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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한병기 "이종격투기" 붐 현상에 대해


최근 인터넷 검색엔진 사이트의 인기검색어 중에 이종격투기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무술계에 있는 입장에서는 일반인들의 무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다면 당연히 환영해야 하는 입장이다. 위성방송들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격투기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어 밥샵이나 탱크 아봇 같은 사람들의 이름들도 사람들간에 대화에 언급되기도 한다.
또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대형 이종격투기 대회가 열려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TV뉴스로까지 선택되어 방영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종격투기에 대한 열풍이 과연 무술계의 시장을 과연 확대시킬수 있냐는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 70년대 프로레슬링과 복싱에 열광한 사람들처럼 이종격투기가 인기스포츠로 자리잡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위성방송에서 정기적으로 중계해주던 외국의 격투기 중계에 따른 일반인들의 관심의 증가와 반사적인 효과에 의한 반짝 인기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질문은 이런 경기를 왜 해야만 하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궁극의 강자를 뽑는다는 식의 이상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런 이종격투기는 수익사업이며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이다. 무술의 이상이 어떻든, 최강의 초인이 누구던지간에 매스미디어와 광고, 돈을 내고 입장하는 관람객이 없다면 대회는 결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처럼 무도의 이상을 따라 최강의 자리를 놓고 구도적인 열정으로 무술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소설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아직도 영화기획자나 TV프로듀서들은 이런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있다. 없으면 만들어내는 방송의 속성처럼 무술구도자들은 시나리오에 따라 만들어져 ‘인간극장’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 등과 같은 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가끔씩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을 보면 보여지는 것과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무술고수들의 가슴을 뛰게하고 투혼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은 구도와 자기완성, 또는 터무니 없이 강한 적이 아니라 바로 ‘돈’이다. 돈 때문에 경기를 하고 훈련을 하는 프로무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들의 실력은 과거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들에 못지 않다. 아직 동양의 전통 속에는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 돈으로 계산하는 것이 익숙하지 못하다. 굶어죽을지언정 산에 사는 도인들이나 구도자들은 돈에 욕심을 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부류에는 무술가들도 포함이 된다. 심지어 그 말단에 있는 동네의 도장관장들조차 생업에 종사하지만 과거의 선비처럼 청렴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양심을 팔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을 만들어낸다. (야외수련비, 승단비 등등) 무술에 대한 이중적인 관념-기격이면서 기격이 아니고 돈을 벌면서 돈을 벌어서는 안된다는-은 매우 오래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이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포르노와 카레돈까스, 회전초밥과 함께 일본이 세상에 내놓은 이종격투기라는 상품은 돈에 대해 초연한 무술가들의 이미지와 최강의 전사를 보려는 대중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권투와 레슬링 등의 투기종목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지갑을 털어내기 위해 기획된 쇼라는 것이다. 볼거리도 많고 재미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종격투기, 즉 진정한 강자를 가리기 위한 여정에는 많은 난관이 놓여져 있다.

이종격투기 경기를 보고 화려한 액션과 강한 카타르시스를 바랬던 사람들은 황비홍과 이소룡의 지배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요리하는 우아한 무술고수들의 면모를 원했겠지만, 얼마전 한국에서 열린 이종격투대회인 스피리트 엠씨에서 보여준, 상대와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코피가 나면 지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많이 했다고 고백한다. 이 원인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로, 출전한 선수들의 실력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무에타이계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이면주 선수와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 선수들은 체육관의 동호회원 정도의 실력들이었다.

이종격투라고 하지만 한 무술의 격투방식이 몸에 밴 선수라면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서 기술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경기를 지배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떤 부류의 무술가와 대적하더라도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힉슨 그레이시의 경기를 본다면 매우 명확해진다. 힉슨은 UFC대회에 단골출장했던 그레이시 가문의 대표 파이터이다. 그의 시합장면과 훈련모습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니 찾아보기 쉬울 것이다. 호이스 그레이시에 대한 실력평가는 이런 저런 말이 많지만 힉슨의 명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힉슨은 그만큼 대내외적으로 강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힉슨이 평가를 받아야 하는 점은 자신의 무술인 유술에 능통하다는 것도 있겠지만 경기의 상황을 풀어나가는 노련한 방식이다.

힉슨은 유술계 무술가이기 때문에 권투선수를 만나건, 태권도 선수를 만나건 결국 상황을 바닥으로 가져가야 한다. 이것은 힉슨의 최고이자 최후의 전략이다. 명성있는 무술가들이 힉슨의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전략에 휘말려들어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타격계 선수들이 펀치의 기본조차 모른채 풍차돌리기 권법이나 이단뛰어차기를 남발하고 유술계 선수가 단순히 몸무게로 깔아뭉개려는 의도만 있다면 수준높은 경기는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다.

