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금생법(飛禽生法)이란 새가 하늘을 나는 技法이란 뜻이며?
1.비금생법이란 새가 하늘을 나는 技法이란 뜻이며 새가 비상하기 직전에 힘찬 날개 짓으로 비상하는 것처럼 비행기도 이륙직전에 엔진은 최고의 가속을 내어 드디어 飛上 이륙하듯이 비금생법은 기합을 전신에 넣어 수련하다보면 찌릿찌릿한 전류 같은 것을 느끼는데 이런 상태를 氣가 통한 상태라는 것이며 이 후에는 괴력이 흐른다는 것이다.
2.필자의 예를 들면 10대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취미로 비금생법을 연마하던 중 27세 때 갑자기 전신에 찌릿찌릿한 전류 같은 것이 흐르는 것을 체험하였다. 당시 농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광산용 6각 철창을 맨손으로 부러트린 경험도 있으며 보통 일을 하더라도 각종 농기구들이 잘 부러지며 보통권법으로 가격해도 맞은 자는 몇 일씩 아무 일도 못 할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힘을 쓸수록 가속의 힘이 발산되며 손과 발에 어찌 힘이 생겨나는지 미쳐 손과 발이 그 힘을 감당치 못하여 필자는 손과 발의 관절이 치명적으로 파손 된 상태이다.
3.비금생법은 氣를 발산시키는 정신통일부터 시작하여 하기의 기법을 연마하면서 자동적으로 종합무술로 발전해 가는 무술로써 옛 선비들이 글을 읽으면서 함께 하던 무술이며 글을 읽고 비금생법을 하다가 문과에 응시하기도 하고 또는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금생법은 옛 양반들 중 선비들에게서 공부와 함께 특별히 선별적으로 비전(秘傳) 되어진 무술이다.
4.이조 중엽의 명장 임경업 장군은 숨 한번 내쉬는 동안이면 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홉 번을 돌렸다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사람이 하늘로 붕 뜨게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임경업
장군은 敵將을 직접 생포한 戰績을 낳은 명장인지 모른다.
5.임진란에 나라를 구한 聖雄 이순신 장군은 명필이기도 하며 詩人이시며 당시 26세의 중노인이나 다름없는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옛 선비들은 대부분 문무를 겸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197Cm와 25Kg의 巨檢을 쓸 수 있는 괴력의 아주 특수한 장군이 아닐 수 없다.
6.독립군대장 김좌진 장군은 본래 안동 김씨 양반의 가정에서 부유했지만 재산을 팔아 노비에게 나누어주며 신분을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풀어주고 교육사업을 하시던 교육자로써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턱없이 모자라는 독립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부자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 해 줄 것을 요청할 경우 충분히 자금을 기부할 여유 있는 부자인데도 망설이는 부자를 만나면 화로에 인두라는 쇠를 두 손으로 잡고 쭉 잡아당기면 인두라는 쇠자루가 쭉 늘어나고 그 쇠를 엿가락처럼 꼬아버리면 富者는 엄청난 괴력의 힘이 두려워서 독립운동자금을 주기도 한 다는데 그럴 경우 엿가락처럼 꼬았던 인두 자루를 본래 상태로 바르게 펴놓으면서 허! 참! 내 손버릇이 좋지 않아서 하면서 점잔 하게 자리를 떴다는 선친과 조부님께 들은 말씀이 생각난다.
7.옛 장수 김좌점은 14세에 장가들어 용변을 보던 중 호랑이가 덤비니까 그 즉시 호랑이를 추격 하여 자기의 처갓집 담을 넘는 호랑이를 맨 주먹으로 때려잡았다고 한다.
8.중국의 관우 장군도 선비로써 훈장(선생님)을 하다가 갑자기 120근의 청룡년월도를 휘두르며 즉석에서 명장으로 탈바꿈하여 이름을 날린 것을 보면 兩班이란 개념은 중국이나 한국이 동일 한 것 같다. 즉 한 가문에 문관만 있거나 무관만 있게되면 결국 양반이 아니라고 한다. 한 가문에서 文官과 武官이 함께 배출되는 가문이 양반가문이라는 것이다.
