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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비판(1): 태권도가 오로지 가라데에서 왔다고?

도올 김용옥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을 통하여 태권도가 철저히 가라데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필자는 그의 책을 숙독하고 난 후, 그가 몇 가지 점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면서 전체적인 논지를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갔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그는 병술과 무술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요즘 마샬아트(martial art)라고 부르는 것을 단순히 병술의 일부로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병술과 독립된 전통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현대 개념의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군이라는 집단에서 수련되던 전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병술과 무술이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어떤 맨손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병장기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가 병술이라는 것을 지휘관의 전략이나 전술이라고 볼지라도 무술은 결국 병술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근현대의 마샬아트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지배자에 의한 무장해제나 금무정책이 있었고, 칼이 아니라 총이라는 신무기의 위협이 있었다. 무장해제를 당하여 쫓겨난 군인들이 맨손으로 무술을 수련하고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아무런 무기없이 산속에서 수련한 것은 아니었다.

가라데만 하더라도 오키나와의 병권을 쥐고 군사를 훈련시키던 장군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며, 일본에 복속된 이후에 평민으로 격하된 무인들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자 일반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1906년 경의 일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사설군대의 일원이었으나 메이지유신 후에 단행된 무장해제로 인하여 일반에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무술은 여러 왕조마다 민간에 대하여 시행된 금무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한국에서는 구한말 일본에 의하여 군대가 해산될 때 까지만 해도 전군에서 십팔기와 권법이 수련되고 있었다. 이미 발달된 총포가 그들을 겨누고 있었으므로 재래식 무기는 지배자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무인들이 맨손을 가지고 어떤 예술을 만들어내든 상관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또, 겨루기의 성공사례들이 품새로 정형화된 것이라 보았으나 이는 품새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품새의 최초의 성격에 대하여 그는 겨루기의 인스피레이션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것이 권위를 확보함에 따라 완벽함을 추구하는 심미적 과정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독창적인 품새를 만들고 수련하여 건강을 회복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면서 품새란 이처럼 우발적인 계기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것이 무술사의 보편원리의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품새를 이해할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부인과 제자 한 사람 정도라며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뿐이라는 등 품새를 매우 개인적이고 우발적이며, 추상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술은 미학이 아니라 물리학에 다가서 있는 행위이며, 추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급소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무술이기 때문이다. 품새는 우발적으로 생기거나 개인의 건강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종합무술의 기본을 망라한 기술이다. 행위의 과정에 병장기가 해체되어 있거나 손에서 잠시 내려와 있을 뿐이다. 건강을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은 개인 체조라고 해야 한다. 현대의 겨루기에는 맨손 입식 타격만 있으나, 품새에는 말타기, 활쏘기, 창칼쓰기는 물론이고 누르기, 조르기, 찌르기, 메치기 같은 종합무술의 원형이 고루 숨어 있다. 태권도 고수라면 누구나 이 말을 이해하리라 본다. 김용옥은 품새를 겨루기의 하위 개념으로 보았으나 사실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는 워낙 품새(투로) 위주로만 되어 있으면서 건강이나 심미에 치중한 중국무술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그것이 너무나도 오랜 금무정책에 의하여 겨루기를 잊어버린 결과임을 간과한 것 같다.

그러므로 품새는 겨루기의 상위개념인 것이다. 국기원이 발간한 태권도교본에는 품새의 정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품새가 곧 태권도이며, 기본동작은 품새를 위한 예비동작에 불과하고, 겨루기는 품새의 실전응용에서 지나지 않으며, 태권도 정신도 문자로 표현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철학 속에 있지 않고 품새에 의한 행동 속에서 찾아진다.” 결국, 품새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겨루기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겨루기는 잘 하는데 품새는 잘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태권도라는 경기의 ‘선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어디 가서 무술이나 무예를 한다고 자랑할 수는 없겠다. 현재의 태권도에서 겨루기와 품새의 기술력이 양립되지 않고 따로 논다면 분명 어디엔가 문제가 있고, 필자가 태권도 단체의 기술위원장이라면 반성하고 개선할 우선 과제라 하겠다.

