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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이야기 (1) - 그의 영화 이야기

이소룡 얘기가 나오는 군요. 이글은 제가 모 카페에 올린 글인데 여기 한번 더 올려 봅니다.

.. 이소룡은 영화배우로서뿐 아니라 무술가로서 중국무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서구인에게 아시아와 아시아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 가장 큰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이소룡은 1940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태어났습니다. 울음 소리가 우렁차 동네를 흔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이진번(李振藩)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소룡은 영화에서 쓰인 그의 예명입니다. 태어나던 그해 부친 이해찬은 홍콩으로 역이민을 오게 되고 이소룡은 어린시절을 홍콩서 보내게 됩니다.

부친은 배우였고 모친은 중국인과 러시아인의 혼혈인입니다. 따라서 이소룡은 서양인의 피가 4분의 1이 섞인 셈이지요. 부친을 따라 영화판을 기웃거리게 되고 아역배우로 몇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여 이름이 좀 알려 졌습니다. 금문녀, 뇌우(雷雨), 인해고홍(人海孤鴻-군중속의 외기러기)등이 이시기 그가 아역, 소년배우로 출연한 작품입니다.

그의 무술수업은 그의 부친에게 태극권을 배움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태극권을 무술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른의견도 있겠지만... 그후 그는 입먼(엽문)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영춘권을 배웠고 이것이 그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됩니다. 그외 주가권,공력권등을 배웠는데 공력권은 그가 챔피언까지 했던 차차차 댄스를 스승에게 가르쳐 주고 서로 교환교수 했답니다. 권투도 연마하여 동네 대회지만 챔피언도 했지요.

19세 때 길거리 싸움으로 문제가 되어 혼자 달랑 1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떠납니다. 미국서 태어났고 따라서 미국시민권이 있었으니까요. 시애틀의 한 지인(知人)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며 워싱턴대학에 입학, 철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지하실을 세내어 자신의 도장을 열고 동료 대학생에게 쿵후를 가르치는데 수련생이던 린다 에메리라는 여성과 결혼합니다.

이후 그는 할리우드로 이주해 배우들에게 쿵후를 가르치고 그 인연으로 몇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그가 가르친 인사로는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반, 그리고 NBA스타였던 카림 압둘 자발등이지요. 그리고 재미 태권도 사범인 이준구를 만나 평생의 지기로 지냅니다. 그가 영화에서 보인 화려한 발차기는 이준구의 영향인 것으로 보입니다.

1964년 가까운 롱비치에서 제 1회 전미국 무술대회가 열리는데 그는 선수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시범을 보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처크 노리스가 라이트급 챔피언과 무제한급인 그랜드 챔피언으로 올랐는데 이 인연으로 노리스는 맹룡과강에서 유명한 콜롯세움의 결투장면으로 이소룡과 공연하게 되고 배우로 변신하죠.

1회 대회이다 보니 함량미달의 선수도 많았고 라이트급인 노리스가 헤비급 선수를 물리치고 그랜드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처크 노리스는 주한미군이었는데 오산에서 태권도를 배웠고 제대 후 무술도장을 연 케이스입니다. 다만 그때는 당수(Tang Su Do =Korean Karate)라는 말이 쓰였는데 지금도 노리스의 스타일은 당수도로 소개됩니다.

무술가로서 또 배우로서 조금씩 명성을 쌓아가던 중 홍콩에서 출연의뢰가 옵니다. 로웨이(라유,羅維) 라는 감독과 몇몇 영화인이 당시 홍콩제일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즈(소씨 형제 전등공사)를 그만두고 골든하베스트라는 영화사를 차리고 그 첫 작품에 출연 섭외가 온 것이지요. 바로 유명한 당산대형(堂山大兄-The Chinese Connection)입니다.

당산대형은 타일랜드 올 로케이션으로 찍었는데 그는 바로 촬영장인 태국으로 날아 갔습니다. 출연료는 1만 불. 촬영차 태국에 체류하는동안 플래트 고몬이라는 전직 무에타이 챔피언과 겨뤄서 이기기도 했습니다. 아뭏든 당산대형은 개봉되자마자 그때까지 최고 흥행작이었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단숨에 뛰어 넘는 대 기록을 세우고 골든하베스트사는 일약 신흥 명문 영화사로 자리잡습니다.

