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비판(3) 중국이 가라데의 기원이라는 저자에 대한 공개 질의서
다음은 가라데가 중국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펼친 김용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공개 질의서이다. 간략하게 열가지 질의만 추렸다.
이 제안은 태권도의 역사를 정립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인 만큼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한다. 그가 이 토론마당에 직접 나올 형편이 안될 경우 태권도 단체에서 공개 세미나를 개최하면 필자는 적극적으로 토론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1. 당수(唐手)-가라데를 만든 오키나와 왕국은 역사를 통틀어 당(唐)나라와 전혀 교류를 한 적이 전혀 없다. 당(618-907)나라는 물론이고, 이후의 송(960-1279)나라, 원(1271-1368)나라와도 교류가 없었다. 당수가 당나라나 중국을 거쳐 오키나와로 왔다면 754년 동안 사람의 왕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2. 오키나와가 중국과 최초로 교류를 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가 성립한 후인 1372년의 일이다. 만약에 명대(1368–1644)나 청대1644–1912)의 무예가 오키나와에 들어왔다면 그 명칭은 당수(唐手)가 아니라 명수(明手)나 청수(靑手)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중국 역사를 통틀어 오키나와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나라는 명나라였고, 중국 무술이 발호하기 시작한 시대도 명나라였는데, 가라데의 표기는 어찌하여 명수(明手)가 아닐까?
3. 중국의 역사와 무예사를 다 뒤져도 당수(唐手)라는 무술은 없다. 명수(明手)나 청수(靑手)는 필자가 예를 들기 위해 만든 말이므로 물론 없다. 오키나와 무인들이 중국의 것을 받아들였다면 당수라는 무예가 중국 역사를 통틀어 한번이라도 나와야 할 것 아닌가?
4. 가라데를 소림사 권법과 관련지어 설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억측이라는 김용옥의 탁월한 견해를 인정한다. 1908년 10월 오키나와의 권성(拳聖)으로 불리는 이토스 야스쯔네(絲洲安恒)는 “가라데는 불교나 유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은 무술의 사상적 배경을 노자와 주희로 잡고,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술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가, 중국무술에 국한 되는 것인가, 아니면 가라데도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뜻인가? 가라데가 유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데, 그 괴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가라데의 사상적 바탕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김용옥의 기철학인가?
5. 중국무술은 고대로부터 종교나 양생법과 관련이 되어 있음에 반하여, 훨씬 후대인 가라데의 기원은 병장기 사용은 물론이고 조르기, 메치기, 누르기, 찌르기 등을 포함한 실전적인 종합무술이었다. 중국무술은 명나라 대에 이미 실전성을 상실하고, 투로와 표연 중심으로 흘렀다. 과연 중국무술이 오키나와에서 와서 전혀 다르게 실전적으로 변한 것인가?
6. 명나라와 교역이 활발해지자 오키나와는 명에 뱃사람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1392년 중국 남방의 복건 사람들(삼십육성)이 이주하여 살면서 양국의 조공에 종사했다. 이들이 무술을 전파했으리라는 가설이 있으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무사집단과는 무관하다. 삼십육성 수입설에 대하여 공감하는 김용옥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의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설 말고 정확한 근거를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거나 책을 쓴지 2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근거를 댈 수 있는가?
7. 김용옥은 저서에서 당수(唐手)와 공수(空手)의 일본어 발음인 가라데에 대하여 매우 잘 설명하고 있지만 당(唐)-가라를 중국에만 연결시키려 하다보니, 공(空)-가라로 바뀐 것을 일종의 말장난(pun)으로 취급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전만 찾아봐도 당(唐)-가라는 옛 한국을 이르는 말임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일부러인지 질 몰라서인지 한, 삼한, 한국과 관련된 풀이를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8. 일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수(隋) 다음의 중국 왕조가 뭐냐고 물어 보면 훈독인 가라(から)가 아니라 운독인 도오(とう)라고 답한다. 일본 사람들이 당(唐)을 가라(から)라고 훈독할 경우에는 중국의 옛 왕조가 아니라 옛 한국이라는 뜻이며, 이외에는 막연한 외국, 막연한 선진국, 막연한 중국으로 쓰이기도 했다. 김용옥은 확실한 한국이 아니라 막연한 중국을 채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9. 당수(唐手)-가라데라는 이름이 오키나와에 등장한 것은 1908년인데,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극한으로 팽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본은 1895년 중국(청)과 전쟁을 벌여 이겼으며, 중일간의 극한대립은 노골화 되었다. 이런 싯점에 이름에서 중국냄새가 나고 그 기원도 중국에서 왔다는 무술이 공개마당에 나온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당수(唐手)라는 이름이 등장함과 동시에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정식 과목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도 일본 본토가 아니라 일본의 피식민지를 거쳐 마침내 병합되고만 나라인 오키나와에서 공식적으로 일본의 인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일본 경찰이라면 왜 하필 당(唐)이냐고 이런 이름을 만든 후나코시 키친을 당장 잡아 가둬야 하지 않았겠나?
10.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다 뒤져도 가라라고 불리는 나라는 없었고, 가라는 오직 옛 한국에만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대한국 가라의 후예들이 일본과 오키나와 열도로 떠밀려 망명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 단순한 표착이나 망명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주를 통하여 정권을 창출한 것은 물론 선진문명을 전파한 주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키나와의 무예가 가라데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필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상입니다.
