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비판(15) 씨름-수박-택견-태권도의 변증법
조선 정조 시대의 이만영은 1798년 편찬한 백과사전 ‘재물보’에서 짧은 문장으로 무려 일곱 가지 무예의 호칭과 관계를 동시에 풀이하고 있다.
"수박(手搏)을 변이라 하고 각력(角力)을 무(武)라 하는데 지금의 탁견(托肩)이다. 박재(나무치기)같은 종류도 탁견이라 한다. 수박은 지금의 수벽(手癖)이며, 비록 서로 같지는 않으나 표기는 같게 해도 된다(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托肩 撲梓之類亦托肩 手搏仝ㅇ今之手癖 雖與此不同而當用此字).”
이만영은 여기에서 수박, 변, 각력, 무, 탁견, 박재, 수벽을 모두 한 종류로 보고 있다. 변, 수박, 각력이 먼저 나왔고, 후대의 사람들은 이를 탁견이나 수벽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재(撲梓)의 재(梓)는 가래나무, 판목(板木), 관(棺), 널 등의 뜻이 있다. 가래나무 목재는 재질이 치밀하고 단단하며 뒤틀리지 않아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택견하는 사람들은 이런 목재를 세워놓고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수련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가래나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을 것이므로, 이 재(梓)는 단단한 목재라는 뜻으로 풀 수 있겠다. 이는 입식타격기 계열에서 사용하는 권고대나 마키와라와 같은 종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위 문장의 한글풀이에서 슈벽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 표기를 되살려 수박을 대신하는 공식 용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는 지나친 발상이다. 수박(手搏)을 슈벽으로 표기하려면 조선(朝鮮)은 됴션, 천지(天地)는 텬디, 우주(宇宙)는 우듀 등 훈몽자회 당시로 다 돌아가야 한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집하지 않는 한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에 걸쳐 정립된 맞춤법 통일안을 다시 조선 시대로 되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수박과 각력에서 택견이 나왔다는 것은 이 기록으로 분명해진 셈이다. 수박이 주로 손을 사용한 타격기였다면 각력은 서로 엉겨붙어 싸우는 씨름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혹자는 씨름이 어떻게 택견으로 연결되었을까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인 택견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송덕기(1893-1987)는 ‘한국고유무술 택견(전통무술 택견)"에서 택견이 씨름의 형태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씨름은 서로를 붙잡고 행하지만 서로가 떨어져서 시합을 하게 되면 택견과 흡사한 동작이 나오게 되어, 택견은 유술적인 요소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택견의 실제적인 내용 속에 씨름의 기법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 씨름도 옛날에는 택견의 기법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도 택견과 씨름은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기술의 명칭만 해도 딴죽, 덧걸이, 덜미잽이, 밭장치기, 낚시 걸이 등 넘기는 기술은 거의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안자산은 ‘조선무사영웅전’에서 조선조 효종 때의 장사 김여준이 적의 약점을 살핀 후에 주먹으로 적의 코를 박치니 적이 고개를 돌려 피하였다. 때를 틈타 그대로 적의 허리를 꼲아들어 지상에 메어쳐 이겼다는 대목을 소개하며, 여기에서 보이는 각저(角觝) 기술을 유술적인 기술이라 설명하고 있다.
유술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이지만 유술적인 기법도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자산은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를 통하여 수박과 같은 한국 전통무예를 통칭 유술이라 하였는데, 고려나 조선시대의 사료에 유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한국 전통에 유술이라는 무예는 없었다고 보면 안된다. 유술은 특정의 무예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맨 몸으로 하는 무예의 통칭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의 포인트는 택견, 유도, 가라데는 모두 씨름에서 비롯되었거나 상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씨름-택견, 일본의 스모-유도, 오키나와의 시마-가라데의 관계가 그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백제의 씨름이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가 되었고, 고려의 씨름이 오키나와(류큐왕국)으로 건너가 시마가 되었다.
세계에서 한국 씨름이 전통적으로 연행되고 있는 유일한 곳은 한국이다. 택견의 명인은 이 씨름에서 택견이 나왔다고 한다. 세계에서 한국식 씨름이 전통적으로 연행되고 있는 유일한 곳이 오키나와이다. 가라데 무인들은 이 씨름에서 가라데가 나왔다고 한다.