9.필자의 조부님은 명의열전에 기록된 당대 명의로써 충남 부여군에서 독립운동에 목적을 둔 당시 젊은이 12명이 중국 봉천으로 가시었다가 11명이 중국 마적단의 기습으로 다 죽고 혼자서 구사일생으로 사셨으나 결국 뜻은 이루지 못하시고 귀국하셔서 스님으로 변장하고 왜경을 피하시다가 당시에 하늘도 보이지 않는 안면도 바닷골 솔밭으로 피신 차 가시었는데 그 곳에서도 침과 약으로 꼽추까지 펴는 기적도 행하셨고 재산이 저절로 생겨 결국 그 곳에서 하직까지 하셨다.
10.선친께서 하시는 말씀은 선친께선 어리고 조부님이 젊으셨을 때 씨족간에 큰 싸움이 있었는데 수 십명이 조부님 한 분을 동시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는데 조부님께선 펄펄 날면서 혼자서 다 격퇴하셨다고 들었다 너희 할아버지가 비호다 누구한데 잡혀 다니는 분이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는데도 잡혀가신 예가 전혀 없어 요시찰 인물일 뿐 옥살이를 않으셨기에 공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필자도 170cm키에 90Kg에 50세의 뚱뚱한 몸인데도 웬만한 사람이 잡으려고 하면 아직은 잡혀보지 않았다. 본 무술은 나르는 새와 같다는 빠른 飛禽生法이기 때문이다.
11.이조 정권 때는 무녀리라 하여 조선의 문관은 무관과 결혼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무관이 문관의 지배를 많이 받던 이조 정권은 결국 군사력이 약해져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들었다. *미국이 第一國家가 되는 것도 결국 武力이 天下第一이기 때문일 것이다.
12.필자의 가정에 가전 된 비금생법을 기타 타 무술에서도 고수가 되면 다 하는 기법인 줄 알고 있었는데 필자가 비금생법을 40년 간을 접하면서 나이 50세에 가까워서야 비금생법은 기타 타 무술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 소림사의 무술시범단에게서도 비금생법을 찾아보았으나 그 이름조차 찾지 못 하였으므로 비금생법은 유일한 韓民族傳統선비武術임을 느끼고 늦게나마 이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서 부족함이 많지만 감히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13.필자가 9-10세 때 조부님께 분명히 들은 말은 지금 우리민족이 입고 있는 흰옷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중국 중원의 양반들이 입던 옷이며 말이다. 중국이 어느 때 인가는 어릴 때 들어서 기억하지 못 하지만 분명히 들은 사실은 중국이 오랑캐에게 점령되어 말을 빼앗겼으므로 중국은 현재 오랑캐 말을 쓰고 있고 韓民族 한국은 본래 중국양반의 말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실제 양반의 도가 한국에는 존재하며 중국은 현재까지 오랑캐의 말을 사용한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후세에 해박한 전통 역사학자가 나타나서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해 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위의 사실을 이 기회를 통하여 소개하는 바입니다.
(1)仁義禮智와 孔孟之道를 볼 때 우리나라 말처럼 상하의 예의가 깍듯하며 구분도 확실하고
東方禮義之國이란 말이 뒷받침하듯 우리말은 孔孟之道와 잘 어울리고 조화되는 말이다.
(2)중국말이 오랑캐 말과 관계가 있은 것은 할애비가 손자에게 니 하며 부르고 손자도 할애비 보고 니 하고 부르는 말에는 영어와 동일하게 칭호간에 높낮이의 구분이 없는 점이 동일하다.
(3)또 한가지는 1994년 중국의 대학교수들이 한국 성균대학교에 와서 공자선생께 제사 드리는
제사법(중국전통예절)을 배워 갔다는 사실을 조선족의 지식인 중국 길림성 길림대학 화학과 신언규 조교수에게 들었는데 지식이 별로 없는 중국인이나 조선족들은 중국 같이 큰 나라가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하지만 성균관대학교에서는 지금까지 공자
선생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4)필자의 본관 수원 白씨 가문에서 祭官20여명이 서기1997년 중국 헌원黃帝의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중국 白씨 가문에 제사법을 전수하고 돌아왔다. 그 이유는 수원백씨는 당대 시인 백낙 천과 白씨 한국시조 백경천 신라 대정승은 사촌간이며 白씨는 중국 헌원황제의 16대 손이며 楚나라 平王의 太子 建께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초나라황제에 오르지 못하고 秦나라로 이주(移住)하여 진(秦)나라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 모두 진(秦)라의 명장이 었으며 그 중 둘째 아들의 이름이 白乙이었으며 백을 장군은 자기의 이름자를 따서 白氏의 최초 시조 가 되었다.
