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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비판(2): 가라데의 조상은 고려무사이다

김용옥은 그의 저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에서 가라데의 기원에 대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권법이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자내의 풍속, 습관, 요구에 의하여 변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정설일 확률이 높다”면서 그 근거로 다음의 세가지 설을 들었다.

① 삼십육성(三十六姓)수입설
② 경장(慶長)수입설
③ 대도필기(大島筆記)설

위에서 삼십육성이라 함은 명나라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해온 사람들을 말한다. 오키나와의 찰도(1321-1395) 왕은 즉위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외 교류를 시작했다. 몽골과 고려가 망하고 명나라와 조선이 건국될 무렵이었다. 오키나와의 지배세력은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피해 오키나와로 망명한 삼별초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에 원나라와는 전혀 교역을 하지 않았고, 고려와는 조선 건국 직전에 교류를 시작했다.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자, 찰도 왕은 명나라에 청하여 항해술이 뛰어난 사람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1392년 복건 사람들이 이주하여 두 나라를 왕래하면서 조공의 일을 맡아보게 된다. 그런데 이 삼십육성이란 서른 여섯 명의 다른 성씨가 아니라 복건성 민강(閩江) 하류에 살던 주민의 칭호였다. 몇 명이 이주했는지 알려진 바 없지만, 이들은 오키나와 최대의 항구도시인 나하(那覇)에서 집단촌을 이루고 무역에 종사했다. 오키나와는 무사를 청한 것이 아니라 뱃사람을 청했다. 거친 항해를 하려면 신체는 건장했을 것이나 이들은 분명 무술집단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경장수입설이란 1609년 오키나와가 사쓰마에 의하여 점령당하면서 모든 무인과 민간인들이 무장해제를 당했고, 점령군들이 가라데를 전했다는 것이다. 이 때가 당시 일본 연호로 경장(慶長) 14년이므로 경장수입설이라고 부른다. 이 설의 설득력은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도필기설은 1762년 일본 사쓰마로 공물을 바치러 가던 오키나와 배가 풍랑을 만나 오오시마 섬에 표류하는데, 이 섬의 유지였던 도베 조키의 도움을 받는다. 무인계급이었던 배친 쇼히라는 거기 머무는 동안 오키나와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도베에게 해주었고, 도베가 이를 받아 적어 ‘대도필기(大島筆記)’라는 책을 남기게 된다. 이 책의 제3권에 이르기를, 6년 전(1756년) 오키나와에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시종무관으로 따라온 쿵샹춘(公相君, 공상군)이라는 사람이 조합술(組合術)라는 주먹 기술을 보여주고 이를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오키나와의 무술에 대한 최고(最古)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가라데에 공상군이라는 품새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을 주고 있지만, 공직에 있는 무인이 다른 나라에 가서 선진무술을 전수하고 다녀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당시 청나라 고종이 관대했을까? 그리고 이 때는 오키나와가 사쓰마에게 무력으로 복속되어 있는 상태였고, 사쓰마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상태였는데, 오키나와 무인(배친이라는 칭호는 전통적인 무인집안임)이 침략군인 사쓰마 사람에게 무술 배운 사실을 자랑하고도 모자라 책으로 펴내게 했을까? 자기 민족은 물론이고 사쓰마는 이런 일에 그토록 관대했을까? 상식적으로 청나라, 일본, 오키나와 세 나라 지배자에게 두루 용납이 안될 일이 버젓이 기록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러나, 위에 나온 세가지 사례가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삼십육성수입설 보다 무려 100년 전에 고려 최강의 무사집단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였고, 이들이 새로운 왕조와 혁명적인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고 증명만 할 수 있다면 세가지 가설은 아무런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필자가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는 막연한 가설이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 현지 학자들의 증언과 논저, 어원, 신화, 족보 분석 등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하게 된다.

연구의 한 결과로, 오키나와를 통일하여 29대를 이은 상씨왕조의 상씨(尙氏)는 충청도의 목천을 본관으로 한다. 이 상씨가 중국에서 온 바 없다는 것은 ‘명사(明史)’가 증명하며, 일본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은 콜롬비아 대학에 재직중인 일본인 교수가 증명한다.

위에 나온 세가지 설을 오키나와의 주요 연표에 대입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① 1273년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영조 왕조 수립
② 1372년 찰도 왕이 중국(명나라)과 최초로 교류하기 시작
③ 1389년 찰도 왕이 고려와 최초로 교류하기 시작
④ 1392년 찰도 왕의 요청으로 명나라 복건성의 뱃사람 삼십육성이 오키나와로 이주 (삼십육성수입설)
⑤ 1429년 상파지 왕에 의해 오키나와 통일
⑥ 1609년 사쓰마가 오키나와를 침공하여 무장해제를 하면서 맨손무예 전수 (경장수입설)
⑦ 1756년 청나라 사신 공상군이 오키나와에 무술 전수 (대도필기설)

삼별초는 삼십육성 보다 119년, 사쓰마 보다 336년, 공상군보다 무려 483년 전에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그 규모도 비교할 수 없다. 필자는 기록을 근거로 보아 약 1천여 척의 함선에 최소 2만여 명의 삼별초 군단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고 추정하며, 이들이 당시만 해도 신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던 오키나와에 구스쿠 시대를 개척하고, 해상왕국으로 꽃을 피운 주체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가라데의 기원과 관련하여 이제부터는 다음의 두 가지 설로 나뉘어 공방을 벌이게 될 것이다.

