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東劍道 이야기]④무림픽(Mulympic)을 염원하며 검을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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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 스승과의 이별 후 접하게 되는 심검도
김정호(세계해동검도연맹 및 대한해동검도협회) 총재가 장백산 스승에게 배운 가장 큰 정신적 가르침이라면 바로 ‘염원(念願)’ 이다. 염원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포기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절대적인 믿음이다.
1971년 여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 총재는 장백산 스승과 마지막을 맞이한다. 10년간의 수련을 통한 장백산 스승의 가르침은 간단명료했다. ‘네가 배운 것을 넓은 세상에 알려라.’ 그간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배운 것은 간단한 술기가 아니라 그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과 마음이라는 것을 장백산 스승과의 이별을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이 없다면 술기는 그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또한 깨우치게 된 것이다. 김 총재는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무예의 ‘염원’이 함께한다면 무언가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후 김 총재는 구체적인 3가지의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바로 무예올림픽(Mulympic)의 개최와 대회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무도원,Mudowon)의 설립, 그리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도장의 활성화였다. ‘도장 – 무도원 – 무림픽’이라는 염원으로 김 총재의 앞길은 어긋남이 없었다.

2000년 4월 용인신문에 실린 심검도 도장 관련기사
김 총재는 염원의 실현을 위해서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장백산 스승과의 이별 후 더욱 무예수련에 정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당시 신당동에 위치한 심검도 도장(당시에는 심검술)을 찾게 되고, 약 2년간 김창식 총재(세계심검도협회)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심검도는 김창식 총재가 창안한 무술이다. 전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불교계가 어수선한 시절 서울 화계사의 주지로 있던 이행원 스님이 절을 보호하기 위해 정도술 안일력 관장과 손잡았다. 당시 정도술 사범이던 김창식 총재는 그 후에도 화계사에 머물며 이행원 스님의 도움을 받아 심검술을 창안했다. 후일 김창식 총재는 심검도를 전국 화계사 계열 주지스님들에게 전파했다.
당시, 검도라는 명칭은 대한검도회에서 쓰지 못하게 했다(후일 해동검도 측에도 압력을 행사해 결국 단체 대결의 상황까지 연출하게 된다). 온갖 방법을 동원도 압력도 즐비했다. 하지만 김창식 총재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고, 일본의 죽도가 아닌 목검, 봉 등을 사용한 한 손 검법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이 같은 노력은 일본에서 김창식 총재를 초청해 검도 7단과의 대련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련에서 김창식 총재가 그를 일격으로 제압한 사건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심검도 도장은 신설동을 거쳐 신길동으로 이전했다. 이런 가운데 김창식 총재는 더욱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심검도를 보급했다. 그는 활발한 활동을 통해 국위를 선양하며 현재까지도 보스턴에 본부를 두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신길동의 심검도 도장은 수련생이었던 정도근 신임관장이 맡게 됐고, 김정호 총재는 사범으로 근무하게 된다. 사범이었던 김 총재는 운동뿐만 아니라 도장 운영까지 도맡아했다. 하지만 20세의 나이에 도장을 맡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이외에도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했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무술도장이라는 소리에 쉬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주변 관장들의 도전(일명 도장깨기)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맞서 싸우는 방법외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결국 김 총재는 12명의 관장들을 목검으로 모두 제압했다. 또한 한밤중에 들이닥친 깡패두목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정중한 사과까지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일이 주위에 퍼지자 ‘예쁘장한 김 사범’, ‘건드리면 폭발하는 사범’으로 알려지며 더 이상 도장깨기 도전자가 찾지 않았다고 한다.
1974년 말, 군 입대를 앞두고 김 총재는 신길동에 위치한 심검도 도장의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김 총재와 심검도의 인연도 끝을 맺었다.
* 참고 : 2000년 4월 용인신문에 게재된 내용
나한일은 1974년 심검도 창시자 원광 대선사님이 도미하기 전까지 화계사 시절부터 원광 선사님의 제자였다. 나한일은 심검도의 한국 일대 제자였다.
원광선사님 도미후 세계심검도 한국 본부장으로 활동하던 나한일은 TV에서 인기상승으로 급기야는 심검도를 배신하고 해동검도라 칭한다. 나한일은 심검도 330형중 36형을 배웠으며 심검도 1.2단 과정을 해동검도 3.4.5.6단으로 나누어 가르치고 있다. 더우기 격검은 전수하지도 않고 없음으로 해서 세계인들이 심검도의 기초를 다른 이름으로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맨손무술인 신법의 전수도 한국에서는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이제 한국인들도 심검도의 진수 진정한 무도를 배워야 할 때다.(위 그림 왼쪽하단에 게재)
예고 - <海東劍道 이야기> 5편 : 심검도와 기천, 그 소중한 인연들.
해동검도와 함께 회자되는 심검도와 기천, 그 만남과 교류의 인연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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