(5)중국 신농(神農)때 헌원은 장군이었는데 중국의 제후들이 신농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헌원께서 제후들을 혼내 주었는데 모든 제후가 다 헌원의 말을 듣고 바로 신농씨께 조공을 드 렸으나 치우라는 장군만 강성하여 끝까지 반발하므로 헌원께서 치우장군과 세 번째 싸워 치우 장군을 참하였고 이 후에 헌원 黃帝가 되었으며 헌원 황제의 아버지는 지금 北京지역을 다스 리는 孔孫王이었으며 공손왕은 모든 백씨의 최고 조상이므로 필자는 지금 동양인의 뿌리에 대 한 자료를 수집중이며 그동안 조상님들이 내려오면서 갈래갈래 갈라놓은 뿌리를 밝혀낼 예정 입니다.
(6)중국이 대국이라 하나 진시황 때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모택동의 75년대의 문화혁명은 중국 인을 무지(無知)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역사와 전통성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7)서울을 중국말로 한성(漢城)이라고 한다. 중국이 漢이라 한다. 한나라의 城라는 뜻을 살펴보 아야 한다. 韓國의 서울을 韓城이라고 하였으면 싶은데 왜? 漢城일까...?...!....?....
(8)韓民族민속학자 권택성(權宅星)씨는 신농(神農)씨는 헌원黃帝의 형님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헌원께서 신농을 도와 목숨걸고 싸워 승리한 것을 보면 심증이 간다.
14.비금생법=백무권(白武拳)은= (1)호보법(虎步法), (2)용보법(龍步法), (3)학보법(鶴步法), (4)매보법(매步法), (5)회전보법(回轉步法)으로 이동하면서 권법에서는 (1)호권법(虎拳法), (2)용권법(龍拳法), (3)학보법(鶴拳法), (4)상비권(象鼻拳), (5)회전권(回轉拳)을 사용하게 되 면 훌륭한 권법(拳法)이 되며 (1)발을 쓰면 각종 족법(足法)이 되고, (2)칼을 쓰면 각종 검법 (劍法)이 되며, (3)槍을 쓰면 창법(槍法)이 되는 치고, 차고, 찌르고, 붙잡고, 넘기고, 꺽기 등 일사천리 自動으로 連結과 연타(連打)로 가속(加速)에+가속이 추가되며 탐색전도 별로 필 요 없이 보법과 권법으로 일방적 밀어 쳐대는 必死的 臨戰無退의 戰爭的인 綜合武術이 된다.
14.飛禽生法은 주먹이 폭발하듯 튀어나가며 무의식전반사동작(無意識的反射動作)이 생기므로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1)39기본동작. (2)61공격법. (3)41방어법. (4)총141기법으로 되어있다. 즉 39본 61공 41방 141기라고 말 할 수 있다.
.. 제 2장 군사조직
통일신라시대 군사조직은 중앙군인 9서당(誓幢)과 지방에 배치된 10정(停)이었다. 그 이외에 삼무당(三武幢)·경오종당(京五種幢)·이절말당(二節末幢)·계금당(喬衿幢) 등이 있었다.
9서당은 통일 이전 진평왕 5년(583)에 조직된 서당이 시초이었다. 서당은 소모병(召募兵)으로서 기존의 군단인 법당 및 6정과 달리 왕권과 밀착된 특수한 성격의 부대이었다. 통일 이후 9서당은 신라민(新羅民) 이외에 백제와 고구려 유민이 추가되어 조직되었다. 또 9서당가운데 흑금서당(黑衿誓幢)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국민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9서당의 군인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백성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다 특히 9서당의 군인수 가운데 2/3는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다. 그 군인은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신라에 의해 9서당에 편입되었는데, 일반 피정복민이 아닌 포로로 사로잡힌 군인들로써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9서당은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부대로 볼 수 있다. 한편 9서당의 군인이 대부분 백제,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신라의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적 태도로 이해되고 있다.
