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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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날의 연무대회

박철희 선생의 수련모습
YMCA권법부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연무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날 YMCA권법부는 그동안 배웠던 형 등을 시범보였는데, 나는 ‘도(刀)’를 가지고 박희태는 ‘봉(棒)’을 가지고 서로 약속겨루기를 했었죠. 저는 도술을 몇 개월 동안 혼자 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는데, 선생이 사용하시던 청룡도 모양의 칼(그 모양은 칼 몸의 등에 가지가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에 나와 있는 언월도(偃月刀)를 연상하면 된다. 대신 자루가 길지 않고 짧았다)을 가지고 연습을 했다. 저는 그 날 뛰어 옆차기로 한 치(3.3cm) 송판 두 장을 격파하는 시범도 보였습니다. 이날 ‘장(張)○○’라는 청도관 유단자는 관수(편손끝)로 송판 격파를 시범보이다가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었습니다(웃음).
이날엔 여러 도장의 관계자들이 방문했습니다. 당시 선생은 여러 선생들과도 친분이 있었기습니다. 이원국(李元國) 선생하고도 친분이 있었구요 황기(黃琦) 선생도 가끔 와서 구경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조선연무관의 전상섭 선생과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학교를 다니신 걸로 기억되는 김기황 선생도 YMCA권법부 교범으로 계셨습니다(당시 교범은 사범보다 한 단계 아래를 말한다). 내 기억으로 김기황 선생은 발차기 같은 것을 간혹 가리킨 적은 있었지만, 정식 수업을 맡아서 진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김기황 선생과 윤 선생님은 서로 토조산 형을 많이 연무하셨습니다.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한 고(故) 최홍희 씨도 가끔 YMCA권법부에 들렀습니다. 윤 선생님 하고는 같은 고향 출신이어서 친하게 지냈었죠. 최홍희 씨가 YMCA에 와서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구요. 저는 한 쪽 구석에서 혼자 수련하기를 좋아해 개인 수련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최홍희 씨가 윤 선생님에게 “형님 국방경비대에 와서 좀 지도 좀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윤 선생님이 “안 해, 자네가 참령(지금의 소령)인데, 내가 어찌 참위(지금의 소위)달고 가르칠 수 있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홍희 씨도 윤 선생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탁드린 건데, 윤 선생님이 일언지하에 거절해서 조금 무안하기도 했을겁니다.
연무대회를 한 다음날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윤 선생님과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죠. 들리는 말에 의하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셨다고 계셨다고 하는데 그 안에서도 김주호 씨와 강무관을 세운 이동주씨 등과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YMCA권법부로 와서 운동한 걸로 기억되는 김주호 씨가 윤 선생님을 보호하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김주호씨는 동중학교를 다니며, 조선연무관 권법부에서 자띠까지 하고 선생님을 따라 다니던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정리자 주 : YMCA권법부 출신으로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는 김병수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윤병인 선생이 북송되었고, 1967년 경에는 북한의 호위총국에서 격술지도원으로 재직하다가, 격술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1969년이나 1970년 경에 함경남도의 시멘트 공장으로 보내진 이후, 폐암으로 1983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YMCA권법부에서 파생되어 나온 관은 홍정표 씨가 먼저 무도원으로 시작했다가 내가 맡아 이름을 바꾼 강덕원 외에 이남석, 김순배 씨가 이끈 창무관, 이동주 씨가 대구에 만든 강무관 등이 있습니다. 강무관 출신에는 현 조증덕 씨가 생존해 계시죠.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이 택견협회를 이끌고 있는 이용복 씨 입니다. 또 이남석 씨의 제자가 서대문에서 충무관을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산인가 어디에서 성균관대학교 주장을 하던 사람이 도장을 열었는데, 관 명칭은 무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권재화 씨가 이곳 출신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포병장교 시절

광주제일고 수련 모습
17살 때인 1950년 6․25가 일어나자, 12월에 육군 포병 간부 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1951년 3월 3일, 육군소위로 임관을 했죠. 포병을 선택한 이유는 포병장교는 나이 제한이 없어 입대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장교들이 많다보니, 타 장교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한 장교가 같은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 장교의 팔목을 잡고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간 후 기합을 질렀다. 그랬을 뿐인데, 그 장교가 놀랐는지 곧바로 사과를 해서 아무 일 없이 끝난 적도 있었습니다.군 복무기간 중에도 혼자 수련을 꾸준히 했다. 1953년에는 광주 상무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 때 유도하고 검도를 하던 전남경찰국 무덕전에서 개인 수련을 하였다. 유도사범이었던 김소춘(金小春) 선생이 검도장에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운동하던 걸 구경한 것이 기억난다.
광주에 있으면서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권법부를 만들어 지도했습니다. 당시 청도관에서 운동을 하던 우종림 대위(후에 의료보험공단 이사장을 역임)가 나한테 ‘여기서 운동 좀 할 수 있느냐’라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 3명을 데려온 게 시초가 되었습니다. 무덕전에서 같이 수련을 하게 되었는데, 우종림 대위가 전속을 가게 되면서 운동할 데가 없어지기도 했죠. 그렇게 해서 광주제일고등학교에 권법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물론 정규과목은 아니고 지금의 방과후 과외할동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는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전국 고등학교에서 무예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무예를 배우면 싸움만 한다고 문교부에서 중지시키라는 공문을 내려보낼 정도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죠. 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도 교원들이 폐지시키자고 말이 불거져 나왔고 투표까지 하게 되었다. 결과는 ‘폐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장준환 교장선생님이 “이걸 왜 폐지시킵니까”라고 하면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죠. 교감선생님은 “문교부에서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폐지하기를 건의했습니다. 학교에 피해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런데, 장준환 교장선생님은 “강당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아요. 쓰레기 한 점 없잖아요. 상무대의 장교 그 양반이(박중위) 와서 가르치는 걸 뭐하러 폐지시킵니까”라고 하면서 일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으로 가기 전까지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개인적인 수련과 지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제일고등학교 출신으로는 군 장군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임복진, 강원대 법대 학장을 지낸 김정후, 건국대 사회과학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한정일 씨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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