김용옥은 가라데가 곧 태권도라는 논리를 설명하는 틀로 격의(格義)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에 원래 유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불교가 들어왔다. 불교의 어려운 사상을 당장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교에 빗대어 불교를 설명한다는, 즉 의미를 맞춘다는 것이 격의의 개념이다. 즉, 한국에 택견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가라데가 들어왔다. 가라데의 어려운 사상을 당장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택견에 빗대어 가라데를 설명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김용옥은 여기에서 위대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중국 사람들은 처음에 불교를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르나, 조선 사람들에게 가라데는 전혀 이해하기에 어려운 무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꾸준히 내려온 것이었기 때문이고, 다만 좀 어렵다면 조선에 없던 품새(카타) 정도였을 뿐이다. 유교와 불교의 간극은 광대했으되, 택견과 가라데의 간극은 거의 없었다.
김용옥이 격의라는 개념을 차용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유교의 터전에 불교가 들어왔으나 유교와 불교는 엄연히 다르다는 양극단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택견은 유래가 애매한 한국 것, 가라데는 유래가 분명한 일본 것. 그러므로 태권도는 가라데에 영원히 부채의식을 지녀라. 이런 식이다. 미안하지만 가라데만 하더라도 1900년 전으로 가면 전승체계를 모른다. 무슨 비전이니 어쩌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무술은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경연되었다. 무술의 원류인 씨름은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경연되었다.
김용옥 처럼 일본식 무술에 경도된 사람은 씨름이 무슨 무술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오죽하면 택견은 무술이 아니고 놀이, 노름, 유희라고 단정하였으니까. 김용옥이 만약에 가라데에게 오키나와 씨름이라는 형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키나와 씨름이야 말로 무술 중의 무술이라고 떠들어댔을 것이다. 오키나와 씨름이 한국에서 전래된 띠씨름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면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은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 사람들은 중단없이 주먹 단련대로 수련을 했고, 수도(手刀)를 연마했다. 조선 말에 최영년(1856-1935)은 ‘해동죽지’라는 책에서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다. 옛날의 검술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서로 마주 앉아 두 손을 오락가락하여 치는 것이다. 한 손만 실수해도 얻어맞게 되니 이를 수벽타(手廦打)라 한다.”라고 하였다. 가라데를 수도(手刀) 또는 맨손으로 하는 검도라고 하는 표현도 있으니, 조선 사람들은 수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가라데의 수도만 배운 것인가?
최영년은 또 탁견에 대하여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 있는데 상대하여 서로 차서 쓸어뜨리는데 3가지 법이 있다. 최하자(最下者)는 그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그 어깨를 차고(托其肩)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그 상투를 찬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를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인을 걸어 빼앗고 하니 자연 법관이 금하여 지금은 놀음이 없다. 이름하여 탁견(托肩)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발차기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가라데의 발차기만 배운 것인가?
해방 후의 태권도 원로들이 가라데를 주로 배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분들이 가라데만 배운 것은 아니다. 여러 관의 통합이 있기 전에 한국 태권도의 대주주는 황기 관장이었으나 그는 가라데를 배운 적이 없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가 어려서 택견을 배웠다거나 만주에서 무술을 배웠다는 데 대해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느니 하며 폄훼를 한다. 그가 어떤 무술도 배운 바 없다면 어떻게 하여 해방 후 십오년 동안 한국 태권도인의 75 퍼센트를 양성할 수 있었겠는가?
오로지 가라데만 배운 사람들이 보기에는 태권도가 오로지 가라데의 변형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주장하더라도 가라데 자체가 한국식 씨름에서 비롯되었다고 가라데 무인들이 고백하는 한, 태권도는 한국의 태권도일 수 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배워주고, 상대로부터 배우는 것. 이 것이 무예나 공부의 본질이다. 김용옥 처럼 ‘일본무예 가라데’를 굳건하게 설정시켜 놓고 나서 택견을 한국의 놀이나 노름에 불과하고 택견의 발차기같은 요소를 최홍희의 날조된 폴리티킹이라고 몰아부치는 논리는 일본인들도 하지 않는 도올 만의 치사한 방법이다. 센 놈이나 이긴 자의 논리에 기대는 제국주의 똘마니의 근성인 것이다.