신라의 군사조직에서 지방과 관련된 부대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바 있는 10정(停) 이다. 10정은 통일신라의 9주를 기준으로 하여 각 주에 1정씩 설치한다는 원칙하에 고루 배치되었다. 다만 한산주만 1정이 추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한산주가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할 뿐 만 아니라 국방상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10정은 주의 치소(治所)에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10停과 그 위치 10停의 명칭
위 치
현 위 치
服 色
音 里 火 停
尙州 靑驍縣
尙 州
靑 色
古 良 夫 里 停
熊州 靑正縣
靑 陽
靑 色
居 斯 勿 停
全州 靑雄縣
任 實
靑 色
參 良 火 停
良州 玄驍縣
達 成
黑 色
召 參 停
康州 玄武縣
咸 安
黑 色
未 多 夫 里 停
武州 縣雄縣
羅 州
黑 色
南 川 停
漢州 黃武縣
利 川
黃 色
骨 乃 斤 停
漢州 黃驍縣
驪 州
黃 色
伊 火 兮 停
溟州 綠武縣
靑 松
綠 色
伐 力 川 停
朔州 綠驍縣
洪 川
綠 色
이 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정이 설치된 지역은 통일신라의 군사적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따라서 정은 국방만이 아니라 치안을 위한 군사조직이었다고 여겨진다. 정은 기병이 주가 되었다고 한다. 무주에는 미다부리정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현재 나주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0정 이외의 군사조직으로 5주서(州誓)가 있었다. 5주서는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이며 청주(靑州), 완산주(完山州), 한산주(漢山州), 우수주(牛首州), 하서주(河西州)에 있었다. 이 부대는 무주에 설치되지 않았다. 9주의 치소에 배치된 부대는 비금당(緋衿幢), 사자금당(獅子衿幢), 만보당(萬步幢)이었다.
비금당은 장창(長槍)을 사용하는 보병이었다. 비금당은 다음과 같은 군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표 3).
비금당의 군관조직 주둔지명
군관직명
沙伐州
揷良州
靑州
漢山州
牛首州
河西州
熊川州
完山州
武珍州
官等
幢 主
3
3
3
2
6
6
5
4
8
13-7
監
領 幢
3
3
3
2
6
6
5
4
8
領馬兵
0
0
0
0
0
0
0
0
8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비금당의 군관조직은 지방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지방 사정에 적합한 인원이 배정되었던 것 같다. 이 군관조직에서 독특한 것은 무진주에만 영마병이 8명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는 이 관원이 없다. 영마병(領馬兵)은 기병이지 않을까 한다. 5주서는 무진주에 설치되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비금당의 관원에 기병을 거느린 영마병의 감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한다. 비금당은 무진주에서 기병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무진주의 비금당만이 장창기병과 장창보병으로 편성된 부대이었다고 여겨진다.
9주에 설치된 보병부대로서 만보당(萬步幢)이 있었다. 만보당은 방패와 도끼를 사용하는 2개의 당이 각주에 설치되었다. 사자금당(獅子衿幢)은 주의 치소(治所)에 배치된 법당군단으로서 전투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 부대 그 용감성으로 중국에 사자대(獅子隊)로 알려졌다. 사자금당은 당주 3인- 감 3인- 법당화척 2인의 군관과 지방민 병졸로 조직되었다. 그 이외에 주의 치소에 노당(弩幢)이 있었다.
주에 설치된 지방 군단에는 지방민이 징발되어 군인으로 충원되었다. 즉 각주의 정이나 당에는 그 지방의 주민들이 동원되어 충당되었다. 다시 말하면 무진주에 설치된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비금당, 만보당, 사자금당, 노당의 군인은 무진주내에 있던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군사로 충당되었다.
군현에는 외여갑당(外餘甲幢), 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이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촌락민으로 구성된 군대이었다. 이 부대의 군관은 법당주(法幢主), 법당두상(法幢頭上), 법당벽주(法幢抗主)이었다. 여갑당과 외법당은 6세기 후반 신라의 영토 확장과 군현의 설치로 새로이 법당을 편성한 지역에 편성된 부대이었다. 법당군관직은 지방의 태수와 현령이 겸하였다.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에서 보이는 호를 여자(餘子) 법사(法私)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이 여자·법사는 신라의 법당군단 중에서 여(餘) 또는 법(法)자가 붙는 부대에 징발되는 호라고 한다. 현령이나 소수는 지방민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충열현·강원현·백주현의 경우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신라는 외적의 방어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 또 축조된 성곽도 지방관의 관심 속에서 보수 유지되었을 것이다. 충열현·강원현·백주현에는 백제시대에도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충열현·강원현·백주현에 있던 성곽이 지방지배를 위하여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여겨진다.
