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비판(12) 가라데는 한국식 씨름을 친형제로 보는데...
하와이에 챨스 구딘(Charles C. Goodin)이라는 변호사가 있다. 그는 본직보다 무술 연구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 일본에 살 때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어 권법 가라데, 합기도, 검도, 거합도, 태극권 등을 배웠다. 국제 류큐 가라데 연구회(International Ryukyu Karate Research Society) 회원이기도 하고, 하와이 가라데 박물관(Hawaii Karate Museum)을 설립할 정도로 그의 무술 사랑은 남다르다.
챨스 구딘은 1999년 10월 1일자 하와이 퍼시픽 프레스(the Hawaii Pacific Press)지에 ‘가라데와 오키나와 씨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발표했다. 가라데가 씨름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이 기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키나와 씨름은 일본의 스모와 전혀 다른 대신에 한국 전통 씨름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오키나와의 가라데가 해외로 처음 진출한 나라는 일본 본토가 아니라 하와이였다. 1900년 하와이, 1922년 일본, 1945년 미국과 한국 등의 순서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가라데의 원래 모습을 추적함에 있어서 일본보다는 하와이를 더 중요한 곳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의 피식민지로 살던 오키나와와 조선 사람들이 처음으로 농업이민을 떠나 정착한 나라가 하와이였다. 이 곳에 오키나와 이민자들이 가라데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챨스 구딘은 오랜 연구를 통해 가라데가 오키나와 문화의 일부였음에 주목한다. 즉, 초기 가라데인들은 가라데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음악, 춤, 서예, 시뿐만 아니라, 검술, 다양한 병장기를 사용하는 고무도, 유술, 씨름 등에도 능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다른 무술보다도 가라데와 가장 관계가 깊은 종목을 씨름이라고 보았다. 씨름을 한 사람도 대부분 가라데를 했고, 가라데를 한 사람도 대부분 씨름를 했다는 것이다. 가라데의 폐쇄성과 씨름의 공개성은 서로 따로 논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There is a particularly high correlation between the practice of Okinawan sumo and Karate. Many of those who were active in sumo also studied Karate, and vice versa. This was a very helpful discovery because while early Karate was a "hidden" art, Okinawan sumo was a “public” sport, practiced openly and with well-known champions.)
“1900년 이전의 가라데는 던지기, 메치기, 발걸기, 관절꺽기, 목조르기, 잡기 같이 신체 접촉으로 겨루는 기술을 매우 강조하였다. (Before 1900, karate included a strong emphasis on tegumi, or grappling, which includes such techniques as throws, sweeps, trips, joint locks, chokes, holds, traps and parries.)”
“즉, 겨루기가 놀이로 이루어진 것이 씨름이며, 여기에 급소에 대한 지르기, 막기, 차기 같은 타격이 가미된 호신술이 가라데이다." (When practiced as a sport, tegumi became Okinawan sumo. When practiced for self-defense, and with the addition of the Chinese techniques of striking (particularly vital point and nerve attacks known as kyosho jutsu), blocking and kicking, tegumi became karate.
오래된 가라데의 품새(카타)를 보면 이런 요소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가라데가 원래 종합 격투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가라데가 학교 교육에 도입되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위험한 요소들이 상당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챨스 구딘이 가라데의 원형을 한국식 씨름에서 찾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키나와 씨름이 한국에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세계에서 한국식 씨름, 한국식 널뛰기, 한국식 용줄당기기와 같은 민속놀이가 오랜 세월을 두고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는 곳은 오키나와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지어로 시마(シマ-角力)라고 불리는 오키나와 씨름의 역사는 이 왕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한국 씨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샅바를 허리와 사타구니에 매지 않고, 허리에만 두른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씨름은 일본 본토의 스모처럼 비정상적으로 비육된 선수를 양성할 필요도 없었고, 전용 경기장을 만들지도 않았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이었기 때문에 들판의 풀밭이건 강가의 모래밭이건 경기장이 되었다. 경기를 치르는 데 복잡한 의식이나 형식도 필요 없었다. 덩지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처럼 오키나와 씨름은 한국의 씨름이나 택견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김용옥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에서 택견을 놀이로 보았다.