"수박(手搏)을 변이라 하고 각력(角力)을 무(武)라 하는데 지금의 탁견(托肩)이다. 박재(나무치기)같은 종류도 탁견이라 한다. 수박은 지금의 수벽(手癖)이며, 비록 서로 같지는 않으나 표기는 같게 해도 된다(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托肩 撲梓之類亦托肩 手搏仝ㅇ今之手癖 雖與此不同而當用此字).”
이만영은 여기에서 수박, 변, 각력, 무, 탁견, 박재, 수벽을 모두 한 종류로 보고 있다. 변, 수박, 각력이 먼저 나왔고, 후대의 사람들은 이를 탁견이나 수벽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재(撲梓)의 재(梓)는 가래나무, 판목(板木), 관(棺), 널 등의 뜻이 있다. 가래나무 목재는 재질이 치밀하고 단단하며 뒤틀리지 않아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택견하는 사람들은 이런 목재를 세워놓고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수련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가래나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을 것이므로, 이 재(梓)는 단단한 목재라는 뜻으로 풀 수 있겠다. 이는 입식타격기 계열에서 사용하는 권고대나 마키와라와 같은 종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위 문장의 한글풀이에서 슈벽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 표기를 되살려 수박을 대신하는 공식 용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는 지나친 발상이다. 수박(手搏)을 슈벽으로 표기하려면 조선(朝鮮)은 됴션, 천지(天地)는 텬디, 우주(宇宙)는 우듀 등 훈몽자회 당시로 다 돌아가야 한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집하지 않는 한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에 걸쳐 정립된 맞춤법 통일안을 다시 조선 시대로 되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수박과 각력에서 택견이 나왔다는 것은 이 기록으로 분명해진 셈이다. 수박이 주로 손을 사용한 타격기였다면 각력은 서로 엉겨붙어 싸우는 씨름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혹자는 씨름이 어떻게 택견으로 연결되었을까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인 택견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송덕기(1893-1987)는 ‘한국고유무술 택견(전통무술 택견)"에서 택견이 씨름의 형태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씨름은 서로를 붙잡고 행하지만 서로가 떨어져서 시합을 하게 되면 택견과 흡사한 동작이 나오게 되어, 택견은 유술적인 요소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택견의 실제적인 내용 속에 씨름의 기법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 씨름도 옛날에는 택견의 기법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도 택견과 씨름은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기술의 명칭만 해도 딴죽, 덧걸이, 덜미잽이, 밭장치기, 낚시 걸이 등 넘기는 기술은 거의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안자산은 ‘조선무사영웅전’에서 조선조 효종 때의 장사 김여준이 적의 약점을 살핀 후에 주먹으로 적의 코를 박치니 적이 고개를 돌려 피하였다. 때를 틈타 그대로 적의 허리를 꼲아들어 지상에 메어쳐 이겼다는 대목을 소개하며, 여기에서 보이는 각저(角觝) 기술을 유술적인 기술이라 설명하고 있다.
유술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이지만 유술적인 기법도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자산은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를 통하여 수박과 같은 한국 전통무예를 통칭 유술이라 하였는데, 고려나 조선시대의 사료에 유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한국 전통에 유술이라는 무예는 없었다고 보면 안된다. 유술은 특정의 무예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맨 몸으로 하는 무예의 통칭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의 포인트는 택견, 유도, 가라데는 모두 씨름에서 비롯되었거나 상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씨름-택견, 일본의 스모-유도, 오키나와의 시마-가라데의 관계가 그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백제의 씨름이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가 되었고, 고려의 씨름이 오키나와(류큐왕국)으로 건너가 시마가 되었다.
세계에서 한국 씨름이 전통적으로 연행되고 있는 유일한 곳은 한국이다. 택견의 명인은 이 씨름에서 택견이 나왔다고 한다. 세계에서 한국식 씨름이 전통적으로 연행되고 있는 유일한 곳이 오키나와이다. 가라데 무인들은 이 씨름에서 가라데가 나왔다고 한다.
