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비판(1): 태권도가 오로지 가라데에서 왔다고?
도올 김용옥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을 통하여 태권도가 철저히 가라데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필자는 그의 책을 숙독하고 난 후, 그가 몇 가지 점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면서 전체적인 논지를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갔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그는 병술과 무술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요즘 마샬아트(martial art)라고 부르는 것을 단순히 병술의 일부로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병술과 독립된 전통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현대 개념의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군이라는 집단에서 수련되던 전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병술과 무술이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어떤 맨손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병장기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가 병술이라는 것을 지휘관의 전략이나 전술이라고 볼지라도 무술은 결국 병술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근현대의 마샬아트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지배자에 의한 무장해제나 금무정책이 있었고, 칼이 아니라 총이라는 신무기의 위협이 있었다. 무장해제를 당하여 쫓겨난 군인들이 맨손으로 무술을 수련하고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아무런 무기없이 산속에서 수련한 것은 아니었다.
가라데만 하더라도 오키나와의 병권을 쥐고 군사를 훈련시키던 장군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며, 일본에 복속된 이후에 평민으로 격하된 무인들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자 일반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1906년 경의 일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사설군대의 일원이었으나 메이지유신 후에 단행된 무장해제로 인하여 일반에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무술은 여러 왕조마다 민간에 대하여 시행된 금무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한국에서는 구한말 일본에 의하여 군대가 해산될 때 까지만 해도 전군에서 십팔기와 권법이 수련되고 있었다. 이미 발달된 총포가 그들을 겨누고 있었으므로 재래식 무기는 지배자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무인들이 맨손을 가지고 어떤 예술을 만들어내든 상관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또, 겨루기의 성공사례들이 품새로 정형화된 것이라 보았으나 이는 품새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품새의 최초의 성격에 대하여 그는 겨루기의 인스피레이션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것이 권위를 확보함에 따라 완벽함을 추구하는 심미적 과정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독창적인 품새를 만들고 수련하여 건강을 회복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면서 품새란 이처럼 우발적인 계기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것이 무술사의 보편원리의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품새를 이해할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부인과 제자 한 사람 정도라며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뿐이라는 등 품새를 매우 개인적이고 우발적이며, 추상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술은 미학이 아니라 물리학에 다가서 있는 행위이며, 추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급소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무술이기 때문이다. 품새는 우발적으로 생기거나 개인의 건강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종합무술의 기본을 망라한 기술이다. 행위의 과정에 병장기가 해체되어 있거나 손에서 잠시 내려와 있을 뿐이다. 건강을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은 개인 체조라고 해야 한다. 현대의 겨루기에는 맨손 입식 타격만 있으나, 품새에는 말타기, 활쏘기, 창칼쓰기는 물론이고 누르기, 조르기, 찌르기, 메치기 같은 종합무술의 원형이 고루 숨어 있다. 태권도 고수라면 누구나 이 말을 이해하리라 본다. 김용옥은 품새를 겨루기의 하위 개념으로 보았으나 사실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는 워낙 품새(투로) 위주로만 되어 있으면서 건강이나 심미에 치중한 중국무술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그것이 너무나도 오랜 금무정책에 의하여 겨루기를 잊어버린 결과임을 간과한 것 같다.
그러므로 품새는 겨루기의 상위개념인 것이다. 국기원이 발간한 태권도교본에는 품새의 정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품새가 곧 태권도이며, 기본동작은 품새를 위한 예비동작에 불과하고, 겨루기는 품새의 실전응용에서 지나지 않으며, 태권도 정신도 문자로 표현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철학 속에 있지 않고 품새에 의한 행동 속에서 찾아진다.” 결국, 품새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겨루기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겨루기는 잘 하는데 품새는 잘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태권도라는 경기의 ‘선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어디 가서 무술이나 무예를 한다고 자랑할 수는 없겠다. 현재의 태권도에서 겨루기와 품새의 기술력이 양립되지 않고 따로 논다면 분명 어디엔가 문제가 있고, 필자가 태권도 단체의 기술위원장이라면 반성하고 개선할 우선 과제라 하겠다.