① 중국에서 건너온 권법이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자내의 풍속, 습관, 요구에 의하여 변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 (김용옥)

② 고려에서 건너온 무예가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일본 사쓰마의 침공과 강압적인 무장해제로 맨손무예를 발전시키고 은밀히 전수시킨 것 (필자)

자, 위 두 가지 중에서 독자께서는 어디에 거시겠는가?
나가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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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3

익명 2010.09.19
반대입니다.
익명 2010.09.19
말도안되는 필자 개인의 논리와 가설문학을 무식한 제가 또 말을한들 학술적 한계에 미치지못해 표현의 차이로 이만 실례합니다. 참고로 무식한 필자가 배운 한계론은 - 우리민족은 예를 중시하여 끝에 예자를 삽입하여 무예, 무술이라 전하였다. - 중국은 권법 검법 등으로 표기했다 전해지며 -. 일본은 도를 숭상하여 일본 무술은 맨끝에 도를 표기한것이 중요한 근거, 유도.검도. 가라데도 즉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의 침략에 문화를 상실하며 일본 문맥을 인용한 도자를 맨끝에 지금도 사용하고있다고 생각함,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 무인들의 한계가 예나 지금이나 실기위주를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실기밖에 모르는 필자의 한계를 이해바라며 아직도 우리는 벽화의 그림이나 형상화 검무등 하나의 이론적 가살을 인용하여 응용 창작하고있는것이 한계이며 중요한 역사적 자료하나 없는것이 우리의 현실이겠지요, 특히 고분벽화속에 등장하는 그림들도 당시를 회상할뿐 모든 자료하나 없는데 강탕된건지 무지한건지 모두 역사를 초론할뿐 누구도 이를 증명할수없는 것이 현실리고 가설을 인용함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실에 존재하는 한권의 책이 무에도보통지라 할지라도 이것 또한 한자를 제대로 풀수없어 그림을 해석한 창작 무술 재현일뿐 어찌 그 재현이 맞을수 있겟습니까? ->1
익명 2010.09.19
통지에 따르면 우리고유의 무예론에 등장하는 중요한 단서가 화랑도와 풍월도가 등장하는데 저는 태권도를 말하려면 화랑도와 풍월도를 연구 해석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화랑도 속에 권법 병기술. 족술. 검술이 등재하니까요, 다른 대학 교수님 수준의 글을 저는 게제할수없지만 저는 글로 거짓을 고할수는 없고 실기로 진실을 말할수는 있습니다.-->2
익명 2010.09.19
필자입니다. 오늘도 좋은 의견 주신 무한 님께 (1) 조선 선조 때 명 재상이던 오성과 한음에 대해 아실 겁니다. 둘이서 병조판서를 번갈아 했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술의 재정비가 다급해졌습니다. 한음 이덕형은 왕에게 고합니다. 조선군은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를 교재로 수련하고 있으나 교관조차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훈련은 형식으로 흐르고 있으니 밥 주는 게 아깝다고요. 철처하게 한국 무인의 체질과 한국의 지형지세에 맞는 무술로 재편해야 한다고요. 이 때부터 본격적인 무술 연구가 시작됩니다. 이후 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종류의 무예서가 나옵니다만 완전히 조선의 무예서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익명 2010.09.19
필자입니다. 오늘도 좋은 의견 주신 무한 님께 (2) 마침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창술, 검술, 권법에서 열 여덟 가지 종목을 추려 십팔기라 하였고, 여기에 그의 아들 정조대왕이 말타기와 관련된 기술 여섯 종목을 더하여 ‘무예도보통지’를 펴냅니다. 정조는 중국 전문가인 실학자 두 명과 창검의 고수인 백동수에게 이 책의 저술을 맡겼습니다. 이 책은 병술이나 병법이 아니라 무예서입니다. 추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실전 종목들이지요. 중국식 어휘를 쓴 단점이 있긴 하지만 조선지형과 조선무인들에 맞는 것만 추렸습니다. 왜검 같은 일본무술도 들어가 있습니다. 실학은 그 무술이 어디서 왔던 관계없이 현실에 맞다면 철처히 현지화시켜 받아들이자는 사상입니다. 무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까 봐 이론을 배제한 대신 친절한 그림과 해설을 곁들였고, 한글(언문)으로도 발간하여 누구나 읽기 쉽게 꾸몄습니다. 먼 후일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았으나 한국화 후에 세계화시킨 것처럼 조선무예도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나 누구도 이를 중국무술이나 일본무도라 할 수 없습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철저의 조선의 무예서인 것입니다.
익명 2010.09.19
필자입니다. 오늘도 좋은 의견 주신 무한 님께 (3) 태권도는 십팔기 종목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초기 5대관 관장 중에서 한중일 삼국의 무술에 두루 정통한 사람은 오직 윤병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예에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권법은 물론 월도와 봉술을 가르쳤고, 자신의 시범을 십팔기 연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납북되어 격술 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격술을 보면 그가 가르쳤던 십팔기의 실전성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 봅니다. 황기 관장은 가라데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해방 후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으며, 그의 이론은 무예도보통지를 근거로 성립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북한과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났습니다. 한국에 남은 세 관장은 오직 가라데만 배운 사람입니다. 이들의 제자들이 태권도계를 이끌어 가게 되었으므로 배운 바 없는 십팔기나 무예도보통지와는 거리를 두게 된 것이죠. 태권도가 이만큼 성장했으므로, 이제 무예도보통지가 태권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가 필요합니다. 권법보만 보고 태권도 품새와 연결시키기 힘들다고 덮어버리지 말고, 종합적인 연구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익명 2010.09.19