2.필자의 예를 들면 10대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취미로 비금생법을 연마하던 중 27세 때 갑자기 전신에 찌릿찌릿한 전류 같은 것이 흐르는 것을 체험하였다. 당시 농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광산용 6각 철창을 맨손으로 부러트린 경험도 있으며 보통 일을 하더라도 각종 농기구들이 잘 부러지며 보통권법으로 가격해도 맞은 자는 몇 일씩 아무 일도 못 할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힘을 쓸수록 가속의 힘이 발산되며 손과 발에 어찌 힘이 생겨나는지 미쳐 손과 발이 그 힘을 감당치 못하여 필자는 손과 발의 관절이 치명적으로 파손 된 상태이다.
3.비금생법은 氣를 발산시키는 정신통일부터 시작하여 하기의 기법을 연마하면서 자동적으로 종합무술로 발전해 가는 무술로써 옛 선비들이 글을 읽으면서 함께 하던 무술이며 글을 읽고 비금생법을 하다가 문과에 응시하기도 하고 또는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금생법은 옛 양반들 중 선비들에게서 공부와 함께 특별히 선별적으로 비전(秘傳) 되어진 무술이다.
4.이조 중엽의 명장 임경업 장군은 숨 한번 내쉬는 동안이면 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홉 번을 돌렸다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사람이 하늘로 붕 뜨게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임경업
장군은 敵將을 직접 생포한 戰績을 낳은 명장인지 모른다.
5.임진란에 나라를 구한 聖雄 이순신 장군은 명필이기도 하며 詩人이시며 당시 26세의 중노인이나 다름없는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옛 선비들은 대부분 문무를 겸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197Cm와 25Kg의 巨檢을 쓸 수 있는 괴력의 아주 특수한 장군이 아닐 수 없다.
6.독립군대장 김좌진 장군은 본래 안동 김씨 양반의 가정에서 부유했지만 재산을 팔아 노비에게 나누어주며 신분을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풀어주고 교육사업을 하시던 교육자로써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턱없이 모자라는 독립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부자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 해 줄 것을 요청할 경우 충분히 자금을 기부할 여유 있는 부자인데도 망설이는 부자를 만나면 화로에 인두라는 쇠를 두 손으로 잡고 쭉 잡아당기면 인두라는 쇠자루가 쭉 늘어나고 그 쇠를 엿가락처럼 꼬아버리면 富者는 엄청난 괴력의 힘이 두려워서 독립운동자금을 주기도 한 다는데 그럴 경우 엿가락처럼 꼬았던 인두 자루를 본래 상태로 바르게 펴놓으면서 허! 참! 내 손버릇이 좋지 않아서 하면서 점잔 하게 자리를 떴다는 선친과 조부님께 들은 말씀이 생각난다.
7.옛 장수 김좌점은 14세에 장가들어 용변을 보던 중 호랑이가 덤비니까 그 즉시 호랑이를 추격 하여 자기의 처갓집 담을 넘는 호랑이를 맨 주먹으로 때려잡았다고 한다.
8.중국의 관우 장군도 선비로써 훈장(선생님)을 하다가 갑자기 120근의 청룡년월도를 휘두르며 즉석에서 명장으로 탈바꿈하여 이름을 날린 것을 보면 兩班이란 개념은 중국이나 한국이 동일 한 것 같다. 즉 한 가문에 문관만 있거나 무관만 있게되면 결국 양반이 아니라고 한다. 한 가문에서 文官과 武官이 함께 배출되는 가문이 양반가문이라는 것이다.
9.필자의 조부님은 명의열전에 기록된 당대 명의로써 충남 부여군에서 독립운동에 목적을 둔 당시 젊은이 12명이 중국 봉천으로 가시었다가 11명이 중국 마적단의 기습으로 다 죽고 혼자서 구사일생으로 사셨으나 결국 뜻은 이루지 못하시고 귀국하셔서 스님으로 변장하고 왜경을 피하시다가 당시에 하늘도 보이지 않는 안면도 바닷골 솔밭으로 피신 차 가시었는데 그 곳에서도 침과 약으로 꼽추까지 펴는 기적도 행하셨고 재산이 저절로 생겨 결국 그 곳에서 하직까지 하셨다.
