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진가라데와 부산본부 사람들

넘버 3에서 송강호가 "옛날에 최영의 씨 라는 분이 계셨지!"라는 말로 시작해 "전세계를 돌면서 맞짱을 뜨셨던 분이지"와 "그냥 손 내릴 때까지 때리는 것야!"로 끝나는 대사가 있다. 혹자는 여기서 최영의 씨가 유명한 조폭인가? 라는 생각하는 관객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최영의 씨는 조직폭력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도인이다!
해방 후 일본에서 홀로 현재의 실전공수도인 "극진(極盡)가라데"를 창안한 한국계 일본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 전통공수도라고 불리우는 송도관류(松濤官流), 강유류(剛柔流), 사동류(絲東流), 화도류(和道流)의 4대 유파로 정착 되어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전통공수도의 시합 규칙은 실제로 가격하지 않고 닿기 직전에 멈추는(끊어치기 룰)을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룰이 과연 실전성이 있는가? 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이후 수많은 실전(말그대로 전세계를 돌면서 맞짱을 떴다)을 통해 현재의 극진가라데를 완성했다. 이후 1969년 9월 20일에 도쿄체육관에서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대회를 주최했고 이 경기방식은 그 당시로서는 최초인 치고, 차고, 받기 등 실전위주의 획기적인 것이었기에 어떤 신문에서는 "살인대회"라고 비판하기까지 했었다.
"일본의 많은 유파들이 서로 정통파를 자처하며 으스대기만하지, 실은 우물안 개구리인 것이다. 그들은 형(形)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체조나 무용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공명정대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공통규준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 이번 대회를 개최한 취지이다." 이 말에 그의 가라데정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영의 9단은 공정한 경기를 함으로써 호기심에 찬 눈을 막을 수 있고, 타류(他流)의 경기를 꺼려해 온 일본 가라데의 공개화를 꾀할 수 있다는 목적하에 최 9단은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을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주먹으로 안면타격을 금지규정과 모든 단체들의 참여를 위해 대회를 개방한 것)
당시의 맞서기(대련)방식은 1회 승부의 토너먼트로 하되, 제한시간은 3분이며,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을 때- 쓰러지거나 전의를 잃었을 때-에 심판이 한판승을 선언하고 경기는 끝났다.
그러나 손이나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거나 낭심을 차는 것은 반칙이며 감점이 3점 이상 되면 반칙패가 되고, 승부를 가리지 못할 때에는 주심과 부심 4명이 합의, 다수결에 의하여 판정을 하였다.
그리고 격파경기에는 그 회전의 승자부터 참가하며, 8분짜리 송판을 매수에 제한없이 정권(正拳), 수도(手刀), 팔꿈치 치기, 발로 차기 등 네가지로써 격파한 총매수가 많은 자가 승자가 되었다.
현재의 규칙은 본시합 3분과 연장전 2분으로 나누어지며 강한 타격으로 상대에게 충격을 주었을 때 절반 그리고 KO되었을 때 한판승(절반이 2번이면 한판승)으로 나누어진다. 연장전은 최대 2회까지 이루어지며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체중판정으로 가며 체중이 10kg이상 차이가 나지 않을 시에는 격파로 승부를 가른다.
이후 이런 직접 타격제를 사용하는 공수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 새로운 유파를 "실전 공수도"라고 하며, 이를 창시한 극진회관(최영의 씨가 만든 단체)이 가장 대표적인 유파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공수도는 실전공수도와 전통공수도로 크게 나누어 지며, 각각 여러 유파로 나누어져 있다.(현재 유파는 300∼5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이 실전 공수도 계열에도 여러 유파가 있으며 관절기와 글러브 사용, 던지기 등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단체들도 있다.
이제 독자들도 공수도가 어떤 것이며 각유파에 대한 특성에 대해서 약간은 이해 했을 줄로 믿는다. 그럼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해 보자. 우선 본인이 사범대리와 약간의 안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우선 기자는 인터넷으로 파악한 정보를 기반으로 부산 동래 지하철 역에 내렸다. 하지만 광혜병원 근처라는 말만 듣고 도장을 찾는 것은 점점 힘들어졌다. 30분 이상을 해맸을까? 전화번호를 기억해 놓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결국 근처 유흥가까지 가서 혹시 이 근처에 있으까? 라는 황당한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발걸음을 지하철 역쪽으로 옮기는 도중에 오토바이를 탄 중국집 배달원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하는 마음에 두 배달원에게 "혹시 이 근처에 새로 생긴 가라데 도장을 아십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약간 생각을 한 배달사(?)는 "저기 바로 앞에 있는 거 아닙니까?" 라는 의외의 답을 기자에게 던졌다.