당산대형이 히트하게 된 배경은 그 이전까지 최고 인기배우였던 지미 왱우(Jimmy Wangwoo=王羽)가 손을 주로 쓴데 비해 화려한 킥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역 배우로서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닦았던 탄탄한 연기력도 한 몫을 했지요.

두 번 째 작품은 그의 영화 중 가장 액션 신이 돋보였던 정무문(精武門-Fist of Fury)였습니다. 역시 로웨이 감독 작품이죠. 상해 정무체육회의 설립자인 곽원갑 독살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이 영화에서 로웨이 감독도 중국인 형사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는 그의 전매특허가 된 눈 차쿠를 선보입니다. 흔히 쌍절곤이라고 하는 오키나와 고무도의 무기로 그가 미국서 배워 둔 것이었죠.

정무문은 당산대형보다 더 열광적인 흥행을 기록합니다. 명성이 알려져 출연 섭외가 오는데 25만 불의 출연료를 제시했지만 그는 40만 불을 요구하여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알란 드롱의 출연료가 대충 이정도였다지요. 하지만 그의 꿈은 본바닥 할리우드의 와이드 스크린에 출연하는 것이었지요.

두 편 영화를 찍고 그는 협화(協和)전등공사(Concord Inc)라는 독립 영화사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을 시작하는데 제작은 콩코드,배급은 골든하베스트가 맡는 식이죠. 할리우드식 영화제작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홍콩의 주먹구구식이 맘에 들지 않아 이전 두 편 찍을 때부터 자주 로웨이 감독과 마찰을 빚기도 해 아예 자기가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 작품이 맹룡과강(猛龍過江-The Way of the Dragon)입니다. 일부 로마에서 로케이션했지만 대부분 홍콩의 셋트 촬영이 많았습니다. 콜롯세움의 싸움도 처크 노리스와 홍콩에서 찍어 편집했죠. 한국 합기도 사범인 황인식도 일본의 가라데가로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시나리오를 썼고 출연, 감독,무술지도,심지어 음악,미술까지 담당할 정도로 거의 원맨 무비가 되었습니다. 제작비를 절감하려고 칼같은 일정을 소화, 하루 OK 필름 3 분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찍어 불과 한달 만에 완성시켰습니다. 그의 여우같은 제작 수완에 모두 혀를 내 둘렀다는군요.

네 번째 작품이 사망유희(死亡遊戱-Game of Death)입니다. 그는 영화 찍을 때 액션신부터 먼저 찍고 나중에 편집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액션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이소룡에게 맞아 죽기로 되어 있던 지한재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죠. 지한재는 한국합기도의 중요인물이었고 그가 이소룡에게 죽는 장면이 보여지면 합기도의 명예가 떨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문제로 잠시 촬영이 중단되고 시나리오 수정이냐 배우교체냐 숙고하고 있는데 할리우드에서 섭외가 들어 옵니다. 그것이 바로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로 로버트 클로즈 감독이 연출한다고 했습니다. 이소룡으로서는 평생의 꿈인 와이드 스크린의 미국영화에 출연하는 기회가 된 셈이고 그래서 일단 사망유희의 완성을 보류하고 용쟁호투에 출연합니다.

사망유희는 탑에서의 결투를 포함해 77분 분량을 진행했는데 편집하고 나서 건질 수 있는 OK 필름은 분량이 한 15 분 쯤 되었습니다. 용쟁호투 개봉 후 이소룡이 죽음으로서 미완성으로 남겨졌는데 부산 출신의 비슷하게 닮은 한국인 배우를 써서 그의 사후 완성시켰지만 완성도에 한계가 있더군요.지한재도 고집을 꺽고 오리지날 필름 그대로 하는 것에 동의 해 이 영화에서 이소룡에게 번쩍 들려 허리가 부러지는 장면에 나옵니다.

사망유희에는 쟁쟁한 무술가들이 총 출동합니다. 지한재, 필리핀의 봉술가..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 NBA스타 카림 압둘 자발...