“택견은 무술이 아니다. 즉, 싸움이라는 대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가학적 기예가 아니라 놀이, 즉 놀음이나 유희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놀이라도 챨스 구딘은 씨름을 가라데와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고, 김용옥은 택견을 태권도와 완전히 별종으로 보았다. 김용옥은 택견을 공개성과 제한성의 원리로 보면서 가라데가 철저히 비전성과 폐쇄성의 원리에 지배된 만큼 택견과 가라데는 서로 상반의 대조를 이룬다고 보았다. 결국 이 둘은 그토록 틀린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존중을 해주긴 하겠지만, 결코 서로 연결을 지을 수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즉, 김용옥은 가라데에서 볼 수 없는 태권도의 발차기 조차도 택견과 전혀 관계없다면서 어떻게든 태권도의 “일본” 적통설을 고수하면서, 택견-태권도의 관계를 고유성의 착각이나 국가주의적 국수주의로 몰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챨스 구딘은 가라데와 오키나와 씨름의 관계를 친형제로 본 반면에 김용옥은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를 서로 별종이나 천적처럼 보았다. 김용옥은 태권도의 선구자들이 어려서 택견을 배웠다는 자서전의 진술조차 부정한다. 그는 택견이 시행된 곳을 서울로 한정한 다음, "그렇기 때문에도 더욱 최홍희가 12살때 함경도 촌시골구석에서 택견을 배웠다는 말 자체가 날조임이 명백하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태권도의 선구자들은 오직 가라데만 배웠어야 하고, 택견 같은 한국무술은 배웠을리도 없고 배웠다고 말해서도 안된다는 이 파쇼같은 논리는 하바드 대학 교수들에게서 배운건지 동경대 교수들에게서 배운건지 갈수록 아리송하기만 하다.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에 시작되어 7천2백여 명이 이주하였다. 이 중에는 왕비 호위 장교 등을 맡았던 구한말 군인(광무군인)들과 의병 5백여 명도 포함됐다. 십팔기를 수련하던 마지막 세대가 상당수 하와이로 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그 무렵 농장에서 일하면서 저녁에는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박용만(1881-1928)에 의해 설립된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은밀하게 가라데를 수련할 때, 조선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전쟁 훈련을 한 것이다. 물론 현대식 커리큘럼이었다.
이들 하와이 이민 가운데 분명 태권도의 조상들이 있었고, 후일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로도 건너갔다. 그런데 이들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승만이 군단장 박용만과의 불화 때문에 이민자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국으로부터 배제된 동안에 이들이 수련하던 한국 무술도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갔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자취를 더듬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후손과 교민들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전한 넋이 있기에 미국 사회에 태권도가 그토록 빨리 퍼질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챨스 구딘은 1999년 10월 1일자 하와이 퍼시픽 프레스(the Hawaii Pacific Press)지에 ‘가라데와 오키나와 씨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발표했다. 가라데가 씨름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이 기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키나와 씨름은 일본의 스모와 전혀 다른 대신에 한국 전통 씨름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오키나와의 가라데가 해외로 처음 진출한 나라는 일본 본토가 아니라 하와이였다. 1900년 하와이, 1922년 일본, 1945년 미국과 한국 등의 순서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가라데의 원래 모습을 추적함에 있어서 일본보다는 하와이를 더 중요한 곳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의 피식민지로 살던 오키나와와 조선 사람들이 처음으로 농업이민을 떠나 정착한 나라가 하와이였다. 이 곳에 오키나와 이민자들이 가라데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챨스 구딘은 오랜 연구를 통해 가라데가 오키나와 문화의 일부였음에 주목한다. 즉, 초기 가라데인들은 가라데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음악, 춤, 서예, 시뿐만 아니라, 검술, 다양한 병장기를 사용하는 고무도, 유술, 씨름 등에도 능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다른 무술보다도 가라데와 가장 관계가 깊은 종목을 씨름이라고 보았다. 씨름을 한 사람도 대부분 가라데를 했고, 가라데를 한 사람도 대부분 씨름를 했다는 것이다. 가라데의 폐쇄성과 씨름의 공개성은 서로 따로 논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There is a particularly high correlation between the practice of Okinawan sumo and Karate. Many of those who were active in sumo also studied Karate, and vice versa. This was a very helpful discovery because while early Karate was a "hidden" art, Okinawan sumo was a “public” sport, practiced openly and with well-known champions.)
“1900년 이전의 가라데는 던지기, 메치기, 발걸기, 관절꺽기, 목조르기, 잡기 같이 신체 접촉으로 겨루는 기술을 매우 강조하였다. (Before 1900, karate included a strong emphasis on tegumi, or grappling, which includes such techniques as throws, sweeps, trips, joint locks, chokes, holds, traps and parries.)”