정말 이럴 때 쓰는 속담이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일까! 기자의 바로 길건너 좌측에 있었던 것이다. "극진 가라데 도장".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도 왠지 쑥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과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서로에 대한 소식을 끊은지 오래되었지만 극진 가라데도장이 개관했다는 소식에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간부 시험을 준비중이라는 사람에서, 기자의 도통한 모습에 혹시 일본인 관계자가 아닌가? 라는 애띤 관원의 당황한 경례에서 약간의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장발에 수염난 모습을 상상하시길).
우선 흔히 근처 체육관이라고 불려지는 도장들과는 달리 청결하고 단아한 모습까지 느껴지는 간결함이 극진회관에서 승인한 지부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헬스크럽의 카운터와 같은 모습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국식 도장과는 차원이 다르며 정말 열심히 한국에서 최영의 씨의 극진 혼(魂)을 살려 보겠다는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개관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고 사범인 김경훈 씨는 결혼준비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있어 사범대리인 김일남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한국에 극진지부가 정통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많은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에 극진 지부가 성립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나마 1970년대에 한국 극진 가라데 본부가 세워졌으며 지부장으로 박제근 씨가 임명되었다."
- 그러나 당시의 사회 단체법상으로는 태권도, 검도, 합기도, 유도 등의 메이저 무술이외 타 무술들에게는 많은 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고 있었으며 일본문화에 대한 개방정도가 낮아 일본 극진가라데 본부의 한국 지부로써 비공식적인 활동을 해왔고 그다지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맞는 말이다."
- 현재의 부산지부장인 김경훈 사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현재 부산지부의 김경훈 사범은 극진회관에서 인정하는 2단이며, 97년 일본으로 공수도 유학을 가 이전의 전통 공수도에서 느낀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김경훈 사범은 고등학교 때 한국 공수도 연맹의 전통공수도를 수련한 사람이다(공수도는 단을 따기가 어렵다. 특히 극진회관의 경우는 전일본선수권자도 3단인 경우가 흔하다)."
- 그럼 이전의 95년에 개관한 일도관 시절의 공수도는 무엇인가?
"당시 전통 공수도에서 느낀 한계를 나름대로의 실전공수도 스타일로 승화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실전 공수도는 극진회관과는 별도의 의미로 독학한(?) 실전공수도 였다!"
여기서 차를 마시면서 한국지부의 상황에서 약간의 담소가 있었다. 자이언트 샌드백을 보면서 이것은 한국에서 제일 큰 샌드백일 거라는 말에 서로 웃음을 지었다.
- 김경훈 사범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다. 한국지부를 대표한다면 어느 정도를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김경훈 사범은 일본 중부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고 야마구찌현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으며 후쿠오카 지부에서 지도원 생활을 했고 대마도 분도장에서도 지도원생활을 했다. 그리고 후쿠오카 지부의 아베기 요후미(5.6회 세계대회대표) 씨의 내제자로써 인정 받은 후에는 수련에 열중했으며 나중에 마쓰이 쇼케이(현 극진회관 관장, 한국명: 문장규) 씨에게 한국지부의 대표성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2001년도 1월 10일에 완전히 귀국해 도장을 열게 되었다."
- 현재 일본 극진회관과의 교류는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도장을 열 때 어려움은 없었는가?
"후쿠오카 현내의 도장들과의 교류시합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8월과 9월쯤에 현 극진회관 관장인 문장규 씨가 한국에 오면 정식으로 도장 오픈식을 열 계획이다. 도장을 열 때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고 가라데가 일본 무술이라는 인식 때문에 약간 애로가 있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없는 시설, 특히 수련도구와 도복을 구하기가 힘들어 전부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 극진 가라데 만의 독특한 수련방식이 있다면?
"간단하다. 진짜 때린다는 것! 기자도 해보셔서 아실테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실까?(서로 웃음), 그리고 고등학생들 이하는 모두 부모님 동의 받아야 한다는 것, 다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 마지막으로 이건 기자의 주관적 질문인데 태권도 정통성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선 자신의 수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이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았다 받지 않았다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현재의 태권도는 완전히 다른 무술이다. 그리고 운동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런 논쟁을 좋아한다. 그리고 타 무술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며 오직 수련만이 길이다!(막 입관한 옆의 관원도 한마디 한다 - 단련이 가장 중요하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리고 옆의 초보 관원도 한마디 한다면?
"극진을 사랑합시다.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공식적인 취재가 끝난 후 개인적인 관계로 다시 돌아가 서로의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같이 했다. 운동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야기, 전일본대회선수권대회에 출전하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재중인 김경훈 사범의 결혼준비 등, 한국 사회에서 소수인 우리들이 그래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서로 헤어졌다. 기자도 시간이 나면 수련에 참여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무술하는 사람들은 다 변태라는 농담에서 진솔한 의견까지 나눌 수 있어 힘든 삶속에 약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어서 기자에게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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