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원로들의 이야기] 김용채의 ‘태권도와 나’ (1)

[원로들의 이야기] 김용채의 ‘태권도와 나’ (1)

태권도와 인연 그리고 강덕원 시절


이 글은 태권도 원로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원로 개인의 기억이므로 알려진 사실과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원로들의 말을 그대로 정리하려고 했으며, 이견이 있거나, 기존의 사실과 다른 사실은 <정리자 주>로 처리하였습니다.

(정리자 주: 김용채는 강덕원 출신으로 1967년부터 1971년까지 5대와 6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지냈으며, 제7․9․12․13대 국회의원, 서울시 노원구 초대 민선 구청장(1996년), 한국토지공사 사장(2000년), 건설교통부 장관(2001년) 등을 역임했다.)



저는 1932년 10월 5일생입니다. 조선대학교 경제학과와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검도나 유도 등에 관심이 많이 있었지만, 학생 시절에는 무예 수련을 하지 못했고 군대 들어간 이후에 당수도를 처음 접하게 되었죠. 해방 초기에는 태권도의 명칭이 통일되지 않았었는데, 당수도, 공수도, 권법 등의 용어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 중에도 가라테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지만, 주로 와세다나 주오[中央]대에 유학하던 인사들이 가르쳤습니다.

저와 태권도의 첫 인연은 미국 포병학교에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1954년에 광주 포병학교에서 포술학 교관을 할 때였습니다. 청도관 출신의 고재천 씨하고 같이 근무한 것이 인연이 되어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22살 때였을 것입니다. 동료 장교들끼리 쉬는 시간 혹은 일과 끝나고 여가 시간에 수련하자고 해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고재천 씨는 당시 계급이 나와 같은 대위였는데, 말이 없고 운동을 아주 잘했으며,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는 청도관 당수도 3단 정도의 유단자로, 당시 포병학교 교관들을 지도했습니다. 그 때 고재천 씨를 선생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친구들끼리 당수도를 할 줄 아는 실력있는 친구가 잘 모르는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정도였습니다. 도복이 없어 속옷 차림으로 운동을 하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당시 평안이나 밧싸이 등의 형과 대련, 격파 등을 수련했는데, 4년 동안 수련해서 고재천 씨한테 2단을 받았습니다. 물론 어떤 증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2단 정도 된다고 말을 해 주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았죠. 고재천 씨는 우리가 나온 다음에 광주에 청룡관을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육군 본부에 와서 생활하다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와 있던 YMCA권법부 출신 박철희 씨하고 같은 포병이고 해서 자주 만났습니다. 그 때 박철희 씨는 창무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도 창무관에서 4주 정도, 아주 잠시 동안 운동을 했습니다. 1956년 9월 경에 박철희 사범을 중심으로 당시 소령이었던 최선규 씨 등 몇 사람과 같이 강덕원을 창설하였습니다. 학생이었던 이금홍, 박세혁, 나종남, 손병찬, 김병수, 정화, 최익진, 이양일 등도 같이 참여했습니다.

강덕원은 권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박철희 사범은 중국 무술이나 택견과 많은 교류를 했으며, 󰡔파사권법󰡕이라는 책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협력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강덕원의 위치는 박철희 사범의 집이 있던 동대문 신설동 근처의 창고였습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수련을 하다가 주인이 비워달라고 해서 청량리에 위치한 정화여중의 강당을 빌렸습니다. 정화여중의 콘크리트 강당은 매우 낡았었죠. 하지만 이조차도 낮에는 사용할 수 없어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2시간 동안,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1시간 동안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주로 이곳에서 수련을 많이 하게 된 것이죠.

협회장을 맡기 전인 1965년에 일본 가라테와 교류전을 할 때 대표단 단장을 맡았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일본 고단자들과의 대련에서 모두 승리를 했습니다. 당시 일본 가라테에는 이단옆차기나 이단앞차기가 없어서 우리 측 선수들이 사용하니까 일본 쪽이 막지 못한 채로 공격을 허용하며 쓰러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서로 형 시연을 하는데, 일본측에서 태권도가 아니고 가라테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에 우리 측은 ‘그래도 조금 다르지 않느냐’라고 답을 했습니다.

대한태권도 협회장 시절


국회위원이 되었을 때 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인 대한태수도협회에서 8단을 받았습니다. 그 때 노병직 선생이 회장이었다가 도저히 못하겠다고 해서 자리를 내놨는데, 이금홍 씨가 국회의원이고 태권도 고단자인 제가 적당할 것 같다고 추천을 해서 협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금홍 씨와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 살았으며, 이금홍 씨의 형과 내가 친구여서 잘 아는 사이였던 인연으로 이금홍 씨가 저를 추천한 것 같습니다.

1971년 제5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이 되었습니다. 협회 사정이 어렵다보니 국회의원 회비를 타서 협회 일에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각 관별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던 시기여서, 태권도계를 협회 중심으로 단합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각 관의 관장님들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면서 협조를 부탁드렸습니다. 관의 단합을 위해서는 통일된 형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형 제정위원회’를 만들고 이종우 씨를 임명해, 형을 통일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차례 회의를 했는데, 택견 등의 다양한 기술 등이 가미되려 했습니다.

제가 회장을 맡았을 때는 이미 태권도가 경기단체로 대한체육회에 가입되어 있어서 대한체육회 건물에 태권도협회가 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협회는 있었지만 경기규칙은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범마다 서로 다른 점수를 주던 시기였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경기규칙을 정해, 경기단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경기화를 위해서 호구 개발에 노력하기도 했었는데, 처음에는 대나무를 넣은 호구였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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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가라데 2010.01.03
그저 가라데 이네요. 태권도를 했다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그냥 가라데를 했다고 말씀하심이 올&#51014;듯 하네요 ^^
택권 2010.01.03
회장님 늘 건강 하시죠? 태권도의 초석을 다진 회장님께 감사함을 드림니다. 당시 원시적 태권도가 이제 세계를 호령 하고 있습니다.국운상승 입니다
^^ 2010.01.04
가라데님은 맞춤법부터 공부하고 글쓰는 것이 좋을긋 하네요^^
이해불문 2010.01.04
원로태권도사에 최홍희라는 이름이 빠진다면 그글은 신뢰를 못느끼겠네요. wtf 국기원이 말하는 태권도역사에 신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뒤 늦게 알은 정통태권도의 역사!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역사가 2010.01.06
이렇게 계속 역사를 왜곡하고 사기치다가는 언젠간 우리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 무너집니다 정보화 시대에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고있는 태권도협회나 관련되시분들 나중에 어쩔려고 그러신지 이젠 사람들이 알만큼 알고 있는데 아직도 태권도역사를 ....아이고 머리야"띵띵"
ㅇㄹㅇㄹ0112 2010.01.06
이젠 시대가 시골사람이 서울가면 코베어가고 귀베어가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신차리고 하세요 후대 태권도인을 위해서 당신들은 죽으면 끝이지만 잘못된 역사를 알고 그게 진실인것처럼 전달된다면 그건 잘못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