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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國技) 제정의 비밀(1)


국기란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예를 말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국기를 정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다.

일제의 강점기에 동아일보는 1925년 11월 15일자에 일본 씨름하는 집을 국기관이라 하여 장충단에 설립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어 이 신문에는 1927년 덴마크에서는 야구를 국기로 삼고자 미국으로부터 수입하였고, 1933년 독일은 테니스, 만주는 축구, 1935년 소련은 야구를 국기로 채택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1959년 이 신문은 "필드하키가 고려의 국기인 장치기(격구)가 현대화된 것으로 영국에서 1870년부터 일반화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로 보아 고려의 국기는 격구였다.

그렇다면 조선의 국기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24개의 무술 종목이었을 것이다. 격구는 ‘무예도보통지’ 24개 종목 가운데 포함되었으나 실전무술이 아니라 오락종목으로 맨 나중에 포함되었다. 한국이 고대로부터 자랑하는 활쏘기는 아예 24개 종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말과 활을 다루는 기술은 예로부터 최고 수준이었고, 당시 주적관이 일본이었음을 감안할 때 큰 연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국기는 활, 말, 십팔기라고 보면 된다. 권법은 십팔기 열 여덟 종목의 하나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단 한 종목만 선택하여 조선의 국기로 삼는다면 당연히 활(궁술/궁도)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한국 전통무예 다섯 종목이 국기로 제정되었고 , 그로부터 25년 후 태권도가 단일 종목으로 한국의 국기로 확정되었다. 해방 후 6․25전쟁과 남북분단, 5․16혁명과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 1971년 3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던 김운용에게 ‘국기태권도’라는 친필휘호를 써줌으로써 국기가 제정되었다. 1972년 김운용은 국기 태권도의 전당인 국기원을 설립한다.

사실, 한국의 국기를 무엇으로 정할지에 대한 고민은 해방이 되자마자 시작되었다. 1945년 10월 16일자 자유신문에 의하면 “조선국기협회 발기대회를 지난 12일 조선연무관에서 개최하고 씨름협회장 이극노 씨를 비롯하여 궁도, 역도 등 각계의 체육 권위자와 중학교 체육담임 교원들이 모여 조선국기의 연구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안건을 토의하고 산회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가 따로 없고, 중학교에서 고등 과정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체육교사는 문무를 겸비한 인사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대학 과정으로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경성제국대(서울대), 숙명여자전문학교(숙명여대), 대구의학전문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등이 있었으나,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는 유도부가 있었지만 해방 후 국기의 제정 과정에서는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해방이 되자 전국의 무인들이 모여 국기 제정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 회의의 결과는 명칭을 조선국술협회로 정하고, 씨름, 궁도, 역도, 무술, 기마술을 국술로 지정하여 해방 후 최초의 개천절에 성대한 제전을 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의 국기는 씨름을 비롯한 다섯 종목이었고, 어느 한가지로 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보름 후인 11월 2일, 개천절 봉축 초청장이 전국에 뿌려진다. 단군전봉건회, 조선국술협회, 대종교회 공동으로 보낸 내용은 며칠 후인 11월 7일(음력 10월 3일) 오전 10시 경성운동장에서 개천절 봉축의식과 제1회 조선국술대회, 국풍회, 고악 및 국기 행사 등을 연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매일신보는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개천절 행사가 수만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극노가 개회사를 하였고 십팔기(十八技), 궁도, 역도 등 우리나라 고유의 연무가 뜻 깊게 거행되었다는 요지로 보도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바는 이 행사가 해방 후에 무예와 관련된 최초의 전국적인 행사였으며, 조선국술협회라는 단체에 의해 주최되었고, 그 종목 가운데 하나가 십팔기로 표현되고 있으며, 일본이 전파하고 떠나 버린 유도나 검도는 전혀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행사를 주도한 이극노는 누구인가? 그는 1911년에서 1914년까지 만주의 동창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1915년 백산학교에서 독립군을 육성하였으며, 포수단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에는 상해 유학생 총무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해방 전인 1937년에 이미 조선씨름협회 회장에 취임하고, 해방 후인 1946년 국민체육장 기성회 회장과 조선국술협회 위원장이 되는데, 이런 이력으로 보아 그가 무인(武人)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인 것이 이극노는 오히려 그 이전인 1927년 베를린종합대학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언어학의 석학이었다. 그는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평양으로 간 후 돌아 오지 않아 남한에서는 공식적인 이름이 사라졌다가 최근에 독립기념관 건립 등으로 명예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역사의 기록을 근거로 볼 때 고려의 국기는 격구, 조선의 국기는 궁도, 해방 직후의 국기는 씨름, 궁도, 기마술, 무술(십팔기), 역도였고, 1971년에 국기가 태권도로 정해졌다. 여기서 십팔기란 원래 창술, 검술, 권법 등을 합친 종합무술이지만 총포의 발달로 병장기가 사라지면서 권법만으로도 십팔기라고 불렸다.

해방 직후의 국기는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회의와 토론을 거쳐 다섯 종목으로 정했으나, 국기 태권도는 당시 권력자의 친필 휘호 한장으로 정해졌다. 김운용은 회고록에서 당시 씨름과 축구가 국기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고 밝혔다.

문제는 지금의 국기원이나 태권도협회의 전신은 조선국술협회임이 분명한데, 현재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댓글 4

익명 2010.09.23
ㅉㅉㅉ ~~~~~필자님의 열정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오랫만에 또 이런 좋은 글들을 보니 감개가 무량할 뿐입니다. 마지막 까지 필자님의 고군분투를 기원합니다.~~~~ 화이팅~~~
익명 2010.09.23
감사합니다. 필자 올림.
익명 2010.09.25
國技....國 技 跆 拳 道.....라는 휘호는 태권도 명칭제정에 열혈이셨던 최홍희장군님이 한문으로 휘호하신 것을 기화로 공개적이 되었으며, 이휘호를 본 적이 있습니다.정확한 휘호날자는 기억이 없는데...이경명교수님이 자료를 확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이후 국기태권도의 거대한 뜻을 무조건 받아들인 태권도인들에 회자되다 김운용 전 국기원장의 득세때 박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태권도인들 사이에 당연시 하게 되었고,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 국기태권도 라는 엄청난 글귀를 널리 무조건적으로 독과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필자의 끊임없는 자료발굴과 제시에 ...저는 요즈음 재미난 연속극에 빠져 다음호를 기다리는 필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익명 2010.09.28
박종환님 이메일 부탁드립니다 제 이메일은 hero999usa@yahoo.co.kr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