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원로들의 이야기-이종우 편] ‘태권도와 조직’(1부)

[원로들의 이야기-이종우 편] ‘태권도와 조직’(1부)

조선연무관 권법부와 전상섭 선생


(정리자 주 : 이 글은 이종우 원로를 인터뷰 한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종우 원로가 노환으로 기억이 조금 혼미한 탓에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기존의 기록들과 다른 내용이나 오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리자 주로 보완했다)

조선연무관 권법부와 전상섭 선생

(정리자 주 : 이종우는 1928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연무관 권법부 출신이다. 6,25이후 지도관 관장을 지냈으며, 대한태수도협회와 대한태권도협회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 강기석의 '태권도 반세기 인물과 역사'와 2002년 '신동아'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이종우의 부친은 경기도 이천이 고향으로 서울로 이사와서, 천도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병희 선생의 행랑채에 살았으며, 이종우는 6남 2녀 중 끝에서 두 번째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종우 사범의 2002년 신동아와 인터뷰

저는 해방되고 보이스카웃에 들어갔습니다. 아는 사람이 좋게 생각하는 단체라며 너도 들어와라 해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이죠. 남산 올라가기 전 충무로쪽으로 들어오는 길에 경성극장이 있고 그 옆에 지금 세종호텔 옆으로 일본 절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떠난 후) 그 절을 차지하기 위해친구 서정선이와 5~6개월 정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서정선의 매형이 시킨 것이었죠. 보이스카웃도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결국은 다 내쫓겼습니다. 그 때 (서정선이에게) ‘운동을 뭘 하나 해야한다고 하니 ‘18계를 하는 데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냐’고 물었더니 ‘(소공동) 조선호텔 건너편 지금 상공회의소 뒤에 위치한 조선연무관에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연무관은 일제시대 유도 고도깐[講道館] 조선지부였습니다. 조선연무관은 이경석(李景錫) 선생이 (종로구) 수송동에서 하다가 (이곳을) 접수해서 운동을 하던 곳이었죠. 3분의 1은 다다미를 걷어내고 권법부를 만들어 가라테를 가르쳤고 3분의 2는 유도를 가르쳤습니다. 그곳에 가서 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18계를 한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가라테 기술을 배운 것이었습니다. 일본 말을 다 빼고 중국식 ‘권법’이라고 하며 가르쳤습니다. 조선연무관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주먹지르기였습니다. 발차기도 안 시켰습니다. 형하고 1보 구미테(약속대련), 3보 구미테 등을 배웠습니다.

조선연무관권법부는 1946년 3월 3일에 개관했습니다. 관비를 내야하는데, 낼 돈이 없어서 3월 22일인가 23일가에 입관해서 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권법부’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범은 전상섭 선생이었습니다. 전상섭 선생은 일제시대에 동양척식대학에 유학하던 시절에 시도류[絲東流] 가라테를 익혔던 분입니다. 그 분이 해방되기 전에 돌아오신 걸로 생각됩니다(정리자 주 : 시도류는 이토스[絲州]와 히가시온나[東恩納]의 권법을 사사한 마부니 겐와[摩文仁賢和, 1889~1952]가 이토스의 시[絲]와 히기시온나의 도[東]를 한자씩 따서 자신의 유파를 명명한 것이다. YMCA권법부 출신으로 강덕원을 창설한 박철희도 마부니 겐와 계열로 보고 있다. 하지만, 조선연무관 권법부 출신으로 한무관을 창설한 이교윤은 미야아게 나게요리(미야기 쵸준의 오류인듯)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호성은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에서 미야기 쵸준과 도야마 간켄에게 가라테를 배웠다고 하고 있다).


1947년 조선연무관 야유회 모습


조선연무관에 권법부를 두게 된 것은 전상섭 선생이 그 곳에서 유도를 잠시 했었기 때문이다. 전상섭 선생은 저와 10살 이상 차이나지 않았으므로 (가장 높이 잡으면) 1919년 생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7~8살 많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일본 동양척식대학을 다녔는데, 그곳에서 시도류 가라테를 배워 4단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성격이 매우 온화했습니다. 경신고등학교 교사를 하시다가 그 후에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 위치한 무슨 학교로 가셨죠(정리자 주 : 이호성은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에서 경성전기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종우가 언급한 동자동에 위치한 학교로 여겨집니다. 경성전기학교는 지금의 수도공고이다). 경신고등학교는 일제시대에 종로 5가에 있다가 안양갑부가 인수해서 정릉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제가 해방 후 태평동에 살 때인데, 그분이 저보고 경신으로 오라고 해서 전차로 돈암동 종점까지 가서 신흥사 쪽으로 해서 아리랑 고개 넘어서 배밭이 많던 곳을 지나 천양암 별장 옆쪽으로 해서 들어갔습니다. 그 학교를 5년 다녔죠(정리자 주 : '신동아' 기사에 따르면, 이종우는 1949년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6,25가 터지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고 한다).

전상섭 선생은 민족청년단에 계셨는데, 6,25가 일어나자 소집을 당해, 민족청년단 옷을 입고 나갔다가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분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양반이었죠(정리자 주 :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은 이범석이 중심이 되어,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창설한 반공주의적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이다).

윤병인 선생도 일본에서 와서 처음에 우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태극권이다 뭐다 중국에서 배운 것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후 7단이던 윤쾌병 선생도 일본에서 돌아와서 봉술 등을 가르쳤습니다(정리자 주 : 윤쾌병(본명 윤희병)은 1950년 4월에 권법부 사범으로 취임하였는데, 당시 가라테 7단이었다). 이분들이 일본에서 많이 배운 것이 아니어서 크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전상섭 선생의 동생 전일섭 씨는 수련을 하던 중에 세관에 들어갔는데, 첫 발령을 군산세관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무원보다는 도장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해서 도청 소재지가 있는 전주로 옮겼습니다. 전라북도 지역의 책임을 다 맡아서 했습니다. 동기로는 나이가 많고 우리가 ‘날건’이라 부르던 곽 모가 있는데, 지금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또 최창열,배영기,엄기윤 등이 있었전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 때 덩치가 큰 편이어서 운동을 잘했습니다. 권법으로는 1단인가 2단인가 했던 기억이 납니다(정리자 주 :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1년 넘어서 초단이 되고 3단이 되었는데, 6.25가 발발했다고 한다). (태수도협회에서) 4단 승단 심사할 때는 맹장 수술로 인해 서류심사로 통과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 나를 빼놓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다.)

조선연무관 권법부 시절에는 유도가 점점 줄어들고 저희가 하는 무술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잘못하기라도 하면 ‘너 제명이다’고 하면서 내쫓겼습니다. 다시 찾아와서 용서를 빌면, 마지못해 용서하기도 했습니다. 연무대회도 많이 했습니다. 뛰어차기나 송판이나 기왓장을 깨는 것도 많이 했습니다. 송판이나 기왓장은 돈이 들어서 될 수 있으면, 품새하고 겨루기 중심으로 했습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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