또, 김용옥은 가라데의 기원에 대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권법이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자내의 풍속,습관,요구에 의하여 변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정설일 확률이 높다고 했으나, 그 확률은 틀렸다. 그는 고려 삼별초의 무사들이 집단적으로 건너가 오키나와 왕국을 건설하고 무예를 전파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확률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1273년, 오키나와가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1372년, 중국사람 공상군이 오키나와에 무술을 전했다는 해는 1756년이다. 따라서, 김용옥의 견해는 고려에서 건너간 무예가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수백 년 후에 중국사람이 투로 일부를 배워주고 갔을 수도 있다고 수정되어야 한다. 김용옥은 이런 가설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다. 가라데는 중국의 도인법 스타일에서 유래하는 양생이나 건강 혹은 몸의 미학과 관련된 한가로운 기예가 아니라 사쓰마의 가혹한 학정에 시달리는 오키나와 인민의 자구의 처절한 투쟁의 일환으로서 발전된 장구한 전통을 지닌 피압박적인 비전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가라데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 자신이 없어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김용옥은 또 조선의 ‘무예도보통지’가 어디까지나 병술의 책이지 무술의 책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서 한국에서는 자생적인 무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개화했다는 오류를 설파하고 있다. 이순신을 병술지략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사로 구분하여 단정한 후에 무술은 조선에서 나온 바 없고,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펴고 있다.‘무예도보통지’가 세계에서도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유례없는 무예서이며, 이것이 손자병법과 같은 전략전술 또는 진법이 아니라 실전적인 무술만으로 구성된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그에 따르면 병술은 군인, 즉 타율무장집단에 의하여 수련된 것이고, 무술은 일반, 즉 자율무장집단에 의하여 수련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의 전 종목을 수련하던 군인들이 일본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해산된 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자율적’으로 의병, 독립군, 광복군이 되어 집단적으로 무술을 수련하였다. 건강이나 심미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반청복명을 부르짖던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은 독립군이라 할 수 있고, 오키나와에서도 일본에 항거한 무인들의 항쟁은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율적인 무장집단이면서 현대의 무술을 전수한 주역들이었다.

결국 김용옥이 보는 무술이란 군대 같은 집단에서 수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건강, 취미, 인격, 몸의 아름다움 같은 극히 현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나머지 영화에 나오는 이소룡의 이미지와 이소룡이 죽은 후 미국인 부인에 의해 집필된 전기를 가지고 무술의 전반을 이해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김용옥은 태권도의 전통을 오로지 가라데에서 온 것으로 만 보고 있으나, 그는 가라데 조차도 고려의 수박에서 비롯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 태권도는 수박의 전통을 기본으로 하고, 현대에 와서 택견, 십팔기, 가라데의 형식이 골고루 가미되어 완성된 무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는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 그의 빛나는 예지와 통찰력, 그리고 학자로서의 양심을 내걸고 이런 책을 펴낸 것에 대하여 감탄을 하며 여러 번 읽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가 자신없어 하는 부분에 대하여 주목하고 그 것을 파헤쳐 보기로 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사실 오키나와데(가라데의 전신)의 정확한 모습에 관하여서는 일본 자체내에서도 탁월한 연구업적이 부재한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오키나와의 역사, 언어, 풍속, 노래, 무용의 종합적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 발언이 필자로 하여금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파고들게 한 계기가 되었고, 현지조사를 비롯한 일년이 넘는 연구 끝에 오키나와의 문명은 고려 삼별초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며, 가라데 또한 삼별초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댓글 37

익명 2010.09.13
찬성입니다.
익명 2010.09.13
반대입니다.
