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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비판(4) 당(唐)과 공(空)이 가라로 발음되는 한 고대한국을 뜻한다

후나코시 키친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20세기 이전에 가라데(から手)라는 말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표기가 공수(空手)였는지 당수(唐手)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오늘날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바는 공수(空手)와 당수(唐手) 중에 공수(空手)라는 표기가 먼저 나왔으며, 그 연도는 1905년이었다. 이 후로 공수와 당수가 번갈아 쓰이다가 결국 공수로 확정되었다. 그 연도는 1936년이었다. 결국 가라데의 한자 표기는 공수로 시작하여 공수로 끝났다.

김용옥은 가라데의 기원을 논하면서 일본에서도 긴가민가하는 여러 가지 설 중에서도 가장 일본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설을 채택하여 대한민국에 전파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일본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대로 따라간 것이다. 그는 공(空)과 당(唐), 둘 중에 당을 우선 순위에 놓고, 중국 냄새가 나는 당을 흠모한 나머지 가라데가 중국 기원이 아니냐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가라데에서 가라는 공이나 당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글자로도 표기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표기 방법이 아니라 가라로 발음되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살피는 것이다. 김용옥은 이 점을 간과하여 가라데를 중국 기원으로 한정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일본 역사를 통하여 당나라 또는 중국을 뜻할 때 당(唐)은 가라가 아니라 모로코시라고 발음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 가운데 하나인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에 고려(高麗-고구리, 고마), 신라(新羅-시라기), 백제(百濟-구다라), 당(唐-모로코시)이란 국명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에 일본은 한국을 통칭 삼한(三韓)이라 불렀다. ‘일본서기’에 보면 276년, “고구려인(高麗人-고마히토), 백제인(百濟人-구다라히토), 임나인(任那人-미마나히토) 신라인(新羅人-시라키히토)들이 함께 내조(來朝)했다. 이 때 무내숙니(武內宿禰-타케시우치노수쿠네)에게 명(命)하여 모든 한인(韓人-가라히토)들을 령(領)하여 연못을 만들고 이름하여 한인지(韓人池-가라히토노이케)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한인지의 위치는 나라현에 있는 당고지(唐古池-가라고이케)로 추청되고 있다.

또, 630년 한반도로부터 오는 사신이 묵는 숙소인 삼한관(三韓館)을 고치고 수리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648년에는 삼한(三韓)에 학문승(學問僧)을 보냈다. 682년 일본에 귀화한 삼한(三韓)의 사람들에게 조를 내려 “과거에 10년간의 조세(調稅)를 면제해 주었는데, 이미 그 기간이 끝났다. 또 더하여 귀화한 첫 해에 함께 온 자손도 아울러 역(役)의 부과를 모두 면제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을 꺼내 든 이유는 당시 일본인들이 당나라와 당나라 사람, 한국과 한국 사람의 표기를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사료를 바탕으로 분명한 사실은 당(唐)-모로코시, 한(韓)-가라, 당인(唐人)-모로코시 히토, 한인(韓人)-가라히토였다는 것이다.

일본 전국에 산재한 향토박물관이나 대형 박물관에 가보면 한반도 관련 유물이 상당히 많다. 한국식 종이를 가라카미(唐紙)라 하고 종이로 만든 우산을 가라카사(唐傘)로 부르며 청동을 가라카네(唐金 또는 靑銅)라하며, 농기구인 쟁기를 가라스키(唐犁)라 한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없던 문화나 새로운 제품에 대하여 가라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고대유물들이 모두 한국에서 전래된 것이 분명한데도, 왜 표기는 한(韓)이 아니라 하나같이 당(唐)일까?

그것은 일본이 반한(反韓) 감정으로 인해 한(韓)-가라라고 표기된 모든 인명과 지명을 당(唐)-가라, 신(辛)-가라, 공(空)-가라와 같이 다른 글자로 바꾸게 된 데서 비롯된다.

일본이란 나라는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독자적으로 서게 된 계기는 나당연합군이 가야,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면서부터였다. 일본은 자신들의 조국인 한반도가 신라에 의하여 통일이 된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한반도와 완전히 단절된 자기들만의 역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왜곡은 당연한 결과였다.

인명이나 지명에 한(韓)이라고 붙은 것은 모조리 당(唐)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현상은 글자를 그렇게 바꾸었지만 발음은 여전히 가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唐)이라는 글자를 ‘모로코시’나 ‘도오’로 읽으면 당나라, ‘가라’라고 읽으면 한국을 뜻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일본은 일반적인 한국을 뜻하던 삼한(三韓)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중국을 통칭하여 부를 때는 한토(漢土)-간도 또는 모로코시, 당토(唐土)-도오도 또는 모로코시라 하였다. 훗날 가라(から)라고 읽기도 하였으나, 이는 의도적으로 한(韓)-가라 대신에 당(唐)-가라를 뒤섞어 놓은 결과이다. 구체적인 왕조의 명칭으로 중국을 나타낼 때는 수(隋)-츠이(ずい), 당(唐)-도오(とう), 송(宋)-소오(そう), 원(元-겐(げん), 명(明)- 민(みん), 청(淸)-신(しん) 등으로 표기하고 읽었다.

18세기 말부터는 중국을 통칭하는 말로 당(唐)이나 당토(唐土)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19세기 말부터 한토(漢土)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지나(支那)를 사용했다. 중국 사람들은 지나를 경멸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였고, 중국 정부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항의를 하자 일본 당국에서는 1932년부터 공문에 지나 대신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 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에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나를 사용했다.