김용옥은 가라데가 곧 태권도라는 논리를 설명하는 틀로 격의(格義)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에 원래 유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불교가 들어왔다. 불교의 어려운 사상을 당장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교에 빗대어 불교를 설명한다는, 즉 의미를 맞춘다는 것이 격의의 개념이다. 즉, 한국에 택견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가라데가 들어왔다. 가라데의 어려운 사상을 당장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택견에 빗대어 가라데를 설명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김용옥은 여기에서 위대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중국 사람들은 처음에 불교를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르나, 조선 사람들에게 가라데는 전혀 이해하기에 어려운 무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꾸준히 내려온 것이었기 때문이고, 다만 좀 어렵다면 조선에 없던 품새(카타) 정도였을 뿐이다. 유교와 불교의 간극은 광대했으되, 택견과 가라데의 간극은 거의 없었다.
김용옥이 격의라는 개념을 차용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유교의 터전에 불교가 들어왔으나 유교와 불교는 엄연히 다르다는 양극단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택견은 유래가 애매한 한국 것, 가라데는 유래가 분명한 일본 것. 그러므로 태권도는 가라데에 영원히 부채의식을 지녀라. 이런 식이다. 미안하지만 가라데만 하더라도 1900년 전으로 가면 전승체계를 모른다. 무슨 비전이니 어쩌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무술은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경연되었다. 무술의 원류인 씨름은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경연되었다.
김용옥 처럼 일본식 무술에 경도된 사람은 씨름이 무슨 무술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오죽하면 택견은 무술이 아니고 놀이, 노름, 유희라고 단정하였으니까. 김용옥이 만약에 가라데에게 오키나와 씨름이라는 형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키나와 씨름이야 말로 무술 중의 무술이라고 떠들어댔을 것이다. 오키나와 씨름이 한국에서 전래된 띠씨름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면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은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 사람들은 중단없이 주먹 단련대로 수련을 했고, 수도(手刀)를 연마했다. 조선 말에 최영년(1856-1935)은 ‘해동죽지’라는 책에서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다. 옛날의 검술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서로 마주 앉아 두 손을 오락가락하여 치는 것이다. 한 손만 실수해도 얻어맞게 되니 이를 수벽타(手廦打)라 한다.”라고 하였다. 가라데를 수도(手刀) 또는 맨손으로 하는 검도라고 하는 표현도 있으니, 조선 사람들은 수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가라데의 수도만 배운 것인가?
최영년은 또 탁견에 대하여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 있는데 상대하여 서로 차서 쓸어뜨리는데 3가지 법이 있다. 최하자(最下者)는 그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그 어깨를 차고(托其肩)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그 상투를 찬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를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인을 걸어 빼앗고 하니 자연 법관이 금하여 지금은 놀음이 없다. 이름하여 탁견(托肩)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발차기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가라데의 발차기만 배운 것인가?
해방 후의 태권도 원로들이 가라데를 주로 배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분들이 가라데만 배운 것은 아니다. 여러 관의 통합이 있기 전에 한국 태권도의 대주주는 황기 관장이었으나 그는 가라데를 배운 적이 없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가 어려서 택견을 배웠다거나 만주에서 무술을 배웠다는 데 대해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느니 하며 폄훼를 한다. 그가 어떤 무술도 배운 바 없다면 어떻게 하여 해방 후 십오년 동안 한국 태권도인의 75 퍼센트를 양성할 수 있었겠는가?
오로지 가라데만 배운 사람들이 보기에는 태권도가 오로지 가라데의 변형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주장하더라도 가라데 자체가 한국식 씨름에서 비롯되었다고 가라데 무인들이 고백하는 한, 태권도는 한국의 태권도일 수 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배워주고, 상대로부터 배우는 것. 이 것이 무예나 공부의 본질이다. 김용옥 처럼 ‘일본무예 가라데’를 굳건하게 설정시켜 놓고 나서 택견을 한국의 놀이나 노름에 불과하고 택견의 발차기같은 요소를 최홍희의 날조된 폴리티킹이라고 몰아부치는 논리는 일본인들도 하지 않는 도올 만의 치사한 방법이다. 센 놈이나 이긴 자의 논리에 기대는 제국주의 똘마니의 근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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