익명 2010.09.13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편들지 않을수 없겠냐만은 역사오류는 왜곡되지 말아야지요, 상기글을 게제하신 부의 필력은 대단하십니다 만 무술의 역사론은 그저 한국인의 입장에서 추상적 논리를 게제하시는 것이고 실제 역사론은 그와 반대임을 오랜 수련으로 깊이를 터득하고 배운 사람이면 왠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1
익명 2010.09.13
필자가 여기에서 아무리 부연 설명을 해본들 소용없고 가라데와 태권도를 배우면 금새 알수있지요, 그리고 해답은 달걀과 닭중 누가먼져 나왔냐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기원이 어찌한들 가라데라는 문구의 단어는 역사가 오래이며 당수도 공수도라고 불렀고 60년 이전에는 모두 당수도를 배운것이 가라데이고 60년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태권도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것을 이정도 문장력을 갖추신분이시면 아시잖나요? --2
익명 2010.09.13
요즘 해동 검도인들이 대한검도의 검도는 켄도 일본검도이니 劍道 명칭을 사용치 말라고 대모를 하는것과 비유되고 합기도가 일본말로 아이끼;도 인데 한국말(한자)로는 合氣道 인데 아무리 한국꺼라 왜쳐본들 일본에서 건너와 일본 발음이 한국발음으로 계승된것을 어찌 부정합니까? ----3
익명 2010.09.13
태권도에서는 수박->택견->태수도->태권도 이렇게 변천사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압니다만 과거 태권도 어원이 없던 60년대 이전에는 모두 당수도(공수도) 즉 가라데를 배우셨구여 그 기본기 연무형 + 을 그대로 명칭을 달리하여 보급하던중 현대의 태권도로 계승 변천되었고 형도 바꾸었지만 현대 공수도 가라데인들이 하는 맨처음 동작과 아직도 연무선은 같고 비슷한 동작의 모순점을 지우지못했으니 어쩔겁니까? 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예도보통지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시지요 , 정조왕때 18반을 기초했고 사도세자가 6기를 더하여 24반 무예가 완성되기 까지 우리 나라 무인만이 말들었나요? 중국 무인들과 같이 만들었나요? 네 중국 무인들과 같이 만든것이 무예도보통지 입니다. 그럼 중국은 어떠한 어원에 의해 가라데 즉 당수도를 배웠을까요? 즉 고대 인도에서 전래되었죠, 현대 불교가 걸어온 길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것 같이 무술도 그렇게 전해져 내려왔고 1500년 이전 중국을 당나라 라라 하였기에 당나라 당자와 손수도메 를 가르칠 길도 를 합하 당수도라 하여 한국에서 태권도 이전에 수련한것을 태권도 원로분들도 이미 인정하시고 수년전 부원장님으로 부터 본인도 당수도 가라데를 배워 태권도인이 되었다고 기술하셨는데 같은 국민으로 충정은 이해가 되지만 역사의 어원은 아직 깨닫지 못하신것 같아 댓글로 게제하니 궁금하시면 백문이 불여일견 아라듯이 한번 양쪽 기술을 배워보시지요? 필자도 그래도 모두 배워본 경험이있고 무술 수련 40년이 넘었네요!
익명 2010.09.13
필자입니다. 우선 좋은 의견 올려주신 무한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태권도에 대한 가라데의 영향을 전면 부정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태권도가 순 한국산이라는 식의 민족주의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태권도나 가라데는 문화의 일부로서 쌍방교류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40년 넘게 두 무술을 수련하신 경험으로 잘 아시겠으나 저는 어떤 무술도 수련해 본 적이 없는 인문학도입니다. 합기도와 가라데의 어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합기도는 야와라, 당수도(공수도)는 가라데로 이 모두 옛 한국어에서 기원합니다. ‘야와’와 ‘가라’는 모두 옛 한국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수도(공수도)가 당나라나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면 가라데가 아니라 도데라고 읽어야 합니다. 또, 씨름이 건너가 일본에서 스모가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무인들은 왜 하필 가라데라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이 어원에 대해서는 시간나는 대로 올려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필자
익명 2010.09.13
필자입니다. 씨름과 스모의 어원 (1) 오래된 기록에 씨름은 각저(角抵), 각력(角力), 상박(相搏/相撲)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전투적인 이미지는 두 황소의 싸움입니다.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뿔을 맞대고 겨루는 싸움이 각저나 각력이었던 것입니다. 씨름에서 이긴 최후의 승자인 천하장사에게 황소가 부상으로 수여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씨름이 한글로 처음 표기된 것은 1447년 편찬된 ‘석보상절’에 실린 실흠이었습니다. “조달이와 난타가 서로 실흠하니 서로 힘이 같거늘 태자가 둘을 잡아 함께 넘어뜨리시며 대신염광이라 하리라.”라고 쓴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이 책에서 왕실의 태자 석가모니가 사촌형제인 조달 및 난타와 무예연습을 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세 명 모두 무예에 출중했지만 씨름에서는 석가모니가 두 형제를 가볍게 이긴다는 내용이죠.
