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김용채 편] ‘태권도와 나’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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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이야기들
이 글은 태권도 원로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원로 개인의 기억이므로 알려진 사실과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원로들의 말을 그대로 정리하려고 했으며, 이견이 있거나, 기존의 사실과 다른 사실은 <정리자 주>로 처리하였습니다.
(정리자 주: 김용채는 강덕원 출신으로 1967년부터 1971년까지 5대와 6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지냈으며, 제7․9․12․13대 국회의원, 서울시 노원구 초대 민선 구청장(1996년), 한국토지공사 사장(2000년), 건설교통부 장관(2001년) 등을 역임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해외사범 파견에 관한 것입니다. 협회에서 정식으로 단증을 발급해, 4단 이상에게 사범자격을 주던때였습니다. 그러한 사범들 중에 해외에 나가고 싶어하는 이들이 생겨났는데, 1960년대 초만 해도 여권이 나오려면, 해당 국가의 말을 할 줄 알아야 했고, 재정보증인이 있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의 신원보증서가 필요했죠.
이들이 해외로 나가겠다고 여권을 승인해 달라는 하는 요구가 협회로 빗발쳤습니다. 당시 제가 대한태권도협회장 겸 7대 국회의원 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무부 장관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여권과장에게 말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여권과장은 1983년에 아웅산 사건으로 사망한 이범석 씨였습니다. 이범석 씨는 후에 외무부 장관과 국토통일원 장관까지 지낸 인물이기도합니다.이범석 씨에게 저는 “태권도인은 해외에 나가서 적수공권으로 나가서 돈을 벌어 고국에 송금을 하고 또 태권도를 우리말로 가르치고 태극기까지 걸어놓고 예까지 시키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 외무부의 직원들이나 대사들도 못하는 것을 태권도 사범들이 하고 있지 않느냐”고 설득했습니다. 이범석 씨가 내게 그런 선례가 있냐고 물어왔죠. 이때가 이준구 씨가 미국 워싱턴 소재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도를 가르칠 때였다.
그래서 이준구 씨가 20여 명의 상원, 하원 의원들도 가르치며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즉시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했죠. 늦은 시간이어서 다 퇴근하고 안 받을 수도 있었는데 마침 한 사람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마침 이준구 씨와 잘 아는 사람이어서 내가 했던 말과 똑 같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이범석 씨가 내일부터 회장님이 싸인만 하면 무조건 내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때부터 한 달에 100명, 200명 정도의 국내 사범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년에서 5년 내에 안에 외교관계가 없던 동구권까지 1,500명 정도의 국내 태권도 사범이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간 사범들이 열심히 가르쳐서 2~3년 정도가 지나자, 이들에게 배운 이들이 태권도 종주국의 본 도장을 보고 싶다고 관광을 겸해서 국내에 들어왔다. 하지만 막상 국내에 들어와도 보여 줄 곳이 없었다. 6․25 이후 먹고살기도 바쁜 때였으므로 번듯한 도장은 찾아볼 수 없던 시기였다. 그나마 보여줄 만한 도장이라고는 지도관의 한체(한국체육관) 정도가 있었는데, 이 곳도 태권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도와 검도 등도 하는 종합체육관이었습니다. 당시 그럴듯한 건물이 없어서 한체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중앙도장을 건립할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민관식 씨가 그 때 대한체육회 회장을 하다가 문교부 장관이 되었을 때였죠. 민관식 씨에게 태권도협회의 실상을 말하고 예산을 부탁했다. 민관식 씨가 그러마하고 약속을 했지만, 막상 예산안이 올라온 걸 봤는데, 태권도에는 예산이 한 푼도 책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조금 놀랐죠. 문교부도 당시 예산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공화당 원내총무에게 얘길 해서 예결위원으로 들어가 문교부 예산 중에 3억인가 3천 만원인가를 중앙도장 건립비로 책정을 하게했죠. 그리고 중앙도장을 지을 부지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양택식 씨를 찾아갔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알고 있던 분이어서 그 분에게 외진 데도 좋으니 서울시 땅 3천 평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종로 한복판의 빈터를 원했지만, 양택식 시장은 땅이 없다며, 현재 국기원 자리에 3,400평을 내 주었다. 지금이야 서울 한 복판이지만 그 당시는 외곽이어서 조금 황당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보니 허허벌판이고 너무 외져서 사람들이 올까 걱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죠. 그래도 그 땅이라도 얻어낸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정리자 주 : 김운용 씨는 국기원 건립비 책정은 김용채 씨가 했지만, 국기원 부지는 자신이 양택식 시장을 만나 마련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서로 엇갈리는 부분이다).
