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이종우 편] ‘태권도와 조직’(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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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체육관과 지도관

이종우 사범
한체(한국체육관)는 6․25이후에 제가 들어간 곳입니다. (이경석) 관장이 민족주의 중도파였는데, 그 양반이 쫓겨났죠. 내쫓기니까 저희도 같이 나왔습니다. 유도만 했습니다. (중구 초동) 을지로 3가에 일제시대 박문사라는 절을 도장으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들어갔습니다. 얘기를 했더니, 거기 부관장이 좋다고 했습니다.옛날에 제가 몇번을 둘러본 적 있었는데, 그 영감님이 저를 알아보더니, ‘이 선생 오랜 간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나이도 어린데, ‘아 선생은 무슨 제가 선생입니까. 나이도 어린데’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동에 있는 한국체육관을 맡아 하게 됐습니다(정리자 주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연무관 출신인 이교윤의 이야기가 다르다. 이교윤은 한체에 자신이 먼저 들어갔고, 후에 이종우의 갈등으로 한무관과 지도관으로 파생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연무관 출신인 이교윤 씨는 소년부로, 무선학교인가를 다녔습니다. 학교에 다닐 형편도 안되고 해서 제가 경찰에 신창영이라고 아는 사람이 있어서 서울 시경 통신과에 취직시켰습니다. 통신과에 있다가 6․25가 나고 해서 동대문 서에 있었는데, 나를 병역기피자라고 고발을 했습니다. 제가 화신(백화점)에 근무할 때인데, 나이가 어려서 소집이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어갔다고 하니까, 여러 사람이 힘을 써서 나를 빼내 주었다.
지도관(智道館)이라는 명칭은 제가 처음 지었습니다. 전상섭 선생은 운동으로도 제 선생이시지만, 고등학교 은사이기도합니다. 그 양반을 생각해서 명칭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체육관은 유도부나 역도부 등이 있었으므로 지도관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체도 (어떻게 보면) 지도관의 지관인 것입니다. 지방에 지부를 낼 때는 지도관으로 내고 교육도 다 지도관 내용으로 했습니다.
윤쾌병 선생은 지도관 심사가 있으면, 저보다 그 분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해서 모셨습니다. 운동도 제가 가르치고 심사를 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 물품비용이 발생했지만, 심사비만 받고 가셨습니다. 저는 심사 명단하고 돈하고 다 맞춰서 드렸는데, 한푼도 안 받고 그냥 가셨다. 그 후로 부르지 않았다. 기억나는 제자들로는 박동권․김영태․황만연․안대섭 등이 있습니다.
협회와 협회장들
6․25 피난가서 대한공수도협회라고 해서 부산 바닷가에 제가 아는 사람 사무실에다가 간판을 붙이기도 했습니다(정리자 주 : 강기석의 '태권도 반세기 인물과 역사'를 보면, 부산 피난 시절 국제시장 통에 있던 건국대 부속 유치원을 빌려 가라테를 가르쳤으며, 학생유도연맹 부위원장이었던 친구 김인화 등과 협의해 대한공수도연맹을 결성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대한태수도협회는 6․25직후에 창설되었습니다. 태수도냐, 당수도냐, 공수도냐 별 말이 많았습니다. 태수도라 한 것은 손만 쓰는 게 아니고 발도 쓰니까, 우리나라의 택견이라는 말에서 태자를 쓰고 해서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황기 선생은 화랑도의 화와 당수도의 수를 가져다 화수도라 해서 스스로 협회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우리 스승들과도 만나 많은 말을 나눴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종우 원로가 펴낸 태권도교본
태수도라고 하면, 공수도 맛이 나기 때문에 손 수(手) 보다는 주먹 권(拳)이 낫다 해서 태권도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사직공원에 있는 양반(송덕기 선생)이 택견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어설펐습니다. 그건 일종의 춤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정리자 주 : 신동아와의 인터뷰와 강기석의 태권도 반세기 인물과 역사를 보면, 이종우가 한남동 외무부장관 공관 위에 살 때 그 건너 이슬람 교회 너머에 최홍희가 거주하여 둘이 자주 만났다고 하면서, 5․16이 나고 얼마 안돼서 태권도와 가라테를 절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한남동 최홍희 자택에서 이남석․엄운규 등과 함께 이종우를 불러서 설득과 함께 압력을 가했지만,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자 태수도라는 중간점을 찾았다고 한다. 수(手)의 사용에 대해서 무덕관 출신의 서상렬은 수박도의 수자를 딴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후 최홍희가 체육회에 압력을 넣어서 태권도로 바꾸었다고 한다) .협회가 생기고 나서 저는 부회장인가 한 번 하고 다 기술심의회 의장을 했습니다. 국외까지 생각을 고려하면,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양보를 했습니다. 자리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4대 회장을 한 노병직 선생은 7~9개월 정도 하셨는데, 말이 많고 심통을 부려서 ‘노 선생님 이번 회장 한 번 하시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 내가 뭘’ 그러면서 그 뒤에는 말 한마디 없으셨습니다. 개성에 계시다가 (6․25가 일어나면서) 아현동인가 봉래동인가에서 송무관을 운영하셨습니다.
5대와 6대 회장을 한 김용채 씨는 저의 중신을 해주었습니다. 나한테는 잘했는데, 내가 나이가 5~6세 위여서 가끔가다 수틀리면 응석같이 부리면서 나보고 장가가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장가가라고 해서 안 팔리는 남자하고 안 팔리는 여자 맺어준 사람이 바로 김용채 씨입니다(신동아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42세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김운용 씨는 지관의 전계배 씨인가가 1군 사령부의 헌병인가 호위병으론가 있었는데, 어느 날 청와대에 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 출세했구나 대통령 만나러가니’하니까, 부관실에 송요찬 장군 통역장교로 있는 사람 만나러 간다고 했습니다. 나한테도 한번 가서 인사나 하라고 했습니다. 1군사령부 부속실에서 만났습니다. 전계배 씨가 ‘관장님도 한 번 가시죠’ 해서 갔다가 김운용 씨를 만나게 됐다. 회장 한번 해보라고 했는데,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거절을 했습니다. 내가 도와준다고 해서 협회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국기원 할 때도 청와대 배경이 있어서 도움을 봤습니다. 지도관에 있을 때, 명예 6단을 주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저하고 원수가 됐습니다(정리자 주 : 신동아와의 인터뷰를 보면, 김운용에게 이종우가 협회장을 부탁하자, 김운용이 세분한테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3명을 이종우는 박종규 실장, 김종필 최고위원, 박정희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다).
윤쾌병 선생이 협회에 참여를 안 한 것은 자신이 없었던 듯 합니다. 한국의 실력이 가라테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겨루기를 하지 않고 형만 가지고 말을 할 뿐 겨루기 실력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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