익명 2010.09.13
필자입니다. 씨름과 스모의 어원 (2) 씨름의 어원은 최고의 씨가 되겠다고 겨루는 경기를 말합니다. 씨름은 ‘씨’와 ‘힐후다’가 결합되어 명사화 된 말입니다. 한국의 옛말 ‘힐후다’는 다투다, 승강이질하다, 논쟁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씨름은 씨힐훔 > 실흠 > 시름 > 씨름으로 변천이 된 것입니다. 힐훔이 다툼이라는 뜻으로 쓰인 예는 1459년 ‘월인석보’에 말다툼을 입힐훔이라고 표기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입+힐후다가 명사화한 단어로, 17세기 말의 ‘역어유해’에는 입힐흠, 18세기의 ‘한청문감’에는 입히롬으로 나옵니다. 이 씨름은 7세기 무렵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스모로 발음이 되기 시작합니다. 일본어에는 가운데 소리가 없기 때문에 시름 > 시르모로 변하고 ㄹ이 탈락되면서 시모 > 스모가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한자로 쓸 때 스모를 상박(相撲)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스모가 한국 전통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일본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스모는 642년 백제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자리에서였습니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사인(使人)인 대좌평, 지적 등 벼슬아치 및 수박(手搏)에 능한 무인(武人)을 일본 조정에서 초청하여 일본의 무술인과 상박(相搏)하게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3
필자입니다. 야와라의 비밀 (1) 일본말 야와라(柔ら)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유도(柔道) 또는 유술(柔術)의 딴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필 굳세다, 강직하다, 억세다, 단단하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강(剛)이라는 글자를 놔두고, 부드럽다, 순하다, 연약하다, 여리다, 복종하다와 같은 뜻을 가진 유(柔)자를 사용하였을까요? 그것은 화(和-야와)에 가장 발음이 가까운 글자가 하필 유(柔-야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和)는 일본황실이나 일본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는데, 그 연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본황실의 성씨가 원래 백제에서 건너간 화씨(和氏)였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하여 화(和)라는 글자는 일본을 대표할 정도로 전통이 있고 고귀한 것에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궁중 제사에서 쓰는 악기를 화금(和琴), 궁중무용을 화무(和舞)라 하였고, 지금도 무언가에 화(和)가 들어가면 대개 일본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화의(和衣)는 일본 옷, 화식(和食)은 일본요리, 화과자(和菓子)는 일본의 전통과자란 뜻이죠.
익명 2010.09.13
필자입니다. 야와라의 비밀 (2) 일본 최고의 무술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당연히 화무(和武), 아니면 화술(和術)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일본 사람들이 채택한 것은 화술(和術)이었고, 이를 야와라라고 불렀습니다. 후일 이름을 유술(柔術)이라고 바꾸었지만 여전히 야와라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왜술(倭術), 화술(和術), 유술(柔術), 유도(柔道), 합기도(合氣道)는 모두 와/야와(和)에서 나와 야와라로 불리게 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는 ‘유술(柔術)의 의의와 유도(柔道)의 역사’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습니다. 당시 동경에 있던 이경석은 이 칼럼에서 유술에는 여러가지 다른 명칭이 있으나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고 밝혔습니다. 유술은 체술(體術), 화술(和術), 인술(忍術), 포수(捕手), 소구족(小具足), 권법(拳法), 족법(足法), 자타(自打), 사활(死活), 조계(粗計), 수박(手搏), 유도(柔道), 유술(柔術)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명목만 다르지 서로 같은 것을 하고, 혹은 이름만 같은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유사한 기예들이 1940년대 전후에 일본 시중에서 호신술로 보급되다가 그 중의 하나가 합기도(合氣道)로 진화했고, 이 이름도 처음에는 야와라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와라는 일본을 지배하던 백제계 사람들에 의하여 개발되었으며, 백제를 존중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4
좋으신말씀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나누며 느낀 소감인데 소인이 운동의 실전은 비록 45년 정도되어 외공적인 말씀은 듣고 실천한 경험으로 말씀을 드릴수있으나 감히 귀하와 필력과 역사론으로는 제가 상대가 안됨을 느꼈기에 자세한 대변을 할수가 없는데 저에 대답은 현실에 접목하여 귀하의 이론을 인정하지않고있으니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또한 귀중한 말씀처럼 가라데를 비유하셨는데 말하기를 가라데라 표명할뿐 공문과 국제어 에서는 karatedo 라 부르는것 맞습니다. 또한 태권도라는 단어가 분명히 1960년 이전에도 없었는것이며 과거 태권도인들이 하시던 품세 형이 현재에도 변형이안된 공수도(가라데도)형은 세계 179개국이 똑같으며 공수도 에서 하는 동작을 묘사했음을 금새알수가있거든요, 그리고 국기 태권도의 모순은 태권도의 권 자를 쓰면서 사실 권을 사용치않는데 있고 도라는 글자도 일본에서 왔다하는데 필자는 거기까지는 확인할 자료가없어 말로만 표현하고있는데 귀하의 말씀을 인용할 경우 현재 태권도 라는 고유명사도 고쳐야할것 같고 비슷한 동작도 완전히 바꿔야할것입니다.