예산까지 마련해 놓고 태권도 협회장을 두 번이나 했고 국회의원 업무로 너무 바빠서 더 이상 태권도 협회 쪽의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협회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정치에 전념을 하게 되었죠, 내 뒤에 협회장을 맡은 협회장을 맡은 김운용 씨가 중앙도장을 완성하고 국기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그 땅이 왜 아직까지 국기원 소유로 되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서울시에 임대료까지 물고 있다니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협회장을 그만 둔 이후 태권도 행사 등에 전임 회장이었지만 한 번도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왜 런 홀대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입니다.

고 최영의 씨가 자신의 저서 백만인의 가라테에 싸인을 선물했다.
내가 협회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적합한 인사로 김운용 씨가 거론되었습니다. 하루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를 보자고 해서 만나러 갔더니, 김운용 씨가 내 보좌관으로 있는데, 그 사람이 태권도협회장을 하고 싶어한다고 하면서 물려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왔죠. 그래서 좋다고 임원들과 얘기를 나눠보겠다고 하면서 태권도인이 아닌데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박종규 실장은 (김운용) 본인이 꼭 하고 싶어하는데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임원들과 얘기를 해보겠다고 하고 나왔죠. 협회 임원들과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오히려 청와대 경호실장 보좌관직을 맡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태권도 세계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죠. 여하튼 그 분의 공은 인정해야 합니다.
아참 , 잊어버릴뻔 했습니다. 당시 제가 협회장직을 맡았을 때에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최홍희 씨와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군대 태권도 보급에 관해서는 공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태권도협회장을 하기 전부터 가끔 만났는데, 협회장이 되어서 제가 국제태권도연맹의 부총재로 들어가고 최홍희 씨를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으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같은 태권도인끼리 서로 비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반목하는 것이 그리 보기 좋지 않아서, 최홍희 씨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협력을 부탁했던 것이었죠. 협회장을 그만 두고 나자 최홍희 씨가 어느샌가 캐나다로 쫓겨갔습니다. 국제연맹 대신 세계연맹이 창설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을 붙들어야 하는데, 왜 밖으로 내보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죠. 내가 9대 국회의원(1973~1979)이었을 때인 1975년 혹은 76년도에 당시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최홍희 씨를 다시 국내로 불러 들였으면 한다면서 나보고 중재를 해 달라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캐나다로 가서 최홍희 씨를 만나 설득을 했다. 정부에서 상당한 자리 보장과 함께 여러 혜택을 주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하며 설득했지만, 최홍희 씨의 입장에서는 정부를 믿지 못했는지 거절을 해 무산됐습니다.
또 극진회관을 창설한 가라테인 최영의 씨하고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 사범들이 해외에 진출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극진회관 최영의 관장의 제자들과 부딪쳤습니다. 일본에 가서 최영의 씨를 만나 이제 시작하는 태권도 사범들이 너무 힘이 드니 경쟁은 하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내 말을 듣더니 최영의 씨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한국 사람인데 어떻게 부딪치게 하겠냐하면서 내일 당장 전세계 도장에 지령을 내려 도와주면 도와주었지 방해는 하지 말라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매우 고마웠습니다. 그 후로 해외 태권도 사범과 극진회관과는 부딪치는 일이 절대 없었죠.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 최영의 씨를 국내에 초청해 저녁을 대접하고, 숙식비를 대신 내주는 걸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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