두 번째, 공정하지 못한 룰 때문이다. 이종격투기는 유술가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유술가들은 타격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은 있게 마련이지만 타격계 선수들은 관절기술의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공정성을 가장한 무규칙이 바로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유술가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싸움에서 위력적인 기술은 꼬집기와 깨물기는 당연히 성인들의 이종격투기에서 반칙기술로 제외되지만 타격계 선수들이 바닥에 쓰러졌을 때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적인 기술로 사용될 수 있다. 만약 꼬집기와 깨물기를 허용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싸움이 될 것이며 선수보호 측면에서 이 기술들의 금지는 당연할 것이다. 그만큼 위력이 센 기술들이며 어쩌면 싸움과 무술을 나눌 수 있는 경계선상에 있는 비겁한 기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유술 그 자체는 가장 고도로 경기화된 무술이다. 우선 유술은 별도의 매트나 다다미가 있는 연습장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터만 있으면 연습이 가능한 타격계와는 다르다. 유도를 배우면서 야외수련을 가본 적이 있을까? 물론 싸움이라면 몸이 상할 것을 각오하고 바닥이나 자갈밭에서 한 번 구를 수 있지만 연습은 자갈밭에서 하지 못한다. 즉 부드럽고 평평한 바닥을 가정하지 않은 유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종격투기가 자갈밭이나 단단한 마루바닥에서 열린다면 유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중 절반은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종격투는 장소와 룰의 유리함을 업고 싸우는 유술가들이 반드시 약진하게 마련이다. 힉슨의 카리스마 넘치는 경기를 제외하면 유술가들의 경기방식은 재미가 없다. 일반인들에게는 개구리가 교미하는 자세로 서로 껴안고 뒹굴고 할 뿐으로 보인다. 마치 규칙을 모른 채 바둑시합을 보는 것 같다. 끊임없이 펀치를 뻗어야만 하는 복싱경기와는 비교될 정도로 유술계 시합은 재미가 없다.

무술은 싸움이 아니며 현대에서는 스포츠의 일부가 된 것이기 때문에 룰이 존재하게 된다. 스포츠라는 것은 최소한 선수들의 생명을 위급한 상황에 까지 내몰지 않기 때문이다. 무술경기에서 상대를 위험에 빠뜨릴만한 기술들의 거의 대부분 금지를 시켰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방호구를 입혀 부상의 방지한다. 현대에서 룰은 한 무술의 특성의 결정하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권투를 권투이게, 유도를 유도이게 하는 것은 룰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권투 선수는 발차기를 무서워하고 태권도 선수는 유도선수의 기술을 두려워한다. 축구와 야구만큼 다른 분야에 있는 스포츠를 한 경기장에서 싸우게 한다는 발상 자체는 무술이라는 커다란 범위에서는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현대의 무술 자체의 범주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무술에게 공정한 룰을 만들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즉 최강의 무술을 고르는 것은 확률상의 문제가 된다. 다양한 룰와 상황을 만들어 평균적으로 어떤 무술이 강세를 보이는지 판단할 수 있다. 경기장도 매트와 링을 벗어나 흙바닥, 진창, 자갈밭 등등의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야 모든 무술에게 공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경기운영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링 또는 변형된 링과 푹신한 바닥에서 경기가 진행되는 한 유술계 선수들이 강점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타격계 선수와 유술계 선수의 전쟁은 개와 고양이의 싸움만큼 오래된 유치한 싸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종격투를 해야하는 당위성은?