익명 2010.09.14
님의 이글을 보면서 일천한 무예를 공부하며 겉핥기식 공부로 가져오던 개념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이해되고 확신을 갖게됩니다. 늘 변방을 돌며 무술은 말(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본질적 덕목이라는 생각으로 미련하게 운동만 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특히 태권도라는 한국전통무예의 역사에 접해서는 참으로 많은 유감이 현실적으로 떠올라 좀더 공부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차제에 참으로 진지한 학군들의 이 분야에 대한 진정한 매진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님의 글을 접하며 더욱더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납니다. 기회가 되면 끊임없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가라데의 어원(1) 좋은 의견 올려주신 무한 님과 박종한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니 하나라도 더 알려 드리고 싶어집니다. 무한 님께서 가라데의 어원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하시므로, 오늘은 개략적인 사실만 우선 올려 봅니다. 가라데는 일본이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오키나와는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1868년 오키나와에서 가라데의 명인 후나코시 키친이 태어납니다. 이듬해 그의 조국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병합되고 맙니다. 이로써 기존의 계급질서는 완전히 해체되고 후나코시의 조상인 무사계급의 특권도 사라지게 됩니다. 오키나와는 조선과 달리 무인이 지배하는 왕국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수도인 슈리에서 태어난 그는 피지배자로서의 압박과 차별을 경험하며 성장합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가라데의 어원(2) 그는 어려서부터 슈리성 앞에 달린 종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거기에는 지금도 ‘만국진량(万國津梁)의 종’이 달려 있습니다.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종에는 삼한, 즉 가라를 본받으라고 적혀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남해의 승지(勝地)에 위치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삼한(三韓)의 빼어난 것을 본받는다. 오키나와는 대명(大明), 일역(日域)과 불가분의 관계로 상호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삼한은 곧 고대의 한국을 뜻하며, 오키나와나 일본 사람들은 이를 ‘가라’라고 발음하였습니다. 가라데의 이름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가라데의 어원(3) 오키나와의 무인들은 평민으로 격하되면서 무술을 가르쳐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항복의 상징으로 상투를 잘린 무인들은 아직 ‘데’로 불리고 있던 무술의 다른 이름이 필요하였습니다. 후나코시는 1916년에 가라데라 정했는데, 그것은 오키나와의 조상들이 가라(삼한)의 빼어난 것을 본받으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자로는 당수(唐手)라 표기 했으며, 1929년 발음은 여전히 가라데라고 하면서 표기만 공수(空手)로 바꾸게 됩니다. 후나코시는 표기를 바꾸되 가라라는 발음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어는 이처럼 소리가 표기에 앞서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책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도 한(韓)이라는 글자를 ‘가라’라고 읽도록 토를 달아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신민이 된 오키나와 무인들은 왜 ‘가라’를 당나라 당(唐)이라 표기하여 마치 가라데가 중국에서 온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을까요? 오키나와는 당나라(618 - 907)와는 전혀 교류가 없었고, 중국과 최초로 교류를 시작한 해는 당나라가 망한지 무려 465년 후인 1372년인데 말입니다. 궁금하시면 지속적인 댓글과 질문 주세요.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댓글을 달아 주신 박종한 님께 한말씀. 님께서 남기신 "늘 변방을 돌며 무술은 말(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본질적 덕목이라는 생각으로 미련하게 운동만 하여왔습니다." 라는 대목에 울컥 눈물을 쏟을 뻔 했습니다. 무술하는 분들은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변방에 계셨던 것 맞습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것도 맞고요. 그러나 그 분들이 미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이었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뭔지 제대로 아는 분들이었지요. 이런 자각을 주신 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역사 속의 무인들이 과연 어떻게 홍익인간의 정신을 몸으로 보여 주었는지 기록으로 남겨 보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무한 님께 한 말씀. 저는 그저 굴 안에 갇혀서 글 나부랭이나 쓰는 백수건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는 님이 글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한 님은 외공과 내공을 두루 겸비하신 어르신이라는 것을요. 어르신께서 저의 조그만 글에 이처럼 큰 관심으로 지켜봐 주시니 태권도의 발전은 너무나도 당연하리라 봅니다. 님께서 몸으로 체득하여 아시는 그 분야에 대하여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운동신경 제로의 문외한이니까요. 어쩌다가 태권도의 마력에 빠져 굴 속에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글이 훗날 님께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시면 막걸리 한 사발 사주십시오. 이차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4
