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무예이야기...??? 오공 선생 경력에 대한 서술의 변천과 의혹
###1. 1890년전후 출생이라면 구한말 무관을 지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반 군인이 아닌 무관이라면, 그것도 엘리트 군인들이 익히고 그리 녹녹하지 않은 무예인 십팔기를 익힌 무관이라면 적어도 10대의 나이(15~17세)는 이른 나이라 생각된다. 이것도 1905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의 나이이다. 십팔기를 수련하고 있는 박금수님의 논문에는 임오군란의 여파로 훈련도감이 폐지됨으로써 공식적인 전승기관이 살아졌다고 보고 있는데 이 시기는 1880년대이다.
구한말 구식병기의 군대는 사실상 을미개혁을 거치면서 신식군대 중심의 군제로 편제가 바뀌었으며 그전의 임오군란 전부터 구식군대의 직업군인들은 규모가 축소되거나 대우가 나빠져서 결국 상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왕조 정부가 도성에서 근무하는 군병들의 쪼들리는 살림을 조금이라도 펴 주기 위해 짜낸 묘안은 그들에게 ‘장사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국가의 배려 덕분에 보수로 받은 군포軍布― 당시 훈련도감 군인들이 받은 군포는 최상급 품질을 자랑했다 ― 를 바로 내다 팔거나 처자를 시켜 띠, 대님, 댕기 등으로 가공하게 해서는 내다 팔았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또 비슷한 일을 찾아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법. 이윽고 군인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취급하면서 본격적인 장사꾼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의 군제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가 아니라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에 입각하여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우용 저 - ''서울은 깊다'' 에서]
따라서 십팔기를 수련할 수 있었던 구식 군대의 무관은 1890년대에는 없었다고 볼 것이며, 신진무관의 경우는 대부분 일본인 교관의 지도하에서 신식군대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미 총기로 병기가 바뀌었고 일본인이 교관이었으므로 신식군대의 무관이 십팔기를 배웠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오공선생이 십팔기등을 다루는 구식 군대의 무관이었다면 적어도 1860년대에 출생했어야 타당할 것이다. [박금수님의 근거에 따른 계산으로 볼 때]
을미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의병들의 무기도 구식 병장기가 아닌 조총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당시 의병들을 인터뷰했던 외국인은 전하고 있는 바 이 당시 의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군관들도 신식군대 출신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해범 선생의 기억에도 오공선생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고 추측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의병으로 둔갑한다. - EBS다큐에서
3. 더구나[십팔기 보존회]의 "해범선생과 십팔기"에는 - "구한말의 무관이었던 오공 윤명덕 선생님에게서 "
해범 선생도 추측만 하였던 것을 여기서는 사실로 발전시켜 올리고 있다. 왜?
이에 더 나아가 Naver 카페인 [내가무술 수련자 모임 무예지]에 [독심흑랑]님이 올린 글에는
"우리 단체는 구한말 오공 윤명덕 선생님께 직접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들을 문중에서 직접 사사받으신 해범 선생에게서" 라고 적고 있다. 해범선생은 심우성선생을 만나기 전에는 무예도보통지로 배운 적이 없었고 나중에 그 책을 보았을 때 십팔기의 전모를 확인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과 상치되는 부분이다.
언듯 보면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주장들간의 갭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 구식병기의 군대는 사실상 을미개혁을 거치면서 신식군대 중심의 군제로 편제가 바뀌었으며 그전의 임오군란 전부터 구식군대의 직업군인들은 규모가 축소되거나 대우가 나빠져서 결국 상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왕조 정부가 도성에서 근무하는 군병들의 쪼들리는 살림을 조금이라도 펴 주기 위해 짜낸 묘안은 그들에게 ‘장사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국가의 배려 덕분에 보수로 받은 군포軍布― 당시 훈련도감 군인들이 받은 군포는 최상급 품질을 자랑했다 ― 를 바로 내다 팔거나 처자를 시켜 띠, 대님, 댕기 등으로 가공하게 해서는 내다 팔았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또 비슷한 일을 찾아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법. 이윽고 군인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취급하면서 본격적인 장사꾼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의 군제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가 아니라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에 입각하여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우용 저 - ''서울은 깊다'' 에서]
따라서 십팔기를 수련할 수 있었던 구식 군대의 무관은 1890년대에는 없었다고 볼 것이며, 신진무관의 경우는 대부분 일본인 교관의 지도하에서 신식군대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미 총기로 병기가 바뀌었고 일본인이 교관이었으므로 신식군대의 무관이 십팔기를 배웠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오공선생이 십팔기등을 다루는 구식 군대의 무관이었다면 적어도 1860년대에 출생했어야 타당할 것이다. [박금수님의 근거에 따른 계산으로 볼 때]
을미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의병들의 무기도 구식 병장기가 아닌 조총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당시 의병들을 인터뷰했던 외국인은 전하고 있는 바 이 당시 의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군관들도 신식군대 출신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해범 선생의 기억에도 오공선생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고 추측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의병으로 둔갑한다. - EBS다큐에서
3. 더구나[십팔기 보존회]의 "해범선생과 십팔기"에는 - "구한말의 무관이었던 오공 윤명덕 선생님에게서 "
해범 선생도 추측만 하였던 것을 여기서는 사실로 발전시켜 올리고 있다. 왜?
이에 더 나아가 Naver 카페인 [내가무술 수련자 모임 무예지]에 [독심흑랑]님이 올린 글에는
"우리 단체는 구한말 오공 윤명덕 선생님께 직접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들을 문중에서 직접 사사받으신 해범 선생에게서" 라고 적고 있다. 해범선생은 심우성선생을 만나기 전에는 무예도보통지로 배운 적이 없었고 나중에 그 책을 보았을 때 십팔기의 전모를 확인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과 상치되는 부분이다.
언듯 보면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주장들간의 갭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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