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東劍道 이야기]⑥해동검도의 탄생, 최초의 도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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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와 일치한 장백산 스승의 검술

김정호 총재(왼쪽)와 해동검도 1호 사범인 최복만 사범
김정호 (세계해동검도연맹 & 대한해동검도협회) 총재는 스페인 무도 사범으로 가기 전 전수 받은 무예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먼저 김 총재는 오래 전 구해놓고 틈틈이 봐왔던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검술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어렵게 한자 뜻풀이를 해보니 책의 설명이 전수받은 술기와 일치했다. 놀라웠다. 하지만 책에 실린 실기 그림은 전수받은 자세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책 속의 그림은 뭔가 엉성하며, 조여지지 않고, 펴지지 않은 어정쩡한 느낌이다.
김 총재는 책을 들고 이모부인 김동주 씨를 찾아 갔다. 후일 김정호 총재의 ‘해동검법 개론’집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김동주 씨는 한학자로 가톨릭 출판사에 20년을 근무했었다. 또한 대한서적공사 대표를 역임한 한학과 출판의 최고 전문가였다. 책에 대한 의문점을 이야기했다. 이모부의 답은 명쾌했다. 책에 그림을 넣으려면 먼저 시연자가 무예동작을 시연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동작을 그린다. 이후 그 그림을 보고 조각을 하는 사람이 나무에 조각해 먹으로 한지에 찍어낸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사진을 이용한 디지털 출판기술이 아닌 조선시대의 출판 방식으로는 시연자의 자세를 정확히 보여주고 설명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를 감안해 책의 내용을 시연해 보니 장백산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특히 검술의 연결 부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쌍수도, 본국검, 예도 등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검술부분이 정확히 일치했다. 김 총재는 엄청난 희열과 자신감을 느꼈다.
이제 이러한 ‘검법’, ‘검무’, ‘한국의 검도’를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처음 생각해 낸 명칭은 ‘대한검도’였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미 대한검도회라는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켄도 KENDO를 한국으로 들여와 대한검도라고 쓰고 있는 것이지만 단체명을 중복해서 사용할 순 없었다. 장백산 스승에게 늘 들어왔던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겨 ‘고구려검도’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전수받은 검술이 특정시대의 검술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 고려, 조선의 검술을 모두 아우르고 있으니 특정 고대 국가의 명칭을 넣는 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고심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역사상 우리나라를 가장 존엄하고 성스럽게 표현하고 칭했던 ‘해동성국’의 해동을 빌려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탄생시켰다. ‘해동검도’라는 세계적인 무도,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브랜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한 해동검도 첫 도장 개관

해동검도 최초 도장인 안양도장에서 해동검도를 시연하는 김정호 총재
전수받은 무예에 대한 명칭과 이론적 배경을 정립한 후 1982년 3월, 김 총재는 해동검도 보급의 부푼 꿈을 안고 스페인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사범 생활을 비롯한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장백산 스승으로부터 배운 무예를 세계로 보급하고자 하는 바람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문화와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외국인에게 검의 기술과 철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결국 스페인의 사범 생활을 마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먼저 초청해준 김영구 사범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 이렇게 3개월간의 스페인 생활을 끝내고, 그 해 5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할 일은 분명했다. 먼저 전수받은 무예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에 기반을 만든 후에 세계로 나간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첫 도장을 개관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백산 스승에게 해동검도를 전수 받았던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낸 최복만 사범이 합류했다. 최 사범은 해동검도 제 1호 사범으로 이때부터 해동검도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도장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최사범과 안양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도장을 얻고 차릴 돈은 턱없이 부족했고, 후원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던 중 안양의 이만성을 만나게 된다. 이만성은 ‘남정일식’이라는 일식집 사장이다. 음식점 경영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빌딩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해동검도 첫 도장 개관에 큰 도움을 줬다. 1층에 남정일식이 위치한 이만성 사장의 건물인(안양시 안양1동 674-250) 남정빌딩 4층에 세계 최초의 해동검도 첫 도장이 탄생하게 된다. 보증금도 없었다. 그저 10만원이 안 되는 월세를 다달이 내면 됐다.
도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없어 간판이나 현판을 단다는 건 엄두도 못 냈다. 바닥에 깔 매트나 다다미는 사치였다. 그저 일식집 중고 다다미 몇 장을 얻어 도장 바닥 사이드에 깔았고, 운동하는 공간은 그냥 맨바닥이었다. 사무실에 가져다 논 책상 하나, 소파, 검 걸이, 해동검도 도복에 진검, 목검이 다였다. 그래도 도장인지라 어렵게 전화 한대를 개설했다. 3국에 3854, 당시 전화번호다. 이 번호가 최초 해동검도 도장의 전화번호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했다. 이 역사적인 감동의 순간에 장백산 스승님이 절실히 생각났다. 지금 눈앞엔 안 계시지만 어디선 꼭 지켜보고 계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2년 7월 24일, 해동검도 최초의 도장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해동검도 최초 도장은 ‘해동검도 총본관’ 이라는 명칭으로 안양 – 서울 서초동 – 삼성동 – 오금동 – 압구정동 – 분당 야탑동을 거쳤다. 28년간 유지되며 현재는 분당 정자동(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54-2 금성프라자 3층)에서 해동검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으며 지난 10월 23일 매달 치러지는 정기 승급심사를 353번째 개최하였다.
<海東劍道 이야기> 7편 : 해동검도를 거쳐 간 많은 사람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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