글은 그럴듯 한데 글쓴이가 진정 무술을 얼마나 해봤는지 의문이 드네요 진정 겨루기란걸 해보긴 해본 겁니까? 품새가 겨루기의 상위개념이라고 말씀했는데 또 품새에 고수가 겨루기도 잘한다는건 정말 넌센스 입니다. 품새란건 그야말로 무술에 정형화된 형태이고 기본 기초일 뿐 입니다. 실제 겨루기 경험없이 품새만 연습하면 품새에 고수가 됩니다. 허나 실전 경험이 없으면 그냥 기술 몇개로 반복 수련 실제 타격 수련한 사람에게 반드시 깨집니다. 왜??? 형만 해서는 실제에 변수와 감각, 타격을 위한 근력, 순발력 등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럴듯한 글 몇줄로 대가인듯 보이나 실상은 그냥 허장성세에로 보입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무술근본 님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태권도를 스포츠 경기로만 이해할 경우에는 몇 개의 타격기술을 반복하여 수련하면 메달을 딸 수 있을 것입니다. 지적해주신 대로 품새 수련만 해서는 실제상황의 변수와 감각, 타격을 위한 근력, 순발력 등을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품새에 나오는 수백 개의 동작 중에서 경기 겨루기에서 사용빈도수가 높은 것은 고작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올림픽 같은 경기에 국가 대표로 출전하려면 국기원 초단만 따면 됩니다. 제가 외국에서 올림픽을 비롯한 겨루기 3관왕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선수생활을 접고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초단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승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품새와 겨루기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괴리를 좁히는 것이 태권도의 과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4
필자입니다. 가라=한국의 연원(1) 가라데의 가라는 고대 한국(韓國)을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그 뜻은 큰 땅, 큰 나라입니다. 가=큰, 라=땅입니다. 이중동음동의어로 라+라(땅+땅)와 같이 겹쳐 쓴 것이 라라가 되었고, 여기에 두음법칙이 적용되어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나라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국(國)입니다. 물론 라 한글자만 가지고도 나라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상고시대의 순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적용된 소리 값을 분석할 때는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원칙을 가라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익명 2010.09.14
가라=한국의 연원(2) (1) 두음법칙이 적용된다. /r/이 첫 음절에 오면 /n/으로 대치된다. 예) 라라(땅땅) > 나라(국가) (2) 받침소리가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 따라서 끝소리 /n/이나 /l/은 대부분 /r/로 대치된다. 예) 큰라/클라(큰땅/큰나라) > 크라 (3) 유성음이 음운단위가 되지 못하며 격음(거센소리)가 없다. 예) 큰라/클라/크라 > 카라 > 가라 (4) 모음이 거듭되는 걸 되도록 피한다. 즉 모음 사이에 /r/ 등 자음을 덧댄다. 예) 가야 > 가라 이 가라라는 명칭이 한국의 역사에서 살아있는 곳은 가야입니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加羅),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야(伽倻) 등으로 썼으니, 락(洛), 야(耶), 야(邪), 야(倻) 등은 옛 음을 모두 라로 읽었습니다. 따라서 가야의 모든 나라는 가라라고 발음되었고, 한민족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도 똑 같은 발음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후일 이들은 왕명에 의하여 역사에 적힌 모든 한(韓)-가라를 당(唐)-가라로 고치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한일간의 엄청난 비극이 있었습니다.
익명 2010.09.14
가라=한국의 연원(3) 그것은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 당하면서 엄청난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에서 연유합니다. 이미 일본을 장악하고 문명을 전파하던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당나라가 되어버렸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백제계의 일본 왕은 모든 기록에 있는 한(韓)-가라를 당(唐)-가라로 고치도록 명합니다. 그러나 표기만 당(唐)으로 바꾸었고, 발음은 여전히 가라라고 하였습니다. 당(唐)을 당나라라는 뜻으로 읽으려면 가라(から)가 아니라 도(とう)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이처럼 고대의 우리말이나 일본말은 소리 우선, 표기 나중이라는 원칙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라라고 발음하는 한 그 표기를 당(唐), 공(空), 신(辛) 등 어떻게 쓰던 관계 없이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4
가라(から)가 아니라 도(とう)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잘못알고 계신든 한데요 당을 도우 라고 발음한다구요? 예...실제로 그렇게 발음도 합니다!! 일본어와 칸지(한자)발음을 헤깔리시는듯 한데요 하하하 자아! 봅시다 내나라 내조국을 한자로 나타내면 어떻게 될까요? 아국 아조국(我國 我祖國)이 됩니다! 중국사람도 우리말 한국말 표현으로 하자면 가운데 나라 사람 즉 중국인(中國人)이 됩니다!!
