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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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명 사범의 글 ‘9월 4일의 코미디’를 읽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고 세월의 연륜이 쌓이면 지난 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자기가 행한 실수를 돌이켜보고 혼자서 얼굴을 붉힐 때가 많은 법이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누구에게 실수라도 한 양이면 언젠가는 그 당사자를 만나서 사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고,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연륜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나 역시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순간이 많았다. 예전 독일 유학 시절에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다고 택시기사와 길거리에서 주먹다짐을 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당시 젖먹이였던 아들이 차 안에서 아무런 표정 없이 아빠가 무엇을 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모습에 너무도 충격을 받고 부끄러운 나머지 더 이상의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떴으며, 그리고는 사흘 동안 밤잠을 설친 기억이 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내 아이의 조용한 눈이었다. 이 아이의 눈에 아빠라는 존재가 어떻게 비칠까? 혹은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들자 왜 그리도 부끄럽던지.
다른 한 편으로는 세상이 어렵더라도 떳떳하게 살아야 할 힘을 주는 것 역시 내 아이의 눈이다. 내 능력으로 돈을 물려줄 처지도 아니고, 큰 명성을 남겨줄 형편도 아닌 나에게 남은 최후의 선택은 바로 ‘아빠는 최소한 거짓으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라는 것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고뇌라고 생각한다. 강의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교수가 가르치고 또 그들을 판단하고 있지만, 동시에 학생들 역시 교수를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어릴 적부터 태권도로 지금껏 살아왔다. 누구처럼 운동을 잘 해서 선수생활을 했던 것도 아니지만, 태권도가 주는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저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태권도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매력은 깨끗함과 당당함이다. 동작에 여타 다른 무술처럼 군더더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산뜻하다.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막싸움꾼들의 그것처럼 지저분하거나 잔인하지도 않다. 무슨 수를 쓰던지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결과의 예술’이 아니라 어떤 동작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싸우는가의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도 내가 발견한 태권도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나를 가르치신 분께 대한 존경의 마음도 대단했다.
그런데 최근 태권도계에서 보여주는 소위 ‘태권도 원로’들의 행보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문제는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은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이는, 그들만의 뻔뻔함이다. 한 때는 도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태권도정신을 이야기했을 그들이 지금 만천하에 보여주는 행태는 과연 저 분들이 태권도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한다.
2009년 9월 7일자 무카스에 얼굴을 나타낸 이경명 사범의 글이 나에게 준 것은 실망과 분노 그 자체이다. 이 사람도 과거에 태권도를 했던 분인가. 어째 나이가 들어서도 비열하게 남의 뒤를 치는 행위로 살아가는가. 이제 그 나이 들어서 무슨 부귀와 영화를 더 보겠다고 저런 더러운 글을 쓰시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글 함부로 쓰지 마라. 그 글에서 당신의 인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글을 읽는 많은 후학들에게 당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보일지, 혹은 당신의 그 글을 통해서 태권도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다시 한 번만 생각한다면 소위 천하가 아는 ‘이경명’이란 이름으로 저런 더러운 글을 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경명 사범의 글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싶지 않다. 논리적 분석이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글에 대해서만 하는 법이니까.
글 속에서 당신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이야기했다. 과연 당신의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을까? 더러운 글을 쓰면서 건수 하나 잡았다고 즐거워하지는 않았고? 거짓말도 자꾸 하면 버릇된다. 이런 경우에 ‘찢어지는 가슴’을 이야기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정 가슴이 아프면 ‘안타깝다’는 표현 정도로 족하다.
이경명 사범과 박수남 부총재 그리고 나는 모두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평소에 호형호제 하면서 지내는 당신이 태권도의 날에 불참한 사실로 글을 쓰기 전에 박 부총재에게 전화라도 한 번 해서 “박 부총재. 그 자리에 안 보이시던데, 어찌된 일이오?”하고 물을 수는 없었던가?
나, 이제 당신의 그 가증스러움을 미워한다. 이경명 당신이 개에게 던져 주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그 개똥 태권도철학을 이야기해도 나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난 해에 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일체의 대외활동을 접고자 했기에 지금껏 조용히 있었으나, 이런 나를 다시 논쟁의 장으로 불러낸 당신의 그 더러운 글을 미워한다.
그 나이에 무엇이 또 탐나던가? 지난해에 세계연맹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직후 당신과 나와 박수남 부총재가 강남 어느 뒷골목에서 만나 소주를 기울이며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심경을 토로할 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낚싯밥을 조심해라. 그 싸구려 낚싯밥에 당신 인생의 색깔이 달라진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나마 당신에게 고마운 부분이 하나 있다. 나에게 교훈을 하나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이경명처럼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교훈 말이다.
예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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