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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1919) 3월 1일 정오~~~

이정도는 무술인들도 알고 갑시다. 퍼왔어용 ^^

삼일운동[三一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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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한민족이 일제에 항거하여 일으킨 거족적 독립운동. 그해가 기미년(己未年)이므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배경〕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인의 이권을 빼앗고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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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한민족이 일제에 항거하여 일으킨 거족적 독립운동. 그해가 기미년(己未年)이므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1 배경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인의 이권을 빼앗고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토의 40%를 점유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이민(日本移民)에게 헐값으로 토지를 불하하여, 그 결과 한국의 영세농민은 토지를 잃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일제는 독립운동이나 애국운동을 탄압하고 식민지교육을 강요하는 등 사회적·문화적 활동을 봉쇄하는 무단정치를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혹은 지하로 숨어서 비밀리에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8년 1월 8일 미국의 T.W.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의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호소해 보고자 하였다. 상하이[上海]에 망명중인 애국지사들은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민족자결론에 관한 보도를 보고 회합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여운형(呂運亨)을 소련에 각각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는 한편,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에 보내어 한국인유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김철(金澈)·선우혁(鮮于赫) 등을 국내로 잠입시켜 비밀리에 활동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국내에서도 민족자결주의사상이 차츰 알려지게 되자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에 불을 당긴 것은 일본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 당시 일본의 한인유학생들 사이에는 여러 애국단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1912년 10월 27일 조직된 조선유학생학우회는 항일독립사상이 충일한 단체였다. 이들은 《저팬 애드버타이저》에 재미동포의 활동상황이 보도되자 비밀리에 독립문제를 토의하고, 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일본내각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서춘(徐椿)·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을 선출한 후 비밀회합을 거듭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파견하여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 등과 접촉하게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청하는 동시에 활자와 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오도록 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열렸다. 이 회합에서 한국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대회가 끝날 무렵 도쿄[東京]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장내에 진입, 실행위원 10명이 검거되었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국내에서는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이래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을 때 고종이 급서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래 지하에서 비밀리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의 급서 등이 계기가 되어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한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였다.


2 경과
1918년 말부터 천도교측은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손병희(孫秉熙)등을 주축으로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3대원칙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적으로 할 것 등을 결정하고, 그리스도교·불교·유림 등 각 교단을 총망라하는 동시에 대한제국시대의 유지들을 민족대표로 추대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송진우·최남선 등은 조선 말기의 인사들과 협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하기로 하였다. 이때 최남선은 그리스도교측에서도 독립운동계획이 있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교측의 대표자격인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 교섭하였다. 이승훈은 19년 2월 12일 김성수(金性洙)의 별장에서 송진우·신익희(申翼熙)를 통하여 이같은 계획을 듣고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에 찬성하고, 그리스도교측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측과의 교섭은 최린이 담당하였다. 그는 승려 한용운(韓龍雲)과 독립운동 계획에 관해 협의하고 응낙을 얻어냄으로써 불교측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용운은 해인사 주지 백용성(白龍城)과 협의하여 동참하게 하였다. 한편 같은 해 1월 하순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朴熙道)는 김원벽(金元璧)과 만나 서울 각급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의 주요 인물들과 대관원(大觀園)에서 독립운동에 관하여 토론하고 그들도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추진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 학생 이병주(李秉周)에게 알리고, 다시 회원 40명에게 알려 찬성을 얻었으며, 대관원에 모였던 학생대표들은 각기 자기의 학교와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이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개별적인 독립운동 추진계획이 통합, 단일화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인선이 시작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이종일(李鍾一)·권병덕(權秉悳)·양한묵(梁漢默)·김완규(金完圭)·홍기조(洪基兆)·홍병기(洪秉箕)·나용환(羅龍煥)·박준승(朴準承)·이종훈(李鍾勳) 등 11명과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이 서명, 날인하였고,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이승훈·양전백(梁甸伯)·오화영(吳華英)·박희도·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유여대(劉如大)·이명룡(李明龍)·박동완(朴東完)·정춘수(鄭春洙)·신석구(申錫九)·이갑성(李甲成)·길선주(吉善宙)·신홍식(申洪植) 등 16명이 서명하였고, 이에 불교측의 한용운·백용성이 가담하여 민족대표는 모두 33명으로 결정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여 2만 1000매를 인쇄하였으며, 거사일은 3월 1일로 결정하였다(처음에는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로 정했다가 불경스럽다는 의견이 나왔고, 또 2일은 그리스도교인의 안식일이라 하여 1일로 결정되었다).


3 전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지방에 있던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는 불참)은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다음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미리 건 전화 연락을 받고 태화관으로 달려와 포위해 있던 80여 명의 일본경찰에 의해 의연한 태도로 연행되었다. 그 무렵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희생을 염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청년이 자진하여 등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날 무렵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종로 쪽으로 뛰쳐나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수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행진하였으며, 시위대열이 대한문(大漢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이 만세시위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나갔으나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던 군중은 일본군대와 기마경찰의 무력저지로 인하여 강제해산되고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3월 1일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平壤)·진남포(鎭南浦)·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 등 서울 이북지방에서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2일에는 경기도 개성(開城), 충청남도 예산(禮山) 등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밖에 전라북도는 4일 옥구(沃溝) 시위, 경상북도는 8일 대구(大邱) 시위, 전라남도는 10일 광주(光州) 시위, 강원도는 10일 철원(鐵原) 시위, 함경북도는 10일 성진(城津) 시위, 경상남도는 11일 부산진(釜山鎭) 시위로 각각 번져갔고, 19일에는 괴산(槐山) 시위로 충청북도에 점화됨으로써 전국 13도가 일제히 3·1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21일 제주(濟州)와 조천리(朝天里) 시위로 바다 건너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주체는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천도교·그리스도교·불교·학생측 외에도 각 지방의 만세운동에는 농민이 가담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도시의 상인들은 연합하여 철시를 단행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노동자·승려·관리는 물론 어린이·거지·기생이 주동한 곳도 있었다. 국내에서의 3·1운동의 거센 물결은 국외에도 파급되었다. 서간도(西間島)와 북간도(北間島)를 비롯한 만주(滿洲) 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간도와 훈춘[琿春] 등 둥산성[東三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한국 교포들도 국내의 3·1운동에 호응해서 모두 궐기하였다. 프리모르스키 지역에서도 3월 17일 대한국민회의가 주체가 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으로 추산된다.


4 성격
3·1운동은 한민족이 자주독립을 위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항일민족투쟁으로, 국권의 회복과 개인적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비폭력투쟁이었다. 또한 민족문화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천명하고 그것을 수호하고자 한 민족의식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유린된 민족의 생존권과 주권의 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무력적인 탄압으로 비폭력투쟁이었던 3·1운동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자 그 방향을 실력투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3·1운동 이후 폭력수단에 의한 투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5 의의
3·1운동 결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조계(租界;공관거류지)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는 전국민을 전제로 한 국민정부인 동시에 국제정치에서 한국의 존재를 과시하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비록 해외에서 활약하기는 했으나 이것을 통한 국제적 정치활동은 독립의 모태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3·1운동은 민족운동의 일원화·대중화·비폭력화의 대원칙을 통하여 민중의 정치적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천도교를 주축으로 그리스도교·불교·유교 등 독립운동의 주체가 일원화되었다는 점, 지식층·농민·상공업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는 점 등은 민족의식의 발로를 엿보게 해 주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각된 민족의 끊임없는 대일항쟁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부를 수정하게 하여,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하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적·내면적 충실을 기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즉, 신교육기관의 설립,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언론창달을 위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창간이 실현되어, 민족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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