익명 2010.09.14
일본사람들은 가라데를 토우슈토 라고 칸지(한자)발음으로 읽기도 하고 씁니다... 공수도 역시 코우슈토우 라고 칸지로는 읽습니다 아시겠는지요? 맨손 의 일본 말이 가라데 입니다 맨손의 한자말은 空手 라는 말로 표현이 되는것입니다!! 일본말과 우리말은 나름으로 비슷한게 똑같이 소리글자입니다....다만 일본의 히라가나 카타카나는 한문의 소리를 빌려온 차이가 있지만 똑같이 소리글자라 뜻글자인 중국어와 다르게 중국식 한자를 칸지 라고 해서 따로 씁니다 그차이를 왜? 당나라를 도우 라고 발음하지 않느냐?는 웃기는 말입니다
익명 2010.09.14
칸지 발음으로 분명히 토우코구 라고 발음까지 합니다..이해가 되셨나요? 일본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신 분의 글인데 이걸 어떻게 믿을수 있을까요? 칸지와 일본어를 구분못하시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익명 2010.09.15
필자입니다. 당수(唐手)와 공수(空手)의 일본어 발음에 대하여 의견 주신 ^^ 님께 감사드립니다.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신 분 같군요. 그러나, 일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수(隋) 다음의 중국 왕조가 뭐냐고 물어 보면 가라(から)가 아니라 도오(とう)라고 답합니다. 당(唐)을 음독한 것이지요. 일본 사람들이 당(唐)을 가라(から)라고 훈독할 경우에는 중국의 옛 왕조가 아니라 옛 한국이라는 뜻이며, 이외에는 막연한 외국, 막연한 선진국, 막연한 중국으로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어는 간지(한자) 한 글자를 보통 두가지로 읽고, 심지어 열가지 이상으로 읽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도 훈독을 배울 때 애를 먹습니다. 무조건 외워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일본어에는 이처럼 한자가 가진 본래 뜻에 관계없이, 음이나 훈음을 이용하여 낱말을 표기하는 방법이 발달하였고, 이를 아테지라고 합니다. 말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표기가 생기면서 한자를 빌려썼기 때문이죠. 당(唐)이나 공(空)은 한자의 뜻에 관계없이 ‘가라’라고 발음이 되는 한 옛 한국을 뜻하는 아테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예 행위와 관련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헌을 다 뒤져도 당수(唐手)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에 가라(唐)라고 불리는 나라는 물론 없었고, 도오(唐)라고 불리는 나라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옛 한국에만 가라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5
반대입니다.
익명 2010.09.15
필자입니다. 가라데는 일본 무술이 아니라 일본의 피식민지인 오키나와의 무술입니다. 십팔기는 중국 무술이 아니라 일본의 피식민지인 대한제국의 무술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강제적인 군대해산과 무장해제를 당한 독립군의 무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 다 고려의 수박을 계승한 한민족의 후예들에 의해 수련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 태권도는 수박의 전통을 이은 십팔기, 가라데, 텩견의 장점이 골고루 채택된 전통무예입니다. 오로지 가라데만 배운 원로는 태권도가 오로지 가라데에서만 왔다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5대관에서 유일하게 한국, 만주, 오키나와의 무술을 고루 익힌 고수는 윤병인 관장이었고, 그는 자신의 무예를 ‘권법’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별명은 ‘경농 십팔기’였고, 자신의 시범을 ‘십팔기 연무’라 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권법(拳法), 월도(月刀), 곤봉(棍棒) 등으로 모두가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십팔기 종목입니다. 그가 6․25 때 실종되자 오로지 가라데만 배운 사범들이 득세하게 되면서 태권도에 대한 가라데의 영향이 커졌을 뿐입니다. 태권도인들은 가라데의 영향을 인정하는 만큼 십팔기와 택견의 영향도 인정해야 합니다. ‘무예도보통지’에서 권법보만 보면 품새의 원형이 없다고 덮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모든 맨손무예는 병장기 사용을 전제로 수련되던 것입니다. 창, 칼, 말 등 십팔기의 모든 종목을 고루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5
필자입니다. 사실 현대의 가라데와 태권도는 동시대에 나타났습니다. 일제 식민지 당시 가라데는 새롭게 체계를 잡아가는 신생무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공식명칭이 모두 가라데(空手)로 통일 된 것은 1936년의 일이며, 후나코시가 송도관을 설립한 것은 나이 70이 다 된 1936년의 일입니다. 그는 이듬해 한국에 와서 시범을 합니다. 일제가 기울어 갈 무렵이었죠. 일본가라데연맹은 1949년, 세계가라데연맹은 1961년에야 창립되었고, 대한태권도협회는 1961년, 세계태권도연맹 1973년에 창립되었습니다. 이처럼 본격적인 조직화의 차이는 겨우 12년에 불과합니다. 이 무렵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를 거쳐, 8 15 해방, 6 25 전쟁, 4 19 학생혁명, 5 16 군사혁명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2차대전으로 패망했으나 6 25 전쟁으로 최대의 수혜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불리한 역사적인 정황에도 불구하고 태권도는 가라데에 비해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가라데를 세계화시킨 사람은 한국인 최배달입니다. 태권도를 세계화시킨 사람도 당연히 한국사범들이고요. 태권도에 오로지 가라데만 있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익명 2010.09.15