이소룡의 마지막 작품인 용쟁호투는 할리우드 자본에, 할리우드감독에, 할리우드식으로 찍은 , 그가 원했던 바로 그 미국 영화였습니다. 이영화에서 이소룡은 본인이 제작자로 참가했습니다. 출연료를 받지 않고 흥행성적에 따른 런닝 개런티 방식으로 사인해서 영화가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엄청난 돈을 받게 되었지만 그는 그 돈을 만져 보지도 못하고 고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너무 엉성해 그와 로버트 클로즈 감독은 대대적인 수정을 가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이소룡 자신의 철학,무도관(武道觀)이 많이 가미될 기회가 됩니다. 오프닝 신에서 홍금보와 소림사에서 겨루기하고 나서 정보국 관리가 보는 가운데 제자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철학을 피력하죠.

kick me. ... It`s like a finger pointing away to the MOON...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아닙니까? 선가(禪家)에서 노상 하는 소리죠.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서양인들은 동양의 신비감,묘한 매력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정크선을 타고 섬으로 가는 장면에서 뉴질랜드 출신의 한 무술가와 시비가 붙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는 일본 무사의 일화를 이용합니다.

What`s your style? (유파가 뭔가?)
A style to win without fighting. (안 싸우고 이기는 유파다)
Without fighting? Without fighting? (안 싸우고? 안 싸운다고?)

안 싸운다는 것은 아이키도를 비롯한 일본 무술에서 자주 강조되는 말이지요. 그리고 조각배를 타고 육지로 가서 싸우기로 하는데 먼저 이 뉴질랜드 무술가가 조각배로 옮겨 타자 묶은 줄을 풀어버려 꼼짝 못하게 하죠. 이 장면을 본 일본인들은 아마 피식 웃었을 겁니다. 저거, 일본 사무라이 얘기잖아...

섬에 도착해 이소룡이 무술시합에 출전 합니다. 그 상대인 오하라(두목의 보디가드임)가 시합 전 인사를 하지않고 갖고 나온 판자를 공중에 던져 쳐서 부숴버리죠. 이 때 이소룡 왈,

Boards don`t hit back. - 판자는 반격하지 않아(하지만 난 달라).

준비 없는 즉시 공방의 원리, 그의 절권도 사상을 나타 낸 말입니다. 판자 깨기와 실제 겨루기는 다르다는 뜻이죠.

용쟁호투는 이소룡의 무도관, 동양의 신비주의를 세계에 전파시키는 매체가 되었습니다. 서구인들은 영화를 보고 작은 체구의 동양인을 보는 시각이 일신되었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 두목인 한과 거울의 방에서 결투하는 장면은 압권으로 007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본드가 악당 스카라망가와 거울 방에서 대결하는 모습으로 모방되기도 했습니다.

용쟁호투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무술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아직 이를 능가하는 무술영화는 없다고 말해집니다. 이 영화가 미국의 흑인가 극장에서 상영될 때 매일 의자 몇 개가 부서졌다고 합니다. 흥분한 관객이 흉내를 내며 부순 것이죠.

또 그의 영화를 보고 무술을 평생의 길로 택한 사람도 많습니다. 공수바보열전을 보고 문장규 관장이 가라데를 시작한 것이나 바람의 파이터를 보고 가라데를 시작한 사람도 있는 것처럼. 슈가 레이 레너드도 이소룡에 매료되어 쿵후를 수련했다고 합니다.

이소룡은 부인과 딸 샤논 리,그리고 아들인 브랜든 리를 두었습니다. 브랜든은 아버지처럼 무술을 했고 배우가 되었는데 몇 년 전 죽었습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의 한 장면에 총 맞는 장면이 나오는 데 스탭 중 누군가가 총에 들어있는 공포탄을 빼고 실탄을 넣은 것입니다.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고 이소룡의 저주받은 가계의 전통을 보는 듯 으시시했습니다.

아버지 이소룡이 사망유희에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타 낸 장면이 아들인 브랜든에게 실제로 나타난 것입니다. 브랜든의 죽음은 사망유희 영화의 한 장면과 꼭 들어 맞습니다. 이소룡은 때로 까닭 모를 불안에 시달리곤 했고 악몽을 꾸곤 했는데 그 가계의 저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격렬한 무술 수련에 매달렸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약물을 복용하기도 했는데 그의 직접사인도 약물중독이었지요. 1973년 육체파 여배우 틴페이의 침실에서 33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사상 유례없는 것이었고 예해성침(藝海星沈-예술의 바다에 별이 떨어지다) 이라는 글을 세운 빈소에는 수만 명의 조문객이 찾았습니다. 홍콩은 한동안 전 국민이 일종의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그의 유해는 시애틀의 한 언덕에 묻혔는데 그의 제자였던 스티브 맥퀸과 제임스 코반이 그의 관을 운구했습니다.

이소룡(李小龍)/본명 이진번, 1940-1973, 170 cm 64kg, 절권도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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