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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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데의 역사와 극진가라데의 관계라고할 글...(퍼옴)

무술을 수련함에 있어서 자기 무술의 뿌리를 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전수와
교습이 돈독한 사제관계하에서 이루어 지고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유파(流派)로
전승되는 동양무술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이 글은 가라데라고 불리우는 무술의 연원을 제 나름
대로 더듬어 본 것으로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글은 체육사의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이 쓴 학술 보고서가 아니라 관심있는 한 아마추어가
동원 가능한 자료와 지식범위 내에서 쓴 것이므로 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에
대해서는 지적해 주시기 바라며 먼저 다음과 같은 점을 밝혀 둡니다.

-인명,지명등의 고유명사의 표기는 대부분 로마자 표기를 한글로 옮긴 관계로 중국,오키나와,
일본의 현지 발음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오키나와 토착어와 일본의 발음이 다른 것은 추적 가능한 것에 한해 병기함.

-유파(流派)의 표기는 일본어 발음,한국어 발음과 한자를 병기하였음.
예) 쇼토칸 (송도관,松濤館)

-인명은 필자의 지식범위 내에서 한자를 병기하였으며 존칭은 생략함.
예) 후나고시 기찐 (船越義珍)

-글 싣는 순서

1.오키나와 약사(略史)
2.데(手)의 기원과 전개 - 슈리데,나하데,도마리데 그리고 도데
3.데(手) 수련의 특징
4.데(手)의 명인들
5.가타(型)에 대하여
6.전통가라데의 유파형성 : 쇼토칸(松濤館), 고쥬류(剛柔流), 시도류(絲東流), 우에치류(上地流)
7.극진 가라데
8.태권도

이상을 참조하시기를 바라며 시작합니다.



1.오키나와 약사(略史)

오키나와 제도(諸島)는 일본 큐슈와 대만 섬 사이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합계면적 2300 평방킬로의
약 160개의 섬(무인도포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일본 영토이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종,언어,문화가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제주도 두 배 정도의 이 조그만 섬에서 전 세계적
으로 가장 포퓰러한 무술의 하나인 가라데가 발생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려니와 이는 이 지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8세기경 농경문화가 정착되고 11세기부터 고대 성읍국가
(城邑國家)가 출현한다. 3국시대를 거쳐 15세기에 쇼오하쯔시(尙巴志)에 의해 통일 왕조인
류쿠왕국이 수립되어 중국,일본으로의 조공 무역으로 번영하나 17세기 봉건영주인 싸스마 번
(薩摩 蕃)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가 되었다가 1879년 메이지(明治)시대에 일본 영토로 병합된다.....
동북아시아의 여느 국가에도 볼 수 있는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역사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역사와 가라데의 연관성에 중요한 것이 가타나 가리(刀狩), 칼사냥으로 표현되는
금무정책(禁武政策), 즉 무기휴대를 금하는 정책이다. 대개 통일 대업을 완수한 국가는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무사를 억압하고 문치를 시행하게 되는데 일본본토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후 1588년에 백성들로부터 무기를 몰수하는 정책이 시행된 바 있다.

15세기 류쿠에 통일 왕국이 서자 백성들에게 무기를 빼앗는 정책을 편다. 다만 이 때의 무기휴대
금지령은 지배층이 피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인 것이었고 지배층은 여전히 무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시기 오키나와는 중국 남부와 일본사이에서 조공무역을 통해 번성하게 된다. 마침
일본은 전국시대였고 포르투갈로부터 들여 온 조총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있었으며 화산도인
류쿠의 특산품인 유황은 화약의 원료로서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오키나와의 번영은 그러나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나고 통일국가가 들어섬으로써 끝난다. 전부터
오키나와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사쓰마 번 (薩摩 蕃=현재의 가고시마)은 에도 막부의 허락
하에 오키나와를 침공, 식민지화 하고 오키나와의 전 국민에게 무기를 빼앗는 2차 금무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때의 칼사냥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싸스마의 사무라이
들에게 오키나와인은 왕이건 귀족이건 평민이건 모두가 복속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번(藩)의 개념은 바쿠한(막번,幕藩)정치에서 유래된 일본의 봉건영지를 말한다. 도요토미
사후 쇼군(將軍)이 된 도쿠가와 이예야스가 에도(江戶=현재의 동경)에 막부를 설치하고 각지방의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命)들은 에도 막부에 충성하고 가족을 인질로 제공하지만 막부의 기본정책에
위배되지 않는 한 독립적으로 자신의 번을 다스릴 수 있었다.

오키나와인에 대한 사쓰마 사무라이들의 수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무기를 가지
거나 무술 수련하는 것이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당시의 사무라이 (武士)들은 평민이 단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재판없이 현장에서 목을 벨 수 있는 특권이 있었으며 평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이었다.

무기없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수단은 맨손(空手)이었고 류쿠인들은 비밀리에 맨손을
무기화하는 수련을 하려 한 것이며 여기서 현재 가라데라고 불리우는 무술의 원형이 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명치 천황이 오키나와를 일본의 일부로 병합
하고 봉건시대가 해체되는 19세기 말 까지 거의 300년간 지속된다.