10.선친께서 하시는 말씀은 선친께선 어리고 조부님이 젊으셨을 때 씨족간에 큰 싸움이 있었는데 수 십명이 조부님 한 분을 동시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는데 조부님께선 펄펄 날면서 혼자서 다 격퇴하셨다고 들었다 너희 할아버지가 비호다 누구한데 잡혀 다니는 분이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는데도 잡혀가신 예가 전혀 없어 요시찰 인물일 뿐 옥살이를 않으셨기에 공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필자도 170cm키에 90Kg에 50세의 뚱뚱한 몸인데도 웬만한 사람이 잡으려고 하면 아직은 잡혀보지 않았다. 본 무술은 나르는 새와 같다는 빠른 飛禽生法이기 때문이다.
11.이조 정권 때는 무녀리라 하여 조선의 문관은 무관과 결혼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무관이 문관의 지배를 많이 받던 이조 정권은 결국 군사력이 약해져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들었다. *미국이 第一國家가 되는 것도 결국 武力이 天下第一이기 때문일 것이다.
12.필자의 가정에 가전 된 비금생법을 기타 타 무술에서도 고수가 되면 다 하는 기법인 줄 알고 있었는데 필자가 비금생법을 40년 간을 접하면서 나이 50세에 가까워서야 비금생법은 기타 타 무술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 소림사의 무술시범단에게서도 비금생법을 찾아보았으나 그 이름조차 찾지 못 하였으므로 비금생법은 유일한 韓民族傳統선비武術임을 느끼고 늦게나마 이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서 부족함이 많지만 감히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13.필자가 9-10세 때 조부님께 분명히 들은 말은 지금 우리민족이 입고 있는 흰옷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중국 중원의 양반들이 입던 옷이며 말이다. 중국이 어느 때 인가는 어릴 때 들어서 기억하지 못 하지만 분명히 들은 사실은 중국이 오랑캐에게 점령되어 말을 빼앗겼으므로 중국은 현재 오랑캐 말을 쓰고 있고 韓民族 한국은 본래 중국양반의 말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실제 양반의 도가 한국에는 존재하며 중국은 현재까지 오랑캐의 말을 사용한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후세에 해박한 전통 역사학자가 나타나서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해 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위의 사실을 이 기회를 통하여 소개하는 바입니다.
(1)仁義禮智와 孔孟之道를 볼 때 우리나라 말처럼 상하의 예의가 깍듯하며 구분도 확실하고
東方禮義之國이란 말이 뒷받침하듯 우리말은 孔孟之道와 잘 어울리고 조화되는 말이다.
(2)중국말이 오랑캐 말과 관계가 있은 것은 할애비가 손자에게 니 하며 부르고 손자도 할애비 보고 니 하고 부르는 말에는 영어와 동일하게 칭호간에 높낮이의 구분이 없는 점이 동일하다.
(3)또 한가지는 1994년 중국의 대학교수들이 한국 성균대학교에 와서 공자선생께 제사 드리는
제사법(중국전통예절)을 배워 갔다는 사실을 조선족의 지식인 중국 길림성 길림대학 화학과 신언규 조교수에게 들었는데 지식이 별로 없는 중국인이나 조선족들은 중국 같이 큰 나라가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하지만 성균관대학교에서는 지금까지 공자
선생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4)필자의 본관 수원 白씨 가문에서 祭官20여명이 서기1997년 중국 헌원黃帝의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중국 白씨 가문에 제사법을 전수하고 돌아왔다. 그 이유는 수원백씨는 당대 시인 백낙 천과 白씨 한국시조 백경천 신라 대정승은 사촌간이며 白씨는 중국 헌원황제의 16대 손이며 楚나라 平王의 太子 建께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초나라황제에 오르지 못하고 秦나라로 이주(移住)하여 진(秦)나라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 모두 진(秦)라의 명장이 었으며 그 중 둘째 아들의 이름이 白乙이었으며 백을 장군은 자기의 이름자를 따서 白氏의 최초 시조 가 되었다.