필자입니다. 오늘도 좋은 의견 주신 무한 님께 (4) 중국은 무술, 조선은 무예, 일본은 무도를 선호했지만 어느 표현을 쓰던 개인적인 선호에 달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화랑에 도(道)를 붙인 기록은 역사에 없으며 현대에 와서 누군가 만들어 낸 말입니다. 다만 풍월도(風月道)라는 말은 있었지만 무술이나 무예, 또는 무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상입니다. 화랑도 속에 권법 병기술. 족술. 검술이 등재한다는 님의 의견은 제 연구결과와는 다릅니다. 이 토론마당에 올린 “화랑의 진실”을 읽어보시고 의견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9
오랜만에 들러보았습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연이어 힘든 글 올려주시는 수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제한된 넷상에서만 만날 수 있음이 유감입니다.근자에는 저도 대륙속 여기저기를 다니며 역사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만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보다 성숙되고 깊이있는 논의의 장이 계속되길 기대해봅니다....
익명 2010.09.20
박종한 님께,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중국에 계시다면 제게 연락 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제 이메일은 dannybboy@hanmail.net 입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22
필자님의 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일부 이해가 않되는 부분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오키나와의 지배세력은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피해 오키나와로 망명한 삼별초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에 ~~~~필자는 기록을 근거로 보아 약 1천여 척의 함선에 최소 2만여 명의 삼별초 군단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고 추정하며, (중략) <---- 이 부분에서 1천여척의 함선과 2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린 군단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는 부분은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고려에는 얼마나 많은 함선이 있다는 애기입니까? 또한 1천여척의 함선을 가지고 후퇴를 한다는 것과 1천여척에 2만 여명이면, 함 선 한 대당20명 정도 밖이 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그리고 20명 이상의 인원이 승선했다고 치면 군사의 숫자는 훨씬 많았고, 그 정도의 인원이라면 고려의 지형지세로으로 보아 충분히 싸울 수있는 인원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이 정도의 대규모인원이 이동을 했는 데 여몽연합군이 추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필자님의 견해는 어떠한지요?
익명 2010.09.22
② 고려에서 건너온 무예가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일본 사쓰마의 침공과 강압적인 무장해제로 맨손무예를 발전시키고 은밀히 전수시킨 것 (필자) <----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은 어불 성설입니다. ---->⑥ 1609년 사쓰마가 오키나와를 침공하여 무장해제를 하면서 맨손무예 전수 (경장수입설) <---- 침력자가 피해국에 무기을 몰수 하는 대신 맨손 무술을 가르쳤다? ㅎㅎㅎ~~~,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기록은 본 것이 기억납니다. 오키나와의 몰락이후 오키나와의 평민이 아닌 비밀단체가 무기를 가진 본토인에 대항하기 위해 맨손 무술을 수련했다는 기록을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 데, 책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필자님의 말처럼 오키나와에는 그 이전부터 전해 받은 무술이 있었습니다. 또한 공수의 인사법 또한 관심을 가져 보심도 좋을 듯합니다. 필자님의 연구에 도움이 될까하여 그냥 참고로 올려봅니다 .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23
필자입니다. 많은 공부를 하신 hero999usa 님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제 의견은, (1) 김&#48225;경-배중손은 타협을 했고, 전쟁은 시늉이었습니다. (2) 식민지 오키나와는일본에 대항하여 당연히 그렇게라도 싸웠을 것입니다. (3) 공수의 인사법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해보겠습니다만, 우선은 중국풍은 아니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10.20
확실하게 규명되어야할 쟁점, 두가지는? ① 중국에서 건너온 권법이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자내의 풍속, 습관, 요구에 의하여 변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 (김용옥) ② 고려에서 건너온 무예가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일본 사쓰마의 침공과 강압적인 무장해제로 맨손무예를 발전시키고 은밀히 전수시킨 것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