기 위
한 트집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대표 선출의 경선에 까지 참여해놓고 경선 불복이라는 오명을 벗을 길이 없다.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과정에 대해 다만 본국검의 경우, 맹호은림세에서 안자세로의 연결과정 조천
세에서 좌협수두세로의 연결과정은 오랜 논의 과정에서 초보자를 위한 기초기법을 익히게 하기 위
해서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본골격은 통지가 제시한 방향대로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 좌요격세에서 우요격세로의 연결과정에서의 왼쪽 목을 씻는다 (洗左項) 또는 오른쪽 목을 씻
는다는 (洗右項) 말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것이냐?
당시로서는 왼쪽 허리힘으로 상대의 왼쪽 몸을 씻어버리고 다시 오른쪽 허리 힘으로 상대의 오른목
을 씻어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 하도록 하여 90년대 신화를 창조한 좌우요격세가 사실상 고안(?) 된
셈이다.
그러나 총도를 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금계독립 - 왼 다리 들고 - 왼 다리 놓고 오른다리 나아가면서 칼을 자신의 왼쪽 목을 씻드시 휘감
아 - 오른쪽 다리들고 - 오른다리 놓고 왼다리 나아가면서 오른쪽 목을 씻드시 휘감아 뒤를 한번
찌르는 (後一刺)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진행 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수행해오고 있는 본국검법은 초보자를 위한 약속하의 기법이고 이것을 토대로
보다 완성된 복원으로 나아갈수 있는것이다.
예도 24세의 경우도 보다 정밀한 분석과 관찰로 일부수정이 불가피한 곳이 있어서 비디오를 통한
교안 작성에 임하고 있으며 보다 완성된 세계화된 상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영문 자막을 삽입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은망세의 해석에서 수정이 불가피했음을 알리지 않을수 없다.
어찌 됬던 무예도보통지의 해석상의 의견 새로운 기법의 발굴은 얼마던지 수렴되고 있고 권장 되기
까지 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개방된 자세 무제한의 자유토론이 민족도장 경당의 강점이었다.
이와 같은 강점은 민족 도장 경당이라는 이념과 결합하여 경당의 실체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저버린 집단은 도당일 뿐이며, 잔재주(未技) 일 뿐이다.
오늘날 미군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있지만 한낱 전투 기술자 집단으로 무도한 횡포
를 부리고 있는 것은 이념이 없기 때문인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변혁운
동 진영에서의 임동규 선생의 위상
가만히 앉아서 세계를 조직해 나간다 는신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동규 선생은 변혁 운동에 평생
을 몸담아 오셨다.
그런데 그러한 변혁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감시 감독의 대상으로 사실상 전국 단위로서도 요
시찰 제1호 인 것이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내용이야 어찌됬던 남민전 무력부장이라는 직함. 쌍무기수. 미전향 출소
1호등 여러가지 조건들 때문일 것이다.
공안 기관의 입장에서는 24반무예 경당 동아리들이 대학가를 휩쓸고 민민 운동 진영에 신선한 충격
을 주고 있을때 자신들은 돈과 권력을 갖고 서도 엄두도 못낼일들을 그처럼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한수를 더 뛰어 넘어 세계를 조직해 나가는데 가만 둘수 없다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공안기관도 일정 부분은 엄중 감시를 강화하되 민간 부분에서의 활동은 제한 할수 없
다고 판단 하였을 것이다.
임동규 선생은 전통 무예 분야에서 신지식인으로 맨 처음 지정 되셨고, 민족도장 경당 본당 일대가
민속 마을과 함께 완결된 민속 무예 도장이라는 관광 벨트로 지정하여 국고보조 216억이 확보 되었
다. 앞으로 5년간 단계적으로 서남해안 제일의 관광 거점도시로 건설 되어 갈 마스터 플랜이 확정
된것이다.
마스터 프랜에 의하면 저수지위 용진산 계곡 25,000 평 지역에 궁궁장 승 마장, 기수련장 등이 들
어
서서 이른바 기의 장(氣의 場)으로 건설될 예정이며 세계 무예의 순례지로서의 위상의 정립이 임동
규 선생의 세계화 작업과 맞물리면서 진행될 전망이다.
그를 위한 정지 작업으로서 육태안 선생과의 결합을 통한 민족 도장 경당 제2창립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무예계의 두 태두 (泰斗) 들께서 연출하실 감동의 스토리들을 기대해 봄직 할 것이다.
공안 논리로 이제는 임동규 선생을 견제 탄압의 대상에서 지원 협조의 대상으로 전환 한것을 알아
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임동규 선생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의혹의 눈은 오히려 경당 내부에만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당인이 국회의원이 되고 경당을 이해하는 많은 민주적 인사들이 국회 다수당이 되는 마당
에 법인조직의 재정비, 문화제로의 지정 움직임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녘사회, 북녘사회를 통털어서 통일 운동가로서, 변혁운동가로서, 그리고 빗자
루 도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분도 드물 것이다.