(5)중국 신농(神農)때 헌원은 장군이었는데 중국의 제후들이 신농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헌원께서 제후들을 혼내 주었는데 모든 제후가 다 헌원의 말을 듣고 바로 신농씨께 조공을 드 렸으나 치우라는 장군만 강성하여 끝까지 반발하므로 헌원께서 치우장군과 세 번째 싸워 치우 장군을 참하였고 이 후에 헌원 黃帝가 되었으며 헌원 황제의 아버지는 지금 北京지역을 다스 리는 孔孫王이었으며 공손왕은 모든 백씨의 최고 조상이므로 필자는 지금 동양인의 뿌리에 대 한 자료를 수집중이며 그동안 조상님들이 내려오면서 갈래갈래 갈라놓은 뿌리를 밝혀낼 예정 입니다.
(6)중국이 대국이라 하나 진시황 때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모택동의 75년대의 문화혁명은 중국 인을 무지(無知)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역사와 전통성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7)서울을 중국말로 한성(漢城)이라고 한다. 중국이 漢이라 한다. 한나라의 城라는 뜻을 살펴보 아야 한다. 韓國의 서울을 韓城이라고 하였으면 싶은데 왜? 漢城일까...?...!....?....
(8)韓民族민속학자 권택성(權宅星)씨는 신농(神農)씨는 헌원黃帝의 형님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헌원께서 신농을 도와 목숨걸고 싸워 승리한 것을 보면 심증이 간다.
14.비금생법=백무권(白武拳)은= (1)호보법(虎步法), (2)용보법(龍步法), (3)학보법(鶴步法), (4)매보법(매步法), (5)회전보법(回轉步法)으로 이동하면서 권법에서는 (1)호권법(虎拳法), (2)용권법(龍拳法), (3)학보법(鶴拳法), (4)상비권(象鼻拳), (5)회전권(回轉拳)을 사용하게 되 면 훌륭한 권법(拳法)이 되며 (1)발을 쓰면 각종 족법(足法)이 되고, (2)칼을 쓰면 각종 검법 (劍法)이 되며, (3)槍을 쓰면 창법(槍法)이 되는 치고, 차고, 찌르고, 붙잡고, 넘기고, 꺽기 등 일사천리 自動으로 連結과 연타(連打)로 가속(加速)에+가속이 추가되며 탐색전도 별로 필 요 없이 보법과 권법으로 일방적 밀어 쳐대는 必死的 臨戰無退의 戰爭的인 綜合武術이 된다.
14.飛禽生法은 주먹이 폭발하듯 튀어나가며 무의식전반사동작(無意識的反射動作)이 생기므로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1)39기본동작. (2)61공격법. (3)41방어법. (4)총141기법으로 되어있다. 즉 39본 61공 41방 141기라고 말 할 수 있다.
.. 제 2장 군사조직
통일신라시대 군사조직은 중앙군인 9서당(誓幢)과 지방에 배치된 10정(停)이었다. 그 이외에 삼무당(三武幢)·경오종당(京五種幢)·이절말당(二節末幢)·계금당(喬衿幢) 등이 있었다.
9서당은 통일 이전 진평왕 5년(583)에 조직된 서당이 시초이었다. 서당은 소모병(召募兵)으로서 기존의 군단인 법당 및 6정과 달리 왕권과 밀착된 특수한 성격의 부대이었다. 통일 이후 9서당은 신라민(新羅民) 이외에 백제와 고구려 유민이 추가되어 조직되었다. 또 9서당가운데 흑금서당(黑衿誓幢)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국민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9서당의 군인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백성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다 특히 9서당의 군인수 가운데 2/3는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다. 그 군인은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신라에 의해 9서당에 편입되었는데, 일반 피정복민이 아닌 포로로 사로잡힌 군인들로써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9서당은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부대로 볼 수 있다. 한편 9서당의 군인이 대부분 백제,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신라의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적 태도로 이해되고 있다.