2. 데(手)의 기원과 전개 - 슈리데,나하데,도마리데 그리고 도데

가라데는 그 기원과 역사가 매우 모호한 무술이다. 수련과 전수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비밀유지를 위해 많은 수의 제자를 둘 수
없었고 수련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오키나와인들은 이 무술을 그냥 손을 뜻하는 "데(手)"라고만 불렀고 그것이 유래된 지역에 따라
슈리데(首里手), 나하데(那覇手), 도마리데(泊手) 등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조그만 섬에서 무슨
지역에 따른 유파 구분이 있었겠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으나 류쿠가 도서국가였다는 것과 데(手)의
수련과 전승에 비밀주의를 취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들은 또 이 데(手)에 중국을 뜻하는 당(唐)자를 붙여 음독과 훈독을 섞어 "도데(당수,唐手)"라고
하거나 또는 훈독만으로 읽어 "가라데(당수,唐手)"라고 발음한 것이다. 어쩌면 "중국 손"이라는
이름은 기왕의 오키나와데와 구분되는 중국에서 수입된 무술이라는 걸 암시하고 하는 듯 하나
데를 통칭해서 그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데(手)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느 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중국으로부터 들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략 세가지 설이 있는데,

-14세기 36명의 명나라 이민이 가지고 들어 왔다는 설

-오오시마 필기(大島筆記)설

-오키나와 자생(自生)설 등이 있다.

이중 가장 믿을 만 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오오시마 필기설이다. 1762년 사쓰마로 공물을 바치러
가던 오키나와 배가 풍랑을 만나 오오시마 섬의 토사(지금의 고찌)에 표류하는데 오오시마의 유지
였던 도베 조끼의 도움을 받는다. 이 배의 고급 선원이었던 페친 쇼히라는 오오시마에 머물면서
류쿠왕국의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도베에게 이야기하고 도베가 이를 받아 적어 오오시마
필기(대도필기,大島筆記)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필기의 제 3권에 이르기를, 6년 전(1756년) 류쿠왕국에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그 시종무관으로
따라온 쿵샹춘(公相君,공상군=쿠샹쿠=고쇼쿤)이라는 사람이 쿠미아이쥬쯔(組合術)라는 주먹 기술을
보여주고 이를 류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다. 공상군은 그 군호(君號)로 미루어 꽤 고위층
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이 오키나와의 무술에 대한 최고(最古)의 기록이며 가라데에 공상군
가타(型)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가라데의 기원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다.

오오시마 필기를 정설로 받아들이더라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오키나와에도 무술이 있었고
그 위에 중국무술이 가미되었는지 아니면 오키나와에는 무술이 없었고 공상군이 전해 준 중국
무술을 오키나와 사람들이 자기들 실정에 맞게 변형시킨 건지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상군 이외에도 류쿠에는 수많은 중국의 상인(주로 복건성)들이 내왕했고 데(手)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국무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데의 명인들은 무술 수업을
위해 중국 남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다음에 약술(略述)하는 데의 기원과그 전승계보는 확인 가능한 것만 기술한 것이며 따라서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그 이전과 중간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전설이 되어 버렸거나 아무도 모른다.



슈리데(首里手)

공상군이 가르쳤던 것이 진화된 것이며 빠르고 경쾌한 중국 북파권법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슈리데는 후에 쇼린류(소림류,少林流)로 발전하며 쇼토칸 가라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슈리데의
계보와 전개는 다음과 같다.



공상군------사쿠가와 간가------마쓰무라 소곤-----아자토 야스쯔네----후나고시 기찐
(1756 도착) (1762-1843) (1796-1893) (安里安恒,1828-1906) (船越義珍,1868-1957)
슈리데 창시 슈리데 쇼토칸(송도관,松濤館) 창시

*사쿠가와 간가는 공상군 뿐만아니라 다카하라 페이진으로부터 세이션 가타를 전수 받았고
후나고시 기찐은 아자토 야스쯔네외에도 마쓰무라 소콘의 또다른 제자인 이토스 야스쯔네
(絲州安恒)로부터 슈리데와 도마리데를 전수받는다.



나하데(那覇手)
지금 오키나와의 수도인 나하성에서 연마 되었다. 산찐(삼전,三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하고 무거운
중국 남권의 특징을 보여주며 계보는 다음과 같다. 나하데는 후에 쇼레이류(소령류,昭靈流)로
발전하게 된다.

?-----아라가키 세이쇼,도데 ---히가오나 간료------마부니 겐와
(1840-1920) (東恩納,1853-1916) (摩文仁賢和,1889-1952)
류쿠류 (중국인),백학권 나하데 시도류(사동류,絲東流)창시

------미야기 쵸준
(宮城長順,1888-1953)
고쥬류(강유류,剛柔流)창시

*마부니는 히가오나 외에 이토스 야스쯔네를 사사하였고 이토스(絲州)의 絲와 히가오나(東恩納)의
東자를 한 자씩 따서 자기 유파를 시도류(사동류,絲東流)라고 이름지은 것임. 히가오나의 또다른
제자인 미야기 쵸준은 스스로 중국 남부지방에 무술유학을 통해 별도의 중국권법을 배우고 고쥬류
(강유류,剛柔流)를 창시한다.


도마리데 (泊手)

도마리 지역의 데로서 역시 남권 계통이다. 전승 계보는 다음과 같다.


? --기코 유쿠,기신 데유라--- -마쓰무라 고사쿠-----이토스 야스쯔네----후나고시,마부니등등
(1828-1898) (絲州安恒,1831-1916)
도마리데 슈리데,도마리데

*이토스 야스쯔네는 마쓰무라 고사쿠로부터 도마리데를, 또다른 스승인 마쓰무라 소콘으로부터
슈리데를 친구인 아자토 야스쯔네와 동문 수학함. 이 두친구는 후나고시의 스승이 된다.

이상 오키나와데의 전승계보를 간략히 살펴 보았지만 계보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유파가 다른 두 스승으로부터 두가지를 전수받은 사례가 많고 이 경우 그를
어느 계열로 분류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 때로는 기록이 실종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위의 계보
분류는 개략적인 것이며 수많은 계보가 존재함을 밝혀 둔다. 유파별 상세한 형성 경위는 후술
하기로 한다.