일본 사람들이 당(唐)을 가라로 발음할 때는 당나라라고 하는 특정의 왕조나 중국이라는 특정의 나라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韓)-가라를 당(唐)-가라로 대치하는 바람에 후일 일본 사람들도 혼란을 거듭해 온 결과였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은 당(唐)-가라를 이도 저도 아닌 그저 막연한 외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글자를 보면 당나라가 분명하고, 발음을 보면 한국이 분명한 이 당(唐)-가라를 중국과 한국 어느 나라에 적용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韓)-가라가 들어있는 지명을 당(唐)-가라로 다 바꾸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바꾸지 못한 곳이 있다. 가야인이 많이 이주하여 지금까지도 신성시되는 큐슈 남단의 산 이다. 메이지 초기에 이 가라쿠니다케(韓國岳)의 표기를 가라쿠니다케(辛國岳)나 가라쿠니다케(空國岳)로 바꾸려 했으나, 지금도 한국악으로 남아 있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 후기 때만 하더라도 조선 사람을 당인(唐人)이라고 불렀다.

1719년 신유한(1681-1752)이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시를 받기 위해 일본의 문사들이 모여들었으며 대단한 칭송을 받았다. 이 때 안내와 통역을 맡은 우삼동이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한국어 연수를 위하여 조선에 와서 삼 년간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조선 통신사를 두 번이나 대마도에서 에도까지 수행한 한국통이었다.

우삼동이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신유한에게 따져 물었다. 조선 사람의 문집을 보면 일본을 왜적(倭賊)이니 만추(蠻酋-오랑캐 우두머리)니 하여 추하게 여기고 멸시하니 무슨 까닭이냐고. 그러나 신유한은 임진왜란 후에 간행된 것들이라서 일본을 원수같이 여겼을 것이나 이제 사신을 보내어 친목을 도모하니 묵은 원한을 접자고 한다. 그러자 우삼동은 다음과 같이 따지며 대화가 오간다.

우삼동-“지금 여러 종자(從者)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왜인이라 칭하니, 저희가 바란 바가 아닙니다.”

신유한-“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무슨 유감입니까?”

우삼동-“이미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고친지 오랬으니, 하인들에게 단단히 타일러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도록 해 주십시오.”

신유한-“귀국 사람이 우리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또 우리나라 사람의 필첩(筆帖)에 쓰기를 당인(唐人)의 필첩이라 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우삼동-“국가의 명령으로는 객인(客人)이라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나 민속(民俗)이 옛적부터 귀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한 때문에 당인이라 칭하니, 이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나라를 왜가 아니라 일본, 왜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 불러주길 간청하고 있으며, 조선인 입장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조선인을 당인이라고 부르는 점에 의아해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사모하는 마음에서 당인이라 부른다니 어찌할 것인 것인가. 이 경험을 신유한은‘해유록’이라는 견문록에 담아냈다.

어쨌든 일본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한국 사람들을 일컬어 당인(唐人)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당(唐)을 가라로 발음하는 한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들어 있는 모든 당(唐)은 한국 기원임을 스스로 밝힌 사례이다. 당(唐)은 막연한 외국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한국이었는데, 이 사실을 글자 바꾸기로 왜곡하여 일본인 스스로도 헷갈리게 만든 책임은 일본에게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唐)-가라를 한(韓)-가라로 되돌려 놓아야 할 책임 또한 일본에게 있다.

일본 역사에서 가라는 다음의 순서를 따르면 된다.
1. 가라-加羅/伽羅/迦羅---------확실한 가야
2. 가라-韓--------------------확실한 고대한국
3. 가라-唐/漢------------------애매한 중국이나 한국

김용옥은 우선 순위를 무시하고 오로지 3번의 해석에만 의존하여 일본 학자들의 이러저러한 설을 추종하였다. 3번에는 애매한 중국 뿐만 아니라 애매한 한국도 포함되어 있지만, 김용옥은 애매한 한국조차 무시하고, 애매한 중국만을 가라데의 기원으로 내세웠다.

결국 가라데의 한자 표기는 공수로 시작하여 공수로 끝났다. 그러나 지금도 공수와 당수는 사이 좋게 지낸다. 공수도나 당수도나 그저 발음기호의 차이일 뿐 그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다만, ‘가라’라는 발음은 꼭 지킨다.

190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가라데를 세상에 꺼낸 오키나와의 무인들은 왜 하필 200년 전에 폐기처분된 당(唐)이라는 글자로 가라데를 표기했던 것일까?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왜 하필이면 당(唐)이라는 글자로 가라데를 표기했던 것일까? 그 당(唐)은 정말 중국이었을까? 그냥 애매한 중국이나 한국, 또는 외국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당(唐)을 공(空)으로 확정하면서도 발음은 가라라고 똑같이 했을까? 공(空)의 발음은 구우, 소라, 가라, 우쓰오, 우로 등으로 낼 수 있는데 그 중에 왜 하필 가라일까?

왜 그럴까? 아직도 이해가 안되면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 된다.

댓글 4

익명 2010.10.10
찬성입니다.
익명 2010.10.20
결론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라데의 원조는 결국 우리 한인(韓人) - 이군요 !
익명 2010.10.20
좀 더 검증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지만, 가락국 기원설은 가라데의 가라라는 부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를 가라(가야)라고 불렀다고 하니, 즉 가락국의 무술이라는 의미로 해석할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락국 기원설의 내용입니다.
ㅇㅇ 2026.04.25
이해가 되네요 일본 쪽에서는 3국의 멸망에 크게 실망하여 저 당나라 놈들 하고 손절한 거군요 그것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