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세상에 쓰이지 못한 기재-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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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환(秦鐘煥, 1803~1854)은 조선 철종 때인 1862년에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지은 인물행적기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향견문록은 중인층 이하의 평범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무예도보통지 기창(진종환)
조선시대잡과합격자총람(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을 참고하면, 진종환의 본관은 풍기(豊基)이고 자는 중경(重磬)․호는 교릉(嶠陵)이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진재백(秦載白), 할아버지는 진동(秦洞), 아버지는 규장각 각감을 지낸 수일재(守一齋) 진동석(秦東奭)이었다.그는 20세 때인 순조 22년(1822)에 3년마다 한번 씩 열리는 식년시(式年試)에 역과 7등으로 합격하여, 관직이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진종환은 성품이 담박하여 마치 무능한 것 같이 보였고, 행동거지가 소탈하여 부귀한 집안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서예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가 종요(鍾繇, 151~230)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서첩을 베껴 그리면 실물과 진배가 없었고, 특히 김생의 글씨를 더욱 좋아하여 그 글씨를 본보기로 삼았는데, 그의 글씨체는 힘이 있고 원숙하고 고아한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 같았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빼어나고 깊은 물 속 같으면서도 빛난다고 할 정도로 소릉(少陵) 즉,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진수를 깊이 터득한 듯하다. 악부체 여러 작품도 모두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와 조나라의 비분강개한 기상이 녹아 있었다.
한번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가 용만(龍灣), 지금의 의주에 머무를 때, 당시 상서 우당(羽堂) 조병현(趙秉鉉, 1791~1849)이 여우와 담비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자, 그가 그 모양과 성질을 낱낱이 들어 이야기하고, 뭇 짐승에 대해서도 남김없이 품평하는 것이었다. 이어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약재인 본초에 대해서도 이름을 들며 물어보니 줄줄 외워 대답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 상서 조병현이 깜짝 놀라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를 천재라고 하였다. 그는 평소 바둑을 좋아하여 거의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러 판을 내리 이긴 적은 없었으며, 국수와 대국하면 꼭 한 점을 져주었다.
언젠가 어떤 권세가가 그를 만나보고자 했더니 그는 달가워하지 않으며, “다섯 말의 쌀로 허리를 숙이는 것을 옛사람은 수치로 여겼는데, 하물며 평원군(平原君)의 문객조차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을 하였다. 평원군은 전국시대 사람으로 본명은 조승(趙勝)이고 조(趙)나라의 재상을 여러 번 한 인물이다. 그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어진 성품에 빈객(賓客)을 좋아해서 수하에 수천 명의 식객(食客)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했었는데, 진종환은 그런 평원군의 문객조차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인품이 못한 권세가와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권세가와 가까운 사람들이 진종환을 욕하고 헐뜯는 소리를 마구 쏟아냈지만, 끝내 권세가와 대면하지는 않았다. 진종환은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나라의 은혜를 산과 바다처럼 입었으나 어리석은 못난 내 주제로는 티끌이나 이슬만큼도 보답할 수가 없다. 단지 내 분수껏 먹고 마시며 세상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게 사는 것이 아마도 자연스럽게 보답하는 길이 되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보석사 감로탱화에 보이는 갈래창(진종환)
유재건이 그에게 “그대의 재주를 장차 어디에 쓰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만약 언제 내가 군대에 있게 된다면, 군사들을 용맹스러우면서도 방략을 아는 자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비장한 목소리로 웃으며 노래부르니, 맑고 매끄러운 곡조가 속세의 노래에 견줄 바 아니었다고 한다.그는 1854년 그의 나이 52세에 죽었다. 죽을 때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내가 이별의 말을 하며 흐느껴 울자, 그는 “당신의 명도 역시 다하였으니 불원간 나를 따라올 것이네”라고 하고, 손을 저어 물러가게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그해 겨울에 아내 또한 죽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정씨에게 시집간 그의 작은누이가 언문(한글)으로 그의 평생 행적을 적고 친척을 시켜 장중규(張仲圭)에게 “돌아가신 오라버님께서 좋아하신 분으로는 선생만한 분이 없습니다. 길이 전해질 글을 한 편 지어주소서”라고 부탁을 하자, 장중규가 만사를 지어주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진종환은 다양한 능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는데, 병사들을 가리키면 용맹하면서도 병법을 아는 자로 만들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무예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완력은 너무 뛰어나 20근짜리 철장을 구부릴 수 있었고, 몇 장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으며, 근육이 단단하여 손으로 눌러보면 흡사 철판을 더듬는 것 같았다. 강한 쇠뇌를 당겨 쏘면 다섯 발 중 4발을 맞힐 정도였다. 담력도 있어서 한번은 맨손으로 숲 속의 호랑이를 쫓아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창을 쓰고 봉을 휘두른 데 모두 묘한 이치를 터득했다. 언젠가 달밤에 유재건이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그를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 무예를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그가 작대기를 들고 사나운 기세로 18반 무예를 대략 보여주었는데, 어찌나 가볍고 민첩한지 꼭 날아다니는 듯하여 산새들이 모두 놀라 지저귈 정도였다.
진종환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에 대해 알 수 없는데,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무예 특히, 창술이나 봉술에 뛰어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 재능을 꽃피워보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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