또, 김용옥은 가라데의 기원에 대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권법이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자내의 풍속,습관,요구에 의하여 변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정설일 확률이 높다고 했으나, 그 확률은 틀렸다. 그는 고려 삼별초의 무사들이 집단적으로 건너가 오키나와 왕국을 건설하고 무예를 전파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확률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1273년, 오키나와가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1372년, 중국사람 공상군이 오키나와에 무술을 전했다는 해는 1756년이다. 따라서, 김용옥의 견해는 고려에서 건너간 무예가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수백 년 후에 중국사람이 투로 일부를 배워주고 갔을 수도 있다고 수정되어야 한다. 김용옥은 이런 가설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다. 가라데는 중국의 도인법 스타일에서 유래하는 양생이나 건강 혹은 몸의 미학과 관련된 한가로운 기예가 아니라 사쓰마의 가혹한 학정에 시달리는 오키나와 인민의 자구의 처절한 투쟁의 일환으로서 발전된 장구한 전통을 지닌 피압박적인 비전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가라데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 자신이 없어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김용옥은 또 조선의 ‘무예도보통지’가 어디까지나 병술의 책이지 무술의 책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서 한국에서는 자생적인 무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개화했다는 오류를 설파하고 있다. 이순신을 병술지략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사로 구분하여 단정한 후에 무술은 조선에서 나온 바 없고,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펴고 있다.‘무예도보통지’가 세계에서도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유례없는 무예서이며, 이것이 손자병법과 같은 전략전술 또는 진법이 아니라 실전적인 무술만으로 구성된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그에 따르면 병술은 군인, 즉 타율무장집단에 의하여 수련된 것이고, 무술은 일반, 즉 자율무장집단에 의하여 수련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의 전 종목을 수련하던 군인들이 일본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해산된 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자율적’으로 의병, 독립군, 광복군이 되어 집단적으로 무술을 수련하였다. 건강이나 심미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반청복명을 부르짖던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은 독립군이라 할 수 있고, 오키나와에서도 일본에 항거한 무인들의 항쟁은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율적인 무장집단이면서 현대의 무술을 전수한 주역들이었다.
결국 김용옥이 보는 무술이란 군대 같은 집단에서 수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건강, 취미, 인격, 몸의 아름다움 같은 극히 현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나머지 영화에 나오는 이소룡의 이미지와 이소룡이 죽은 후 미국인 부인에 의해 집필된 전기를 가지고 무술의 전반을 이해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김용옥은 태권도의 전통을 오로지 가라데에서 온 것으로 만 보고 있으나, 그는 가라데 조차도 고려의 수박에서 비롯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 태권도는 수박의 전통을 기본으로 하고, 현대에 와서 택견, 십팔기, 가라데의 형식이 골고루 가미되어 완성된 무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는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 그의 빛나는 예지와 통찰력, 그리고 학자로서의 양심을 내걸고 이런 책을 펴낸 것에 대하여 감탄을 하며 여러 번 읽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가 자신없어 하는 부분에 대하여 주목하고 그 것을 파헤쳐 보기로 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사실 오키나와데(가라데의 전신)의 정확한 모습에 관하여서는 일본 자체내에서도 탁월한 연구업적이 부재한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오키나와의 역사, 언어, 풍속, 노래, 무용의 종합적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 발언이 필자로 하여금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파고들게 한 계기가 되었고, 현지조사를 비롯한 일년이 넘는 연구 끝에 오키나와의 문명은 고려 삼별초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며, 가라데 또한 삼별초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그는 병술과 무술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요즘 마샬아트(martial art)라고 부르는 것을 단순히 병술의 일부로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병술과 독립된 전통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현대 개념의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군이라는 집단에서 수련되던 전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병술과 무술이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어떤 맨손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병장기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가 병술이라는 것을 지휘관의 전략이나 전술이라고 볼지라도 무술은 결국 병술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근현대의 마샬아트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지배자에 의한 무장해제나 금무정책이 있었고, 칼이 아니라 총이라는 신무기의 위협이 있었다. 무장해제를 당하여 쫓겨난 군인들이 맨손으로 무술을 수련하고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아무런 무기없이 산속에서 수련한 것은 아니었다.
가라데만 하더라도 오키나와의 병권을 쥐고 군사를 훈련시키던 장군들에 의해 전수된 것이며, 일본에 복속된 이후에 평민으로 격하된 무인들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자 일반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1906년 경의 일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사설군대의 일원이었으나 메이지유신 후에 단행된 무장해제로 인하여 일반에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무술은 여러 왕조마다 민간에 대하여 시행된 금무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한국에서는 구한말 일본에 의하여 군대가 해산될 때 까지만 해도 전군에서 십팔기와 권법이 수련되고 있었다. 이미 발달된 총포가 그들을 겨누고 있었으므로 재래식 무기는 지배자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무인들이 맨손을 가지고 어떤 예술을 만들어내든 상관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또, 겨루기의 성공사례들이 품새로 정형화된 것이라 보았으나 이는 품새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품새의 최초의 성격에 대하여 그는 겨루기의 인스피레이션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것이 권위를 확보함에 따라 완벽함을 추구하는 심미적 과정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독창적인 품새를 만들고 수련하여 건강을 회복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면서 품새란 이처럼 우발적인 계기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것이 무술사의 보편원리의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품새를 이해할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부인과 제자 한 사람 정도라며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뿐이라는 등 품새를 매우 개인적이고 우발적이며, 추상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술은 미학이 아니라 물리학에 다가서 있는 행위이며, 추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급소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무술이기 때문이다. 품새는 우발적으로 생기거나 개인의 건강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종합무술의 기본을 망라한 기술이다. 행위의 과정에 병장기가 해체되어 있거나 손에서 잠시 내려와 있을 뿐이다. 건강을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은 개인 체조라고 해야 한다. 현대의 겨루기에는 맨손 입식 타격만 있으나, 품새에는 말타기, 활쏘기, 창칼쓰기는 물론이고 누르기, 조르기, 찌르기, 메치기 같은 종합무술의 원형이 고루 숨어 있다. 태권도 고수라면 누구나 이 말을 이해하리라 본다. 김용옥은 품새를 겨루기의 하위 개념으로 보았으나 사실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는 워낙 품새(투로) 위주로만 되어 있으면서 건강이나 심미에 치중한 중국무술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그것이 너무나도 오랜 금무정책에 의하여 겨루기를 잊어버린 결과임을 간과한 것 같다.