3. 데(手) 수련의 특징

중국무술의 특징 중의 하나가 투로(套路=가라데의 형에 해당)에 의한 수련이 중시되고 대단히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전시에는 실전기가 중요하겠지만 오랜 펑화로 인해 무술이 격투술이
아닌 무술자체의 완성을 위한 개인의 도락(道樂)으로 흘러 버리고 미학적 요소가 덧붙여졌다.
내가권법의 영향으로 의학, 철학, 종교, 때로는 기예(技藝)와의 경계도 애매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류쿠인들에게 무술이란 압제에 대한 현실적 저항의 수단이었고 생존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대단히 실용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복잡하고 정교한 무술은 실전에서의 신뢰성이
떨어진다. 류쿠인들은 기예의 백과사전 같은 중국무술을 아주 간결하고 신뢰성 있는 기술체계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들이 처한 극한 상황은 애시당초 중국인들 처럼 무술로 음풍농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실전을 염두에 둔 기술체계와 수련의 방법론을 개발해
내었다. 몸을 만들고 마끼와라(권고,卷藁)를 고안해 수족을 무쇠처럼 단련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도 중국 무술의 투로 만능주의를 탈피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무술
의 투로를 수입하고 또 그것을 변형한 가타(型)를 만들었고 그 가타의 반복 숙달이 수련의 주요한
내용이 되었다. 가타의 숙련도가 실력의 고하를 추정하는 척도가 되었고 수련의 성과로 간주되었다.
가타를 수련하는 것은 수련의 한 형태이며 필요조건일 뿐이라는 것은 현대에 와서 공개 시합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충분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가타를
수련하느냐가 유파와 계보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공개시합이 불가능 했던 것은 수련이 가타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원인이 된다. 대개
수련은 한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진 곳이나 특히 사람들이 오기 꺼려하는 묘지에서 실시
되었다. 수련 참가자는 많아야 서너명이었고 때로는 스승과 제자가 일 대 일로 교습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키나와의 가라데가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 속에 있었고 이것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거의 20세기가 가까운 일본의 개화기가 되어서였다.



4.데(手)의 명인들

오키나와데의 명인들이며 일본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후에 설명함. 오끼나와의 명인들은 대부분
몰락한 류쿠왕국의 귀족의 후예들이었다. 참고로 그들의 생몰(生歿) 연대에 대해서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옴을 밝혀둔다.

사쿠가와 간가(1762-1843)
슈리 출신으로 공상군으로 부터 중국 권법을 배우고 가타를 수련의 한 요소로 도입.
쿠샹쿠 (공상군,公相君)형과 파싸이 (발새,拔塞=밧싸이)형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마쓰무라 소곤(1809-1899)
사쿠가와의 제자로 슈리데의 창시자. 어릴 때 한학을 배웠고 글씨에도 능해다고 한다. 중국 복건
성에 세차례나 여행, 추안파(권법,拳法=일본어 발음은 켐포)를 수업하였으며 류쿠왕실의 무술
교사로 활동하였다. 도장훈(道場訓)을 처음 사용했으며 그로부터 가라데가 지금과 유사한 형태가
되었다. 류쿠왕으로부터 무사칭호를 받았고 확실하진 않으나 나이푸안친(내보진,內步進=나이한치)
형을 창안하고 파싸이 다이(大), 쿠샹쿠 다이(大) 버전을 개발했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가 이토스와 아자토인데 이 둘은 후나고시의 스승이된다.

마쓰무라 고사쿠(1828-1898)
도마리 출신으로 기코 유쿠,기신 데유라에게서 도마리데를 배웠고 봉술,창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사쓰마 사무라이를 맨손으로 대적, 그를 물에 집어 던져 버리고 손가락 하나를 잃는다. 그 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다 명치시대에 복권. 이토스에게 도마리데를 가르치고 사쓰마
사무라이와 싸운 일로 오키나와인들 사이에 영웅화 된 인물.

이토스 야스쯔네 (絲洲安恒,1831-1915)
마쓰무라 소곤으로부터 슈리데를, 마쓰무라 고사쿠에게서 도마리데를 전수받았고 근대 가라데의
원형을 만들었다. 가라데를 학교체육으로 도입하였고(1905) 가장 대중적인 가타인 피난
(평안,平安=헤이안) 1단-5단을 창시하였다. 학교체육의 대중성과 수련의 효율성을 위해 쉬운
가타를 창안한 것이며 그때까지 연결된 긴 가타였던 나이한치를 1,2,3단으로 쪼개고 밧싸이와
공상군 가타의 쇼(小) 버전을 개발했다. 이토스 때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가라데가 지상으로 나타
날 수 있었으며 권성(拳聖)으로 불릴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또 대단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친구인 아자토 야스쯔네와 함께 후나고시 기찐을 가르친다.

히가오나(東恩納)간료(1853-1915)
오키나와어 발음으로는 히가쇼나라고 하며 나하출신으로 아라가키 세이쇼(1840-1920)라는 인물로
부터 나하데를 배웠고 1870년대에 약 3년간중국 복건성에 무술유학을 하면서 류 쿠류라는 중국인
사부로부터 백학권을 전수 받음. 그 제자인 마부니 겐와(摩文仁 賢和)와 미야기 초준(宮城長順)은
각각 시도류와 고쥬류를 창시한다.