선생은 한때 남측 본부 의장으로의 추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시기상조임을 감안하셔서 고사 하셨
고 민주노동당의 고위당직 역시 고사를 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모든 민민 운동 진영에서 백의 종군 하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에서 이시대의 큰 스승의 면
모를 엿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운동에 종사 하는것이 마치 범죄행위나 되는것처럼 착각하는 시대착오적 사
고방식에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분노하지 않을수 없다.
수도인 (修道人) 생활무예 (生活武藝) 의 체현자 (體現者)로써 임동규 선생
임동규 선생은 새벽 5시에 정확히 일어 나셔서 기공, 단공, 무공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목욕하고
나서 활터에 걸어 나가신다.
활터까지 왕복하면 1시간 반가량 소요 되는데 대략 1만보를 직접 걷는 셈이다.
걸으면서 어떤 구상들을 하게 되는데 무엇이던지 실행에 옮기기 전에 그 과정에서 부터 결과에 대
한 면밀한 분석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상은 구체적인 노동 과정에서 심화 되기도 한다.
임동규 선생은 한때 목검을 직접 제작하는 고된 노동 작업을 통해서 체력 단련을 하시기도 하였고
그것이 또한 생업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스폰서가 나서지 않는 조건에서 불가피한 선택 이었고, 또한 떳떳하고 당당한 생활 모습이기도 하
였다.
지금은 수천평에 이르는 잔디 수련장을 낫 하나로 가꾸어 나가는 셈이다.
임동규 선생의 초인적인 베기 능력은 이와 같은 일상적인 노동과정에서 오는 것이다.
예초기가 일반화된 조건에서 궂이 낫 하나로 잡초 제거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생활 무
예인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늬 사람은 예초기를 단 30분만 작동하여도 전신이 덜덜 떨릴 정도의 진통을 겪으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은 설사 예초기를 작동 하시더라도 7~8 시간을 계속하는 초인적 저력 보인다.
"생활과 무예의 결합 그것은 엄청난 단련이다."
고 말씀 하시는데서 상승무공의 경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즉 힘을 쓰면 쓸수록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그런 경지 말이다.
무예 수련에서의 경당 본당
현재 경당인의 무예 고수들은 본당 출신 들이다.
적어도 초기에는 본당 생활을 1개월 이상하여야만 심사자격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본당 생활의 그 무엇이 무예 고수의 기본 조건으로 되는가?
우리는 본당 생활을 하여 보아야 만이 옛 선인들이 반드시 입산 수도를 하게 된 연유를 알게 된다.
본당이 위치한 용진산은 광주의 진북에 위치한 2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해발 350여 미터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지만 명산이 갖추고 있을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천혜의 자연 무예 도장이다.
잘 지어진 정자며 잘 닦어진 활터.
장승, 솟대와 어우러진 잔듸 수련장은 우리 문화의 원형을 실현하여 놓은 무예 성지로서 손색이
없다.
60 여명의 미국인 한국 무예 문화 체험 순례단도,노르웨이 수련단도 감동과 감탄을 연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길산의 촬영팀이 임동규 선생을 찾아 뵙고 무예 지도를 요청할때 둘러 보고 일부 촬영지로 활용
할 것을 제안할 정도 였다.
매트리스 위에서 수련하는 무예와 자연적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수련하는 무예 어떤것이 바람직하겠
는가?
"무예를 수련한다는 것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하시는 선생의 말씀을 음미
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 진화! 그것이 최적의 인류진화는 아닌것이다! 문명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소중한 본능적 감각
능력, 자연적응력을 상실 했다." 하신 말씀 또한 의표를 찌른다.
선생은 하루에 한순씩 습사를 하신다.
"과녘은 몸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절대로 맞지 않는것." 그리고 맞지 않아도 남의 탓을 하지 않
는것이 군자의 행동 양식이라고 공자의 말씀을 인용 하신다.
원칙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늘 곧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21 세기 마지막 선비
의 모습을 보는듯도 하고, 한번 단안을 내리면 결사적으로 추진하는 그 모습에서 우리 시대의 참된
무예 인상을 보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조직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제일차적으로 도덕적 기반이 확실해야 한다.
오비이락으로 임동규 선생은 가장 큰시련을 겪는중에 조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조직분규를
겪으신 것이고 그나마 팔공산 모임에 이르기 까지 경선에 참여까지 해놓고 경선 불복 하면서
적반하장을 하는 집단에서 무엇을 기대 한단 말인가.
***** 다음은 ITA가 임동규 선생에게 드린 감사폐이다. *****
MAY2004
INTERNATIONAL TAEKWONDO ALLIANCE
HWARANG KOREA TOUR
In Appreciation to
GRANDMASTER LIM, DONGKYU
Your contribution toKorean Martial Arts provides
a foundation message heritage and traditional philosophy
wevalue greatly.We thank you for your inspirational lessdn
that will serve as an artistic cdmpass for us as we continue
our jorney. Wevalue you as a great teacher, leader and artist.
It has been an hondr to be in your presence and learn from you.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