필자입니다. 한국 최초의 가라데 시범이 언제 있었던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가라데를 정립시킨 후나코시 키친은 1937년 7월 15일, 그의 나이 70세가 되어 서울을 방문합니다. 가라데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아일보 1937년 7월 11일자는 “일본무덕회조선지방본부에서 척식대학(타쿠쇼쿠대학) 공수부를 초청하여 15일 경성부민회관에서 공수도연무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척식대 공수부는 일본인 사범 부명요(富名腰) 이하 부원 11명으로 공수격술의 의의를 일반에게 소개하게 된다.”고 보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범 부명요가 바로 후나코시 키친이죠.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가 이때 서울을 방문한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은 이름의 한자 표기를 선월(船越-후나코시) 대신 창씨개명된 부명요(富名腰-토나코시)라고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동아일보는 같은 해 8월 13일자에, 종로 YMCA 유도부에서 야마구치 고겐(山口剛玄)을 초빙하여 공수도 시범을 보일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기사는 단신으로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시범에 대한 후속기사가 보이지 않는데, 가라데는 당시만 해도 큰 반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에서 최초의 시범이 있던 1937년 당시만 해도 가라데는 일본 본토에서 조차 정립되어 가는 과정이었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무술로 정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6
필자입니다. 기금까지 태권도의 역사에 대한 제 기조발언이었습니다. 제 의견에 대하여 어떤 반론이든 활발히 개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태권도학과의 교수님들 환영합니다. 교수님들께서 이 공개마당에 나오지 않으시면 스스로 아는 게 별로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며,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도 별로 없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게 정답이니 무조건 외우라고 제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등록금이 아깝다면 교수님들께 독려해주십시오. 공개 도전을 받아 주십사고요. 태권도학과 교수님들을 한데 모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이 토론 광장의 주제는 태권도의 역사에 국한합니다. 역사의 정립이 없이는 아무것도 제대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익명 2010.09.17
가라데도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우리무술 이라고 하는거에요? 검도 유도도 가져와주세요 애국자시네 ㅋㅋㅋ
익명 2010.09.17
댓글 주신 열라뽕따이 님께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가라데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보통 학자들은 가라데의 기원을 인도 - 중국 - 오키나와로 보는데 제 연구에 의하면 인도와 중국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인도 - 중국 - 오키나와 설은 그냥 설에 불과하지만 저의 연구는 고려 - 오키나와를 연결고리로 하여 많은 사료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끝까지 토론과정을 지켜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익명 2010.10.20
특히 이 부분이 공감이 갑니다 ! ....김용옥은 태권도의 전통을 오로지 가라데에서 온 것으로 만 보고 있으나, 그는 가라데 조차도 고려의 수박에서 비롯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 태권도는 수박의 전통을 기본으로 하고, 현대에 와서 택견, 십팔기, 가라데의 형식이 골고루 가미되어 완성된 무술이다.....
익명 2010.11.03
찬성입니다.
나그네 2020.05.05
도올 선생은 다 좋은데. 유학을 전공하고 가르쳐서 그런지 문화의 원류를 마치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규정 짓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타성에 젖으면 진실이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나저나 홍산문화는 어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