5. 가타(型)에 대하여

투로(套路)는 중국권법 특유의 것이다. 중국권법에서 가라데가 나왔고 가라데에서 태권도가
나왔으니 부르는 명칭이 투로든 가타든 품새이든 그 근원은 중국권법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유도와 검도에도 가타에 해당하는 본(本)라는 게 있고 아이키도(合氣道)에도 교(敎)란 게 있지만
정해진 동선(動線)을 따라 혼자 허공을 치는 형태로 그렇게 체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수련되지는
않는다. 같은 동양권 무술인 태국의 무에타이나 미얀마의 띠네같은 무술에서는 투로란 게 없다.

투로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한 스승이 여러명의 제자를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라느니, 스승없이 혼자서 독련(獨鍊)하기 위해서라느니 혹은 기록으로 남기기
쉽게하기 위함이라느니 말들이 많지만 모두가 추측일 뿐이다. 그냥 선인들이 했던대로,생각없이
가르쳐 주는대로 익혔을 뿐이며 이러한 의문이 생긴 것도 꽤 최근의 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유가 어떻든 투로는 수련의 한 과정이며 수단이며 방법론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간혹 투로가
수련의 목적이 된 유파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라데에는 약 80여 수의 가타가 알려져 있으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약 50여 수이고 그
나머지는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가라데의 가타는 중국권법의 투로에 비해 간결하고 동작이 요연
하며 엠부센(演武線,연무선)이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어 항상 출발선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많은 가타의 창안자가 누구인지는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진 몇 수를 제외하고는 명확히 기록된
바 없다. 누가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구전된 것이며 추측일 뿐이다. 중국에서 직수입된 것도
많다. 전수 과정에서 약간씩의 변형이 일어나서 같은 가타에 몇가지 버전이 생기기도 하였다.
대칭형의 연무선으로 부드럽게 진행되던 가타가 갑자기 연무선이 비 대칭으로 바뀌고 날카로운
동작으로 바뀐다면 누군가가 한 가타의 끝에 다른 동작을 첨가하여 편집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
해지는 것이다.

가타의 명칭과 한자표기 방법도 모두 수수께끼같다. 실제로 창안자가 그 가타에서 나타내려 한
혹은 강조하려 한 사상과 기법이 그 가타의 한자 표기의 뜻과 일치하는지도 의문이다.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냥 음(音)으로만 구전되어 온 오키나와어 명칭을 한자로 표기하려다 보니 그 음역이
비슷한 한자어를 억지로 골라 쓰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같은 가타의 한자 표기도 여럿 생긴 것으로
보인다. 최홍희가 태껸과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옥편 보고 고르다 보니 태권이라는 뜻도 안 맞는
이상한 이름이 생긴 것 처럼...

오키나와어로 지어진 가타의 이름은 후나고시 기찐이 후에 일본에서 가라데를 보급하면서 대거
일본식 발음, 혹은 일본식 정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개칭된다. 아마 당시 유도와 검도에 밀려
2류 무술로 취급받았던 가라데를 보급하는데 일본인이 경멸한 식민지 오키나와의 색채를
탈피하고자 한 눈물겨운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마치 군국주의 일본에서 가라데의 한자 표기를
적국인 중국을 연상시키는 당수(唐手)에서 공수(空手)로 바꾼 것 처럼. 대표적인 가타 몇가지를
살펴 보면,



쿠샹쿠(공상군,公相君)
일본에서는 고쇼쿤이라고 하며 공상군 본인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그 제자인 사쿠가와가
창안했다는 설도 있으나 사쿠가와가 제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친 건 확실해 보이며 따라서 18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가타이다. 평안형의 원형이 된 가타로서 대단히 역동적이고 점프
동작까지 포함된 이 가타는 가라데 기술의 데이터 베이스라고 할 만큼 많은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후나고시 기찐(船越義珍)이 일본에서 간쿠(觀空,관공)형으로 개칭하나 아직 고쇼쿤이라고 부르는
유파도 많다. 다이(大),쇼(小), 마부니 겐와가 변형한 사방공상군, 야라공상군 등의 버전이 있다.
이 가타의 최초 자세,즉 마주 댄 두 손 사이로 보이는 태양의 모습이 현재 극진회의 심볼마크가
되었으며 태권도의 1단형인 고려 품새도 이 형상을 차용하고 있다.


파싸이 (발새,拔塞)
일본에서는 밧싸이로 부르며 한자 표기도 발새(拔塞),발채(拔寨),발채(拔砦),파새(破塞)등 여러
가지로 쓰인다. 어느 경우든 요새를 뽑아 엎어 버린다는 강력한 이름의 가타이다. 사쿠가와 간가가
창안했다는 자료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다이(大),쇼(小),도마리 파싸이, 오야도마리 파싸이
마쓰무라 파싸이등의 버전이 존재한다. 왼 손으로 오른 손 주먹을 포개는 최초 동작에서 중국의
포권(包拳=주먹을 감싸는 중국식 예법)과 관련 짓는 사람도 있다.


나이판친(내보진,內步進)
흔히 나이한치로 불리우며 한자표기도 내보진 외에 내반전(內畔戰)으로도 쓰인다. 벽을 등진
상황에서 다수의 무리와 싸우는 것을 상정한 가타이며 한 일자(一字)의 연무선을 따라 수기(手技)
와 엘보 공격으로 구성된 긴 가타이다. 후에 가라데가 학교체육화 되었을 때 이토스 야스쯔네
(絲洲安恒)가 이 가타가 너무 길고 어려워 많은 학생들에게 지도함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2,3단
으로 짧게 잘라 수련정도에 따라 학습하게 했다고 한다.