“즉, 겨루기가 놀이로 이루어진 것이 씨름이며, 여기에 급소에 대한 지르기, 막기, 차기 같은 타격이 가미된 호신술이 가라데이다." (When practiced as a sport, tegumi became Okinawan sumo. When practiced for self-defense, and with the addition of the Chinese techniques of striking (particularly vital point and nerve attacks known as kyosho jutsu), blocking and kicking, tegumi became karate.
오래된 가라데의 품새(카타)를 보면 이런 요소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가라데가 원래 종합 격투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가라데가 학교 교육에 도입되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위험한 요소들이 상당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챨스 구딘이 가라데의 원형을 한국식 씨름에서 찾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키나와 씨름이 한국에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세계에서 한국식 씨름, 한국식 널뛰기, 한국식 용줄당기기와 같은 민속놀이가 오랜 세월을 두고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는 곳은 오키나와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지어로 시마(シマ-角力)라고 불리는 오키나와 씨름의 역사는 이 왕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한국 씨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샅바를 허리와 사타구니에 매지 않고, 허리에만 두른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씨름은 일본 본토의 스모처럼 비정상적으로 비육된 선수를 양성할 필요도 없었고, 전용 경기장을 만들지도 않았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이었기 때문에 들판의 풀밭이건 강가의 모래밭이건 경기장이 되었다. 경기를 치르는 데 복잡한 의식이나 형식도 필요 없었다. 덩지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처럼 오키나와 씨름은 한국의 씨름이나 택견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김용옥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에서 택견을 놀이로 보았다.
“택견은 무술이 아니다. 즉, 싸움이라는 대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가학적 기예가 아니라 놀이, 즉 놀음이나 유희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놀이라도 챨스 구딘은 씨름을 가라데와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고, 김용옥은 택견을 태권도와 완전히 별종으로 보았다. 김용옥은 택견을 공개성과 제한성의 원리로 보면서 가라데가 철저히 비전성과 폐쇄성의 원리에 지배된 만큼 택견과 가라데는 서로 상반의 대조를 이룬다고 보았다. 결국 이 둘은 그토록 틀린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존중을 해주긴 하겠지만, 결코 서로 연결을 지을 수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즉, 김용옥은 가라데에서 볼 수 없는 태권도의 발차기 조차도 택견과 전혀 관계없다면서 어떻게든 태권도의 “일본” 적통설을 고수하면서, 택견-태권도의 관계를 고유성의 착각이나 국가주의적 국수주의로 몰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챨스 구딘은 가라데와 오키나와 씨름의 관계를 친형제로 본 반면에 김용옥은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를 서로 별종이나 천적처럼 보았다. 김용옥은 태권도의 선구자들이 어려서 택견을 배웠다는 자서전의 진술조차 부정한다. 그는 택견이 시행된 곳을 서울로 한정한 다음, "그렇기 때문에도 더욱 최홍희가 12살때 함경도 촌시골구석에서 택견을 배웠다는 말 자체가 날조임이 명백하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태권도의 선구자들은 오직 가라데만 배웠어야 하고, 택견 같은 한국무술은 배웠을리도 없고 배웠다고 말해서도 안된다는 이 파쇼같은 논리는 하바드 대학 교수들에게서 배운건지 동경대 교수들에게서 배운건지 갈수록 아리송하기만 하다.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에 시작되어 7천2백여 명이 이주하였다. 이 중에는 왕비 호위 장교 등을 맡았던 구한말 군인(광무군인)들과 의병 5백여 명도 포함됐다. 십팔기를 수련하던 마지막 세대가 상당수 하와이로 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그 무렵 농장에서 일하면서 저녁에는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박용만(1881-1928)에 의해 설립된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은밀하게 가라데를 수련할 때, 조선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전쟁 훈련을 한 것이다. 물론 현대식 커리큘럼이었다.
이들 하와이 이민 가운데 분명 태권도의 조상들이 있었고, 후일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로도 건너갔다. 그런데 이들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승만이 군단장 박용만과의 불화 때문에 이민자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국으로부터 배제된 동안에 이들이 수련하던 한국 무술도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갔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자취를 더듬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후손과 교민들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전한 넋이 있기에 미국 사회에 태권도가 그토록 빨리 퍼질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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