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2부)

[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2부)

권법부 수련 시절


이 글은 사운당 박철희 선생이 2005년 구술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2008)'에 수록하였다. 이후 빠진 부분들을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조금 더 보완하였다. 이 글 또한 가능한 한 구술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으며, 기존 주장 혹은 사실과 다른 점에 대해서는 「정리자 주」로 보완하였다(정리자 주 : 박철희는 1933년 생으로 YMCA권법부에서 권법을 수련하였으며, 6․25 이후에는 강덕원을 창설하였다. 육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 경무대 무도 사범, 대한태수도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파사권법'이 있다.)

박철희 선생님 정근상과 오른쪽 고 윤병인(아랫줄 첫번째) 선생님



제가 YMCA에서 태권도를 수련할 당시, 권법(YMCA에서 가르치는 무예를 윤 선생님은 권법이라고 불렀다)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사내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나도 어릴 때부터 무술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두발당상으로 초가지붕에 얼린 고드름을 깨는 등의 기본적인 발차기는 배우지 않고도 구사할 줄 알았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죠. 하지만 본격적인 무예 수련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경농 18기’라는 분이 무술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이 모집광고를 그를 찾아 왔습니다. 당시 윤병인 선생님의 별명은 ‘경농 18기’였는데, 선생이 경성농업학교에 재직하면서 권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물론 저는 그 전에 우연히 선생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경복중학교 1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 해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연․보전(지금의 연․고전)이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축구시합을 보러 갔었다. 축구시합이 끝나고 장내 아나운서가 정구장에서 ‘18기 연무’가 있다고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곧바로 안내방송에서 일러준 장소로 뛰어갔습니다. 막 역도 경기가 끝나고 연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죠. 체격이 좋은 어떤 사람이 태극띠(띠 윗부분의 붉은색․가운데는 하얀색․아랫부분은 파란색, 윤선생님은 태극띠라고 부른 적은 없고 박철희 본인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를 두른 사람이 품새 등을 선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윤병인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띠는 조선연무관권법부의 전상섭 선생님도 맺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장권과 팔기권 등을 선보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철희 선생님 정근상


그 후 동네 레슬링 선수를 하던 선배들로부터 ‘경농 18기’라는 이름을 자주 들을 수 있었는데, 때마침 또한번 수련생 모집 광고가 났죠.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나 외에 500여명 정도가 등록을 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러다 보니 체육관에 모든 관원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을 3개로 나누어서 지도해야 할 정도였죠. 그 때 수련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수련생들은 한 동작을 하고 난 다음에는 얼마간을 그대로 멈춰 있어야 했습니다. 2층에 있던 농구장에서 했는데, 자리가 모자라 강당 및 1층에 있는 역도장까지 치우고 운동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리를 옮겨가며 지도를 해야 했기에 한바퀴 다 돌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운동하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련은 방과 후 오후 4시 반부터 시작됐습니다. 선생님의 본업은 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청량리에서 종로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려 종종 지각을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원래 말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설명 없이 동작을 하면 눈치껏 따라해야 했습니다. 품새 등 당시에는 형의 이름이나 동작에 대한 설명을 아예 안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배워서 알고 있긴 하지만 동작들의 구체적 명칭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유겨루기를 하게 되면 성인부와 학생부가 2열로 나눠 섰다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겨루었습니다. 윤 선생님하고도 겨루기를 했는데, 겨루기를 할 때 선생은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게 권법부 한쪽 구석 모퉁이에 몰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는 처음 권법을 시작할 때 15살 정도였으므로 어린애 축에 들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누구보다 수련에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덕분에 개관이래 2년 반 동안 유일하게 개근했다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본의 아니게 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기법이나 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수련한 지 2달 반 정도 지난 후에 8급 심사를 봤습니다. 심사 내용은 기본형 1절부터 5절까지였는데, 8급에 합격한 사람은 나 외에도 180명 정도였습니다. 성인부에 있던 이동주, 이남석, 이창용, 김주갑, 김동주 씨 등은 학생부와 달리 4급 혹은 5급 심사를 봤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YMCA권법부는 8급에서 5급까지는 하얀띠를, 4급부터 1급까지는 파란띠를 착용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승급이나 승단이 빨리 이뤄지지 않아 내가 4급 이상인 파란띠를 따는데, 1년 반이나 걸렸습니다. 1단 승단은 1949년(단기 4282) 11월 15일에 보았습니다.

그 후 2단 승단 시험을 봤습니다. 그 때 성인부 어른들은 통과가 됐는데, 저는 승단에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대련을 해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학생부 수련생들이 훨씬 잘했습니다. 떨어지자 속이 상했습니다. 나보다 늦게 입관한 김순배 씨도 2단 승단을 했습니다. 서운했죠. 저만 떨어진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죠.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윤 선생님도 안 됐었는지 “(실력은) 2단인데, 다음에 (승단)해”라고 다독여 주셨죠.

당시 나는 권법 외에도 한국체육관에서 역도, 건우체육관에서 8시부터 이원영 선생으로부터 유도를 수련하는 등 하루에 3가지 운동을 했습니다.

[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은 총 7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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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사진설명오류아니유? 2010.01.18
단증인데 정근상이라고 했네. 초단 단증. 이거 매우 중요한데..다년간 수련해서 초단을 준다는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이런 단증은 정말 가보여. 좋은 자료 감사. 이제 앞으로도 도장에서 단증주게 합시다. 국기원원장 맨날 구속되니 그게 나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