나이한치는 후에 후나고시에 의해 데키(철기,鐵騎)로 개칭되지만 많은 유파에서 나이한치 그대로
부르고 있다. 대부분 유파에서 오른쪽 연무선을 먼저 밟지만 왼쪽부터 시작하는 유파도 있다.
태권도의 4단 형인 평원 품새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타이교쿠(태극,太極)
후나고시 기찐이 나이어린 초보자를 위해 만들었다. 기본동작을 연결하여 이동하면서 수련하여
학습자가 흥미를 갖고 수련을 하도록 고안한 것이다. 태권도의 태극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참고로 태권도의 태극품새는 1972년 지금 태권도계에서 원로로 대접 받고 있는 인사들이 서울의
한 도장에서 4일동안 초 고속으로 8개의 형을 만들어 종래의 팔괘형을 대체하였다. 8개 형의
제정을 중복, 누락이 없이 그것도 체계를 제대로 갖춰 순식간에 해치웠으니 천재적이다.
태권도에선 창작품새 경연대회란 것도 있으니 아무나 가타를 만들어도 괜찮은 모양이다. 중국
권법에서는 선대의 투로를 바꾸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이를 재해석하는 것까지 이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품세(品勢)라는 한자어에서 품새(=모양새)라는 순 우리말 용어로 바꾼 것도 그 때 쯤이며
ITF에서는 틀이라고 한다.


피난(평안,平安)
이토스 야스쯔네가 종래의 가타가 많은 수의 학생들을 대량으로 가르쳐야 하는 학교체육으로는
너무 어렵고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초,중급자를 위해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공상군과
많은 부분 닮아 있어 피난을 공상군형의 디테일 버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으로 발음하며 수련자의 등급에 따라 5단계로 나뉘어 수련하게 한 아주 대중적인 가타이다.

원래 피난형은 피난2단(좌 상단,중단막기로 시작하는)이 1단 (좌 하단막기로 시작하는) 앞에 오는
순서로 되어 있었으나 후나고시가 1930년대에 현재의 순서로 바꿨다. 그 이유는 피난의 5개 형의
철학적 근거가 된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五輪書)에 나타난 땅-물-불-바람-허공의 순서에
맞춘 때문이다. 이 경우 현재의 평안1단은 땅의 가타가 되는 셈이다. 피난의 5개 가타의 동작을
오륜서의 각 장(章)과 대비시켜 보면 필자의 눈에도 그럴싸 해 보이고 기술의 난이도 면에서도
1단이 쉬워 보이므로 후나고시가 지금의 순서로 바꾼 건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와도류
(和道流), 시도류(絲東流), 고쥬류(剛柔流) 등의 유파에서는 이토스가 만든 순서 그대로
평안2단을 1단으로 부르고 맨 먼저 수련한다.



5.전통 가라데의 유파 형성 - 쇼토칸,시도류,고쥬류,우에치류

오키나와 가라데는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고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19세기
말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류쿠처분(1879)으로 류쿠가 오키나와(沖繩)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되고 가라데는 지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교습이 가능해 졌고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됨으로서 학교체육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도데(唐手)가 학교체육화 됨으로서 교습의 스타일과 수련 방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가라데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필살기가 아니게 되어
위험한 기술은 대폭 삭제되었고 고류 오키나와데의 특성이 소멸되어 간 것이다.

더불어 오키나와데의 명인들이 대거 일본 본도에 진출하여 가라데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극진으로 대표되는 지찐가라데(실전공수,實戰空手) 이전의 가라데 유파, 그리고 고류(古流)
오키나와데와도 구분되는,일본에서 보급되고 교습된 가라데를 일단 전통가라데라고 부르기로 한다.
전통 가라데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그것이 공인된 용어인지는 필자는 잘 모른다.

일본의 전통가라데는 수백가지 유파가 있으나 크게 세 그룹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토스류(사주류,絲洲流), 고쥬류(강유류,剛柔流), 우에치류(상지류,上地流)가 그것이다. 다만
이토스류는 다시 쇼토칸(송도관,松濤館)과 시도류(사동류,絲東流)로 분류될 수 있지만 원형은
같다고 봐도 될 것이다. 각 유파별 특징과 형성 경위에 대해 알아보자.


쇼토칸(송도관,松濤館)

가라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송도(松濤) 후나고시 기찐(船越義珍,1868-1957))이 창시하였다.
송도는 서예가로도 활동하였던 후나고시의 호이다. 그의 고향 나하의 해안에 소나무 숲이
유명하고 바람이 불면 소나무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것에서 호를 소나무의 파도, 송도라 지어
졌다고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어릴 적 아자토 야스쯔네(安里安恒,1828-1906)로 부터 데를 전수 받았고 이후 또다른 스승인
이토스 야스쯔네(絲洲安恒,1831-1915)를 사사하게 된다. 아자토와 이토스는 마쓰무라 소콘 문하의
동문이고 계보상으로 슈리데가 되지만 이토스는 따로 마쓰무라 고사쿠로부터 도마리데를 배운 바가
있으므로 후나고시에게 도마리데의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후나고시는 슈리,나하,도마리의 모든
데의 특징을 아우르지만 쇼토칸의 특징은 그래도 빠르고 경쾌한 슈리데를 특징으로 하며 후에
이것은 태권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타일이 된다.