이 제안은 태권도의 역사를 정립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인 만큼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한다. 그가 이 토론마당에 직접 나올 형편이 안될 경우 태권도 단체에서 공개 세미나를 개최하면 필자는 적극적으로 토론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1. 당수(唐手)-가라데를 만든 오키나와 왕국은 역사를 통틀어 당(唐)나라와 전혀 교류를 한 적이 전혀 없다. 당(618-907)나라는 물론이고, 이후의 송(960-1279)나라, 원(1271-1368)나라와도 교류가 없었다. 당수가 당나라나 중국을 거쳐 오키나와로 왔다면 754년 동안 사람의 왕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2. 오키나와가 중국과 최초로 교류를 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가 성립한 후인 1372년의 일이다. 만약에 명대(1368–1644)나 청대1644–1912)의 무예가 오키나와에 들어왔다면 그 명칭은 당수(唐手)가 아니라 명수(明手)나 청수(靑手)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중국 역사를 통틀어 오키나와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나라는 명나라였고, 중국 무술이 발호하기 시작한 시대도 명나라였는데, 가라데의 표기는 어찌하여 명수(明手)가 아닐까?
3. 중국의 역사와 무예사를 다 뒤져도 당수(唐手)라는 무술은 없다. 명수(明手)나 청수(靑手)는 필자가 예를 들기 위해 만든 말이므로 물론 없다. 오키나와 무인들이 중국의 것을 받아들였다면 당수라는 무예가 중국 역사를 통틀어 한번이라도 나와야 할 것 아닌가?
4. 가라데를 소림사 권법과 관련지어 설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억측이라는 김용옥의 탁월한 견해를 인정한다. 1908년 10월 오키나와의 권성(拳聖)으로 불리는 이토스 야스쯔네(絲洲安恒)는 “가라데는 불교나 유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은 무술의 사상적 배경을 노자와 주희로 잡고,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술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가, 중국무술에 국한 되는 것인가, 아니면 가라데도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뜻인가? 가라데가 유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데, 그 괴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가라데의 사상적 바탕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김용옥의 기철학인가?
5. 중국무술은 고대로부터 종교나 양생법과 관련이 되어 있음에 반하여, 훨씬 후대인 가라데의 기원은 병장기 사용은 물론이고 조르기, 메치기, 누르기, 찌르기 등을 포함한 실전적인 종합무술이었다. 중국무술은 명나라 대에 이미 실전성을 상실하고, 투로와 표연 중심으로 흘렀다. 과연 중국무술이 오키나와에서 와서 전혀 다르게 실전적으로 변한 것인가?
6. 명나라와 교역이 활발해지자 오키나와는 명에 뱃사람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1392년 중국 남방의 복건 사람들(삼십육성)이 이주하여 살면서 양국의 조공에 종사했다. 이들이 무술을 전파했으리라는 가설이 있으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무사집단과는 무관하다. 삼십육성 수입설에 대하여 공감하는 김용옥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의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설 말고 정확한 근거를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거나 책을 쓴지 2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근거를 댈 수 있는가?
7. 김용옥은 저서에서 당수(唐手)와 공수(空手)의 일본어 발음인 가라데에 대하여 매우 잘 설명하고 있지만 당(唐)-가라를 중국에만 연결시키려 하다보니, 공(空)-가라로 바뀐 것을 일종의 말장난(pun)으로 취급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전만 찾아봐도 당(唐)-가라는 옛 한국을 이르는 말임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일부러인지 질 몰라서인지 한, 삼한, 한국과 관련된 풀이를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8. 일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수(隋) 다음의 중국 왕조가 뭐냐고 물어 보면 훈독인 가라(から)가 아니라 운독인 도오(とう)라고 답한다. 일본 사람들이 당(唐)을 가라(から)라고 훈독할 경우에는 중국의 옛 왕조가 아니라 옛 한국이라는 뜻이며, 이외에는 막연한 외국, 막연한 선진국, 막연한 중국으로 쓰이기도 했다. 김용옥은 확실한 한국이 아니라 막연한 중국을 채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9. 당수(唐手)-가라데라는 이름이 오키나와에 등장한 것은 1908년인데,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극한으로 팽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본은 1895년 중국(청)과 전쟁을 벌여 이겼으며, 중일간의 극한대립은 노골화 되었다. 이런 싯점에 이름에서 중국냄새가 나고 그 기원도 중국에서 왔다는 무술이 공개마당에 나온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당수(唐手)라는 이름이 등장함과 동시에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정식 과목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도 일본 본토가 아니라 일본의 피식민지를 거쳐 마침내 병합되고만 나라인 오키나와에서 공식적으로 일본의 인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일본 경찰이라면 왜 하필 당(唐)이냐고 이런 이름을 만든 후나코시 키친을 당장 잡아 가둬야 하지 않았겠나?
10.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다 뒤져도 가라라고 불리는 나라는 없었고, 가라는 오직 옛 한국에만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대한국 가라의 후예들이 일본과 오키나와 열도로 떠밀려 망명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 단순한 표착이나 망명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주를 통하여 정권을 창출한 것은 물론 선진문명을 전파한 주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키나와의 무예가 가라데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필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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