70년대 이노키와 알리가 싸운 이후 유술계와 타격계의 경쟁, 어떤 무술, 어떤 사람이 최강이냐는 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벗어나지 않았다. 싸움구경은 물 구경, 불 구경과 함께 3대 구경거리는 농담이 있듯이 사람들과의 싸움은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흥분시킨다. 물론 자기는 구경만 한다는 전제하에서이다. 하지만 호사가들의 입을 떠나 이런 이종격투를 성사시키는 당사자는 자본이다. 이종격투를 권투와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예전만 하지 못하자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각 선수들의 경기를 하는 이유도 돈 때문이다. 이종격투에 몰려든 자본은 원래 아마추어 선수와 동호회에 불과했던 단체들을 프로화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이종격투라는 신종엔터테인먼트에 열광했던 관객들은 그 경기들이 정착하면서 일상화되자 권투와 유도 이상의 볼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기장의 스텐드를 떠나게 된다. 일본의 K-1경기가 점점 시들해져가는 현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본과 경기 주최측은 관객들을 다시 끌어모으기 위해 더욱 강력하고 자극적인 경기를 제작하여 선보이려고 한다. 결국 무술은 그 우아함을 잃어버리고 소싸움과 다름없이 변질되고 무술가 또한 무술수련의 이상을 벗어나 경기력 향상을 위한 노동에 열중하게 된다. "이종격투는 무술의 말단이며 무술의 여러 기능 중 한가지만을 극단적으로 이용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공정한 룰을 만들 수 없다는 속성상 최강의 무적 고수가 아니라 누가 룰에 잘 적응했는지 여부가 경기의 승부를 가르는 중요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종격투가 열리는 방식은 무술에 대한 본질과 내용을 끊임없이 왜곡한다. 이종격투가 열리는 고대의 신전같은 무대디자인, 각양각색의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고 등장하는 선수들의 입장, 그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서양의 고대전사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이며 장례격투에서 망자를 인도하고 콜롯세움에서 피 튀기는 결투를 하는 글라디에이터이다. 이종격투는 서양사람들에게 3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며 아련한 이국정서의 신비함을 상품으로 만들며 신화 속 인물과 같은 근육질 전사들을 통한 대리만족은 관객과 선수들을 양분하여 무술수련의 핵심명제인 ‘참여’라는 덕목을 배제해 버린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무술 역시 경기자와 관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축구와 야구와는 달리 신화와 오리엔탈리즘과 결합된 저질 쇼로 전락할 우려를 지적하는 것이다.

격투기중 세계 최고의 판돈 스포츠는 역시 권투다.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는 종종 수백억원대의 돈이 모이기도 한다. 그리고 아마추어 선수로서의 명예는 올림픽을 최고로 친다. 현재 이종격투는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어중간한 단계에 머물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에 서있는 이종격투 선수들은 기량적으로 복싱챔피언이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종격투계에도 실력있는 강자들이 모일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자본의 향방과 대중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기를 얻고있는 복싱과 비교해서 경기 자체의 재미와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를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 유술의 특성은 일반인들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K-1과 같은 타격계 경기도 선수층이 얇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식상함을 줄 수가 있으며 거구들이 등장하는 게임들은 경량급들의 아기자기한 기술전개를 볼 수 없어서 힘으로만 승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체급별 경기로 유도는 이종격투가 지향하는 무제한급의 결투와는 상충되기 때문에 평범한 킥복싱 경기로 전락할 염려가 있다. 이종격투가 정착을 하려면 ‘최강의 강자’를 가리겠다는 의욕을 앞세워 무술 그 자체를 홍보하기 보다는 미국의 WWE처럼 정교한 엔터테인먼트를 기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를 흘리는 잔인함을 방송해야 하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쇼적인 성격을 부각하고 유머와 안전함으로 포장을 해야되기 때문이다.

무술의 이상은 무엇이고 현실은 무엇인가?
무술은 형이 있다. 무술은 혼자 연습하여 체조와 같은 미학을 추구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역시 핵심은 기격성이다. 형을 수련하건, 체조를 하건 실전-현대에서는 싸움이 아닌 경기-에서 끊임없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투로를 만들어도 경기에서 전혀 쓸모가 없으면 바로 폐기처분할 수 밖에 없다. 항상 현실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군사학과도 유사하다. 아무리 유능한 군사학자가 새로운 무기와 작전개념을 만들어 설명해도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이 ‘그런 것은 실제 전투에서는 못써’라는 한마디에 꼼짝못하는 경우를 영화에서 보기도 한다. 무술을 수련하는 목적과 그 이상치는 과연 어디일까.

무술수련의 목적에는 다양한 방향이 있기 때문에 어느 사람의 목표가 틀렸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최강의 기격능력을 꿈꾸는 것은 여러 목표 중에 하나일 뿐 무술수련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자신이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무술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을 목적으로 완전체를 꿈꾸는 사람들은 50세가 넘어 펀치드렁크 현상에 시달리는 권투 선수들을 비웃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이들의 목표에는 실전성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술을 수련하여 누가 더 건강한가를 겨루는 것도 앞으로 무술경기화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재미는 없겠지만 말이다. 기격성이 무술을 이루는 근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술을 싸움과 구별시키는 그 우아함과 절제가 없다면 지난 수십년간 동서양의 열정적인 수련자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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