그의 유년기는 몰락한 무사 집안의 가난하고 병약한 불우한 것이었다. 학교 졸업후 공립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그 중에 자신의 도데(唐手)를 가르치게 된다. 마침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취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유도등 무술종목을 학교체육으로 도입하고 가라데도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쳐지게 된다. 시범단을 조직하여 오키나와 전역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행한 몇번의 시범은 일본에서 온 관리의 눈에 인상적으로 보여 그는 일본 본토로 진출할
기회를 얻는다. 1917년 최초로 본토에서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후 그는 카노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8)가 설립한 고도칸(강도관,講道館) 유도장의 한 켠에 가라데 클라스를 만들어 지도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상복 차림으로 수련하던 것을 유도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통일된 지금의
가라데 도복을 만들었고 띠의 색깔, 단(段)과 급(級)의 체계 역시 유도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혹자는 띠의 색깔을 말할 때 띠를 다른 색깔로 만드는 게 아니고 처음엔 백띠였던 것이 풀밭에서
오래 수련 하다보니 처음엔 땀에 절어 누렇게 됐다가 풀물이 들어 퍼렇게 된 다음 피와 땀이 말라
붙어 갈색이 되고 더욱 더 연륜이 쌓이면 검게 변한다고 하나 이는 터무니 없는 지어낸 이야기다.
(필자도 이걸 그대로 믿고 띠 색깔이 변하도록 일부러 빨지 않은 기억이 있다.) 혹은 띠 색깔이
일본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역시 근거 없는 얘기다. 벨트시스템은 수백년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 80년 전인 1923년에 카노 지고로가 만든 것이며 후나고시가
이것을 모방했을 뿐이다.

어쨌든 후나고시에 의해 현재의 가라데 도장의 모습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후나고시가 일본
에서 가라데를 가르치기 시작한 1920년대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적
인 것을 숨기고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복에 유도적 분위기를
도입했으며 시합의 방법도 검도의 것을 도입했다. 쇼토칸에서 일격의 슨도메(寸止)로 승부를
결정짓는 시합 룰을 만든 것은 검도의 영향이라고 말해진다. 빈손검도인 셈이다.

가타의 이름도 일본화 시켰다. 쿠샹쿠는 간쿠(관공)로, 나이판치는 데키(철기)로, 세이션은
한게츠(반월)로, 완슈는 엠피(연비)로, 친토는 간가쿠(암학)로 새로운 이름을 창안하여 붙였다.
더불어 오카나와어로 된 명칭을 비슷한 일본어 발음의 한자어로 표기하였다. 피난을 헤이안으로
읽고 평안(平安)으로 표기한 것처럼.

이후 후나고시 스타일은 빠르게 일본화 되어 갔다. 1922년에 문부성 주최 고무도 박람회에도
참가하였고 1924년 최초로 게이오(慶應)대학에 당수부를 만들고 이어 그 경쟁 대학인 와세다
(早稻田)대학 등으로 대학 당수부를 조직해 나갔다. 1934년 드디어 자기의 호를 따서 쇼토칸을
창립한다. 쇼토칸이 일본 본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로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당시 지식
계급인 대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친 것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한국의 유학생들이 이를 배움으로서
태권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쇼토칸 스타일은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일본 전통
가라데이지만 동시에 오키나와데의 특징이 많이 상실된 점도 있다.

참고로 가라데가 공수(空手)로 한자 표기가 통일된 것은1936년의 일이다. 최초로 가라데를 공수로
표기한 것은 후나고시의 동문인 하나기 쵸모(花城長茂,1869-1945)인데 1906년의 일이다. 이후
당수가 많이 쓰이고 간간히 공수라는 말도 쓰였지만 일본이 군국주의로 감에 따라 적국인 중국을
연상시키는 말 대신 공수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하나기와 강유류의 창시자인 미야기 쵸준
등이 공수로 통일한 것이다. 唐手든 空手든 발음은 가라데이다.

공수의 공(空)자로 무슨 불교와의 연관성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복건성의 남소림사(소림사는 청조 초기에 만주족 정권의 공격을 받아 하남성 등정시의 북소림과
복건성의 남소림 두 곳으로 나뉘게 된다)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와 공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토스 역시 가라데는 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제자인 후나고시가 1956년에
저술한 자서전 공수도일로(空手道一路, karatedo: my way of life)에 보면 공(空)의 개념을
불교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수란 empty hand 로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과 일맥
상통한다고... 상당한 인텔리였던 후나고시까지도 죽기 한 해 전 88세 때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그렇게 썼고 또 그렇게 알고 죽었을 것이다. 근거없는 신비주의는 이처럼 도취적이다.


시도류(사동류,絲東流)

시도류는 마부니 겐와(摩文仁賢和,1889-1952)가 창시하였다. 슈리의 무사집안 출신으로 13세
되는 1902년 부터 이토스 야스쯔네 문하에서 슈리데 도마리데를 배우고 친구인 미야기 쵸준의
권유로 1909년부터 히가오나 간료에게서 나하데를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스승 히가오나의 스승인
아라가키 세이쇼로부터 오키나와 고부도(古武道-창,봉, 흔히 쌍절곤이라고 하는 눈차쿠등이 있다)
를 직접 배웠다. 이토스 도장의 2대 사범을 역임하였다.

고교 졸업, 군 제대 후 경찰에 투신하여 1918년 경 후나고시,미야기 쵸준등과 당수연구회를
발족시켜 가라데를 연구,보급하며 구니왕자.가토왕자가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이름자 즉 이토스(사주,絲洲)의 사(絲)자와 히가오나(동은납,東恩納)의
동(東)자를 한 자 씩 따고 이를 그대로 음독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시도류(사동류,絲東流)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사동류는 류파의 이름이고 단체의 명칭은 여전히 이토스카이(사주회,絲洲會)
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니혼 가라데도 이토스카이 (日本空手道 絲洲會)이며 가라데 역사에서
이토스의 비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시도류는 쇼토칸과 더불어 이토스류로 통칭되고 있지만 일본화 되어버린 쇼토칸에 비해서
오키나와데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고쥬류(강유류,剛柔流)

고쥬류와 후술(後術)하는 우에치류는 앞서 말한 쇼토칸이나 시도류와는 형성 경위와 기술적 특성이
많이 다르다. 그것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 남파 권법의 영향이다. 이 두 유파의 창시자들은
본인이 직접 중국에 가서 중국 남권을 배웠고 오키나와데로 변하기 전의 중국 권법을 직접 체득
한 것이다.