신라의 군사조직에서 지방과 관련된 부대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바 있는 10정(停) 이다. 10정은 통일신라의 9주를 기준으로 하여 각 주에 1정씩 설치한다는 원칙하에 고루 배치되었다. 다만 한산주만 1정이 추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한산주가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할 뿐 만 아니라 국방상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10정은 주의 치소(治所)에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10停과 그 위치 10停의 명칭
위 치
현 위 치
服 色
音 里 火 停
尙州 靑驍縣
尙 州
靑 色
古 良 夫 里 停
熊州 靑正縣
靑 陽
靑 色
居 斯 勿 停
全州 靑雄縣
任 實
靑 色
參 良 火 停
良州 玄驍縣
達 成
黑 色
召 參 停
康州 玄武縣
咸 安
黑 色
未 多 夫 里 停
武州 縣雄縣
羅 州
黑 色
南 川 停
漢州 黃武縣
利 川
黃 色
骨 乃 斤 停
漢州 黃驍縣
驪 州
黃 色
伊 火 兮 停
溟州 綠武縣
靑 松
綠 色
伐 力 川 停
朔州 綠驍縣
洪 川
綠 色
이 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정이 설치된 지역은 통일신라의 군사적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따라서 정은 국방만이 아니라 치안을 위한 군사조직이었다고 여겨진다. 정은 기병이 주가 되었다고 한다. 무주에는 미다부리정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현재 나주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0정 이외의 군사조직으로 5주서(州誓)가 있었다. 5주서는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이며 청주(靑州), 완산주(完山州), 한산주(漢山州), 우수주(牛首州), 하서주(河西州)에 있었다. 이 부대는 무주에 설치되지 않았다. 9주의 치소에 배치된 부대는 비금당(緋衿幢), 사자금당(獅子衿幢), 만보당(萬步幢)이었다.
비금당은 장창(長槍)을 사용하는 보병이었다. 비금당은 다음과 같은 군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표 3).
비금당의 군관조직 주둔지명
군관직명
沙伐州
揷良州
靑州
漢山州
牛首州
河西州
熊川州
完山州
武珍州
官等
幢 主
3
3
3
2
6
6
5
4
8
13-7
監
領 幢
3
3
3
2
6
6
5
4
8
領馬兵
0
0
0
0
0
0
0
0
8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비금당의 군관조직은 지방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지방 사정에 적합한 인원이 배정되었던 것 같다. 이 군관조직에서 독특한 것은 무진주에만 영마병이 8명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는 이 관원이 없다. 영마병(領馬兵)은 기병이지 않을까 한다. 5주서는 무진주에 설치되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비금당의 관원에 기병을 거느린 영마병의 감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한다. 비금당은 무진주에서 기병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무진주의 비금당만이 장창기병과 장창보병으로 편성된 부대이었다고 여겨진다.
9주에 설치된 보병부대로서 만보당(萬步幢)이 있었다. 만보당은 방패와 도끼를 사용하는 2개의 당이 각주에 설치되었다. 사자금당(獅子衿幢)은 주의 치소(治所)에 배치된 법당군단으로서 전투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 부대 그 용감성으로 중국에 사자대(獅子隊)로 알려졌다. 사자금당은 당주 3인- 감 3인- 법당화척 2인의 군관과 지방민 병졸로 조직되었다. 그 이외에 주의 치소에 노당(弩幢)이 있었다.
주에 설치된 지방 군단에는 지방민이 징발되어 군인으로 충원되었다. 즉 각주의 정이나 당에는 그 지방의 주민들이 동원되어 충당되었다. 다시 말하면 무진주에 설치된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비금당, 만보당, 사자금당, 노당의 군인은 무진주내에 있던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군사로 충당되었다.
군현에는 외여갑당(外餘甲幢), 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이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촌락민으로 구성된 군대이었다. 이 부대의 군관은 법당주(法幢主), 법당두상(法幢頭上), 법당벽주(法幢抗主)이었다. 여갑당과 외법당은 6세기 후반 신라의 영토 확장과 군현의 설치로 새로이 법당을 편성한 지역에 편성된 부대이었다. 법당군관직은 지방의 태수와 현령이 겸하였다.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에서 보이는 호를 여자(餘子) 법사(法私)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이 여자·법사는 신라의 법당군단 중에서 여(餘) 또는 법(法)자가 붙는 부대에 징발되는 호라고 한다. 현령이나 소수는 지방민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충열현·강원현·백주현의 경우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신라는 외적의 방어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 또 축조된 성곽도 지방관의 관심 속에서 보수 유지되었을 것이다. 충열현·강원현·백주현에는 백제시대에도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충열현·강원현·백주현에 있던 성곽이 지방지배를 위하여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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