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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韓民族) 최고의 무장 연개소문

옛날부터 역사가들은 성공과 실패 흥성과 패망으로 그 인물의 우열을 정하고 또 유가의 윤리관으로 인물의 시비를 논하였는데 연개소문은 성공하였지만 그 불초한 자식들이 그 유업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흉내내는 자들에 의해 배척되는바 되었으며 연개소문을 흉적이라 하여 오직 헐뜯고 욕하며 죽일놈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어떤것이 혁명(革命)인가 하면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화가 그것이다. 역사란 것이 어느날 어느때엔들 변화의 도정으로 나아가지 않는 때가 없으므로 또한 어느날 어느때에도 혁명이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역사를 혁명사(革命史)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역사가들이 특히 혁명이란 명사를 귀하게 여기고 중하게 여겨서 문화상 혹은 정치상 뚜렷이 시대를 구분할 만한 진화의 의의를 가진 인위적 대변혁을 가리켜 혁명이라 부른것이니 이런 의미에서 정치상의 혁명을 구하자면 우리 조선 수천년 역사에서 몇 개 되지 못할 것이다. 한양의 이씨로써 송도의 왕씨를 대신한 것이나 이조에서 이시애, 이괄등의 반란이 그 성패는 다르나 그 실질은 다 정권양탈(政權攘奪)의 행동에 불과한즉 내란이라 하거나 역대(易代)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혁명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그렇지 아니하여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하였으니 이는 분립(分立)의 대국(大局)을 통일(統一)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불문하고 이를 일거에 소탕하여 영류왕(榮留王) 이외 수백대관들을 베어 죽이고 쳐들어 온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진격하여 중국 전국을 벌벌 떨게 하였으니 다만 혁명가의 기백만 가졌을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주와 지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죽을때에 따로 어진 인재(人才)를 골라서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자(不肖子) 형제에게 대권을 맡겨서 마침내 이루어 놓은 공업(功業)마저 뒤엎어 버렸으니 대개 그는 야심은 많았으나 공덕(公德:공(公)을 위한 도덕적인 의리)은 작았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역사가 모조리 없어져 버려서 오로지 적국인(敵國人)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우선 사실의 전말을 자세히 볼 수 없으므로 가볍게 그 한가지 흠을 들어 그 전모를 논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백년동안 사대주의에 찌들어 온 용렬한 노예근성의 사가(史家)들이 그 좁쌀만한 팥알만 한 주관적 안공(眼孔)으로 본대로 연개소문을 혹평하여 신사군이충(臣事君以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섬겨야 한다의 불구의 도덕률로써 그의 행위를 탄핵하며 이소사대자외천(以小事大者畏天)(작은자(나라)로서 큰자(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 한다.)의 노예적 심리로 그의 공적을 부인하여 한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의 유체(遺體)를 거의 한조각 살도 남아 있지 않도록 씹어대는 것은 내가 통한해 마지 않는 바이다. 이제 이를 위하여 대략 몇 구절의 평을 더하였던 것이다.

댓글 2

익명 2011.09.22
전삼한, 후삼한 그리고 고조선, 열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상이 느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익명 2011.09.24
과거가 찬란하면 뭐해 ! 후손들이 개 죽쑤고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