고쥬류는 미야기 쵸준(宮城長順,1888-1953)에 의해 창시되었다. 오키나와의 관료계급 출신의
숙부에게 입양되어 부유한 환경에서 데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 숙부는 상선을
가지고 중국과 무역에 종사하여 그는 중국을 왕래하는데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이다.

14세 되던 1902년 당시 나하데의 명인이던 히가오나 문하에 들어가 나하데를 수련하고 발군의
실력을 보여 히가오나의 우찌데시(內弟子)가 된다. 1905년 중국 복건성을 방문하여 남파권법을
배우고 이후 두차례 더 중국을 방문하여 약 3년간 체류한다.

중국에서 돌아와 고향 나하의 지방 경찰국의 무술사범을 역임하였고 나하 상업고등학교에서도
가르쳤다. 한때 이토스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이토스는 그가 이미 나하데를 마스터 했
다고 생각하여 제자로 거두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몇 가지 시연을 해 보이고 이론적 부분에
조언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가 1940년에 창안한 겍사이 가타가 이토스의 슈리데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 본토에 자주 여행하며 가라데 보급에 진력하여 교토대학과 간사이 대학에서 당수부를
만들어 가르치고 제자들을 배출한다. 1933년 가라데로는 최초로 일본 부도쿠카이(무덕회,武德會)
에 가입한다.

고쥬류는 그 명칭부터 다분히 중국에서 출발한다. 1930년 일본본토에서 당수를 보급하고 있던
그의 수제자가 다른 유파로 부터 그 스타일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하고 이 사실을
스승에게 보고한다. 데, 나하데, 또는 도데(唐手)는 유파의 명칭이라기엔 좀 곤란했던 것 같다.

제자의 보고를 받고 미야기 초준은 며칠 고심끝에 자기 스타일을 고쥬류(강유류,剛柔流)라
명명한다. 강유(剛柔)는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의 권법편에 나오는 요결의 한
구절이다.

인심동천지(人心同天地) - 사람의 마음은 천지와 같고
혈맥사일월(血脈似日月) - 혈맥은 일월처럼 순환된다.
*법강유탄토(法剛柔呑吐) - 호흡은 강하고 유하게 삼키고 뱉어야 하며
신수시응변(身隨時應變) - 운신은 시간과 기회에 변화무쌍하고 (후략)...

*참고로 무비지는 모원의가 1621년에 편찬한 19책 240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군사 서적으로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표준이 된
책이다.

이처럼 강유류는 무겁고 느리며 호흡을 강조하는 중국 남파권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강유류는 가타를 수련할 때 소리내어 호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산찐(三戰,삼전)을 강조
하는 것 역시 남권의 영향으로 보인다. 미야기 쵸준의 제자 중 한국인 소네이쥬(조형주, 1907-?)
가 있었고 그와 함께 최영의가 강유류를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우에치류(상지류,上地流)

우에치류는 우에치 간분(上地完英,1877-1948)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19세 때 중국 복건성으로 건너가 13년 간 체류함으로써 청년기를 중국에서 보내는
것이다. 어릴 때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몰락한 무사 집안으로 농사를 짓고 살던 그의 부친
우에치 간도쿠로부터 도데와 오키나와 고부도(古武道)를 고루 수련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오키나와데의 계보와 연결시키기가 좀 애매하다.

중국에 건너간 그는 쓰시와(1874-1926,추치우,등으로 부르기도 한다.)라는 중국인의 도장에서
수련한다. 쓰시와는 강력한 남소림권과 부드러운 아이션켄(?)이라는 스타일을 합쳐 판가이온
(半剛穩 쯤으로 쓰여지는지 모르지만 반은 강하고 반은 부드럽다는 뜻)이라는 스타일을 만들어
도장겸 약국을 개설하여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우에치 간분은 특히 산찐(삼전,三戰)을 강조하여 첫 3년간 오직 산찐형만 연습했다고 하며 후에도 자주
"삼전에 모든 것이 있다" 라고 말하곤 했다. 중국에서 체류한 13년간 그는 산찐,세이션,산세이류
의 단 세가지 형만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콩깍지를 단지에 담아 관수단련을 하여 동료 제자들이
신기해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술 수업과 의학을 함께 공부했다.

1904년 27세 때 쓰시와의 조수가 되고 1907년에 남경에서 자기 도장을 개설한다. 1910년 도장
문을 닫고 오키나와로 돌아 오지만 그는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시 오키나와는 경제난이
심각해져 그는 직장을 얻기위해 47세가 되던 1924년 일본 본토로 건너간다. 관서지방의 한
섬유공장 노동자로 취업을 하고 1925년이 되어서야 자기의 도장을 개설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지 15년 만의 일이며 판가이온이라는 중국권법이 우에치류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우에치류는 가장 중국적인 가라데라 할 수 있으며 그의 아들인 우에치 가네이가 이를 이어받아
일본 전역으로 보급시킨다.