그러므로 품새는 겨루기의 상위개념인 것이다. 국기원이 발간한 태권도교본에는 품새의 정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품새가 곧 태권도이며, 기본동작은 품새를 위한 예비동작에 불과하고, 겨루기는 품새의 실전응용에서 지나지 않으며, 태권도 정신도 문자로 표현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철학 속에 있지 않고 품새에 의한 행동 속에서 찾아진다.” 결국, 품새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겨루기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겨루기는 잘 하는데 품새는 잘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태권도라는 경기의 ‘선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어디 가서 무술이나 무예를 한다고 자랑할 수는 없겠다. 현재의 태권도에서 겨루기와 품새의 기술력이 양립되지 않고 따로 논다면 분명 어디엔가 문제가 있고, 필자가 태권도 단체의 기술위원장이라면 반성하고 개선할 우선 과제라 하겠다.
또, 김용옥은 가라데의 기원에 대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권법이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자내의 풍속,습관,요구에 의하여 변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정설일 확률이 높다고 했으나, 그 확률은 틀렸다. 그는 고려 삼별초의 무사들이 집단적으로 건너가 오키나와 왕국을 건설하고 무예를 전파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확률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1273년, 오키나와가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1372년, 중국사람 공상군이 오키나와에 무술을 전했다는 해는 1756년이다. 따라서, 김용옥의 견해는 고려에서 건너간 무예가 이미 오키나와에 있었고, 수백 년 후에 중국사람이 투로 일부를 배워주고 갔을 수도 있다고 수정되어야 한다. 김용옥은 이런 가설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다. 가라데는 중국의 도인법 스타일에서 유래하는 양생이나 건강 혹은 몸의 미학과 관련된 한가로운 기예가 아니라 사쓰마의 가혹한 학정에 시달리는 오키나와 인민의 자구의 처절한 투쟁의 일환으로서 발전된 장구한 전통을 지닌 피압박적인 비전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가라데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 자신이 없어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김용옥은 또 조선의 ‘무예도보통지’가 어디까지나 병술의 책이지 무술의 책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서 한국에서는 자생적인 무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개화했다는 오류를 설파하고 있다. 이순신을 병술지략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사로 구분하여 단정한 후에 무술은 조선에서 나온 바 없고,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펴고 있다.‘무예도보통지’가 세계에서도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유례없는 무예서이며, 이것이 손자병법과 같은 전략전술 또는 진법이 아니라 실전적인 무술만으로 구성된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그에 따르면 병술은 군인, 즉 타율무장집단에 의하여 수련된 것이고, 무술은 일반, 즉 자율무장집단에 의하여 수련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의 전 종목을 수련하던 군인들이 일본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해산된 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자율적’으로 의병, 독립군, 광복군이 되어 집단적으로 무술을 수련하였다. 건강이나 심미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반청복명을 부르짖던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은 독립군이라 할 수 있고, 오키나와에서도 일본에 항거한 무인들의 항쟁은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율적인 무장집단이면서 현대의 무술을 전수한 주역들이었다.
결국 김용옥이 보는 무술이란 군대 같은 집단에서 수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건강, 취미, 인격, 몸의 아름다움 같은 극히 현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나머지 영화에 나오는 이소룡의 이미지와 이소룡이 죽은 후 미국인 부인에 의해 집필된 전기를 가지고 무술의 전반을 이해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김용옥은 태권도의 전통을 오로지 가라데에서 온 것으로 만 보고 있으나, 그는 가라데 조차도 고려의 수박에서 비롯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 태권도는 수박의 전통을 기본으로 하고, 현대에 와서 택견, 십팔기, 가라데의 형식이 골고루 가미되어 완성된 무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는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 그의 빛나는 예지와 통찰력, 그리고 학자로서의 양심을 내걸고 이런 책을 펴낸 것에 대하여 감탄을 하며 여러 번 읽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가 자신없어 하는 부분에 대하여 주목하고 그 것을 파헤쳐 보기로 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사실 오키나와데(가라데의 전신)의 정확한 모습에 관하여서는 일본 자체내에서도 탁월한 연구업적이 부재한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오키나와의 역사, 언어, 풍속, 노래, 무용의 종합적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 발언이 필자로 하여금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파고들게 한 계기가 되었고, 현지조사를 비롯한 일년이 넘는 연구 끝에 오키나와의 문명은 고려 삼별초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며, 가라데 또한 삼별초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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