7.극진 가라데

아마 인류 무술사에 있어서 최영의(崔永宜,1923-1994, 대산배달, 大山倍達=오오야마 마쓰다쓰)
라는 인물을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검성(劒聖) 미야모토 무사시와
비견되어 무신(武神)으로까지 일컬어지며 이러한 평가는 전 세계인, 심지어 타류 무술가들에게
도 비슷하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존재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가에 흥미를 가졌던, 그래서 강함의
극한에 도전하기를 즐겼던 인물이며 그에 대한 평가도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강함이다.

대개 무술계에는 검증되지 않은 전설이 난무한다. 소림의 달마, 무당의 장삼봉, 당랑권의 왕랑
이나 이서문, 영춘권의 엄영춘, 무영각의 황비홍, 정무문의 곽원갑등등 믿지 못할, 검증할 수
없는 전설이 많고 그들의 실력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흔히 이서문과 마이크 타이슨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시라소니와 누가 붙으면? 이러한 유치찬란한 논쟁이 종식되지 않는 이유는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논자(論者)도 최영의에 대해서만은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로 강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싸움으로써 자신의 강함을 실증했고 그의 싸움은 기자와 관중이 지켜보는 데서 이루어졌으며
싸움의 장면은 사진과 필름으로 보존되었다. 결국 인간 가운데는 적수가 없어서 짐승과 싸우기
도했던 딱하게도 괴퍅한 인물이 그였다.

극진 가라데의 역사와 연혁은 너무 잘 알려진 얘기라 쓸 내용이 별로 없다. 다만 최영의에 의해
가라데라는 무술이 실전의 장으로 내 던져 졌고 그 싸움을 통해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극진에 영향을 준 수많은 타류 무술이 있지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에타이다.

무에타이 역시 강함을 제 1의로 하는 무술이고 종종 타류 시합을 위해 세계의 강자를 초청하는데
가라데가들도 초청받아 무참히 쓰러진다. 1954년 방콕의 룸피니 스타디움에서 당시 역대 최강으로
평가 받던 블랙코브라와 최영의의 대결이 성사되고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시합은 1회 2분 12초 만에 블랙 코브라의 턱과 갈비뼈가 부서짐으로서 끝났지만 이 경기에서
최영의는 적잖이 놀란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몇년 전에 행한 미 대륙 격투 여행에서
자기 몸집의 두 배 가까이 되는 헤비급의 레슬러,복서들을 모조리 들것에 실어 내보낸 최영의
로서는 자기와 비슷한 체격의 이 챔피언의 격렬한 발차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무에타이의 기술 중 쓸 만 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트레이닝 방법론을 도입한다. 현재 극진의
로우킥, 회초리로 감아돌 듯 차 넣는 로우킥은 무에타이의 영향으로 보인다. 트레이닝 방법도
미트 치기, 펀칭볼 등을 도입한다. 그 이전에는 가라데의 수련도구는 마키와라 일색이었다.

이후 극진과 무에타이간의 시합은 계속된다. 1964년 제자 구로사키 겐지가 동료 공수가 두 명과
함께 벌인 3대 3 시합에서 2대 1로 이겼지만 주장격인 본인이 KO 패하여 스타일을 구기고 그는
무에타이와 극진을 합하여 킥 복싱이라는 새로운 무술을 창시한다. 그의 네덜란드 제자들이
메지로, 보스, 차쿠리키 도장, 세칭 킥복싱의 3대 명문이라는 이들 도장을 세우고 그 출신들이
지금 K-1 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1974년 소에노 요시지가 타이 전역을 돌며 이름난 무에타이 선수들을 모조리 KO로 제압하고
어둠의 무에타이 제왕이라는 레이바에게 도전하지만 레이바가 시합 전 죽음으로써 대결은 무산
된다. 소에노 역시 무에타이에 영향받아 그래플링까지 허용하는 자신의 유파 시도카이칸
(사도회관,士道會館)을 창립한다.

필자가 대 무에타이 전적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업적이기 때문이다. 그 시합은
적지에서, 자신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심판과 관중 앞에서, 링이라는 생소한 환경하에서,
글러브를 끼고, 무에타이 룰로 무에타이 선수와 시합을 해서 이긴 것이다. 지금까지 극진을
제외하고는 룸피니나 라차담넨에서 무에타이를 이긴 입식 무술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현재 전세계 입식 무술은 어떤 형태든 극진과 무에타이와 관계가 있다. 유력한 경쟁 상대가
서로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극진은 이후 약간의 침체기가 있었으나
2대 관장으로 취임한 문장규(文章圭= 松井章圭,마쓰이 쇼케이 혹은 마쓰이 아케요시) 의 문화
교류 선언으로 제 2 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8. 태권도

태권도의 역사와 형성 경위에 대해서는 자유게시판 1866번 글에서 최강백띠 先生이 일목 요연
하게 정리한 바 있다. 모두 정확한 사실을 잘 정리한 글이므로 일독을 권한다. 몇 가지만
첨언하면,

태권도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라데의 스타일은 쇼토칸으로 보인다. 이원국의 청도관,
노병직의 송무관 등 명칭부터 송도관의 그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청도관의 도 자(字)를
흔히 쓰이는 道 로 쓰지않고 濤 자로 쓰는지 이유는 말 안해도 알 것 같다.

요즘 김운용 문제가 시끄럽고 대태협도 진흙탕이지만 이는 WTF만의 문제가 아니다. ITF역시
최홍희 사후 후계문제니 뭐니 말들이 많다. 태권도의 역사 날조나 정통성 시비는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세계에 내 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문화 컨텐츠인 태권도를 발전시키는 것은
국익 차원에서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여 현명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태권도를
하지 않는 사람도 관심을 가질 일이다. 이제 태권도는 태권도인 만의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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