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연재

[강상구 마이애미 정착기]③벤치 지키는 미식축구 키커

[강상구 마이애미 정착기]③벤치 지키는 미식축구 키커

1991년 5월 마이애미비치 'Sang's taekwondo'


발차기 ‘한 방’으로 저는 25번을 차서 24번을 성공시키는 성공률 96%의 미식축구 키커가 됐습니다. 미국에 온 뒤, 딱 2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죠. “그래, 미식축구 선수로 대학까지 가자.” 미래의 청사진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young's taekwondo(관장 도영수)에서 검은 띠를 두르고 발차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고교시절은 태권도와 미식축구로 꽉 채워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대학 진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죠. 바로 미국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SAT 점수였습니다. 수학은 800점 만점 중에 660점을 맞았는데, 영어에서 290점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것입니다. 알파벳 A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온 미국인지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좌절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때마침 메를린이라는 한 백인 아주머니께서 한국에서 온 동양인 꼬마의 후원자가 되 주었습니다. 부족한 점수를 어떻게 만회해야 하는지, 또 어떤 대학에 지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저의 은인입니다.

틀에 박힌 감동 스토리일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제 꿈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미식축구로는 미국 'TOP 5' 안에 드는 플로리다주립대학교(FSU)에서 저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입니다. 10명이 넘는 키커들이 지원했는데, 그중 2명이 선발됐습니다. 뛸 듯이 기뻤죠.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저와 같이 뽑힌 백인 선수가 부상당했을 경우를 대비한 후보 선수였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미국 탤러해시(Tallahasse)에 위치한 FSU 근처에는 거의 백인과 흑인들만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거기서 동양인을 찾기란 별따기였죠. 사람들은 저를 “헤이, 차이니즈”라고 불렀습니다. 저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국적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항시 그들에게 저는 중국인이었죠. 대학에 다닌 3년 동안 단 한번도 정규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저 백인 친구만 없으면 나도 출전할 수 있는데, 쟤는 왜 이렇게 다치지도 않는지”라는 원망도 했습니다.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FSU 시절 강상구 관장(오른쪽)이 공을 차고있다

1987년, 이런 저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습니다. 7만 관중이 모여든 내셔널챔피언십대회 FSU와 마이애미대학과의 경기에서 였습니다. 그날따라 그 백인 키커가 4번을 연속으로 실수를 범했습니다. 선수 대기실 입구에서 코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죠. 결국 코치와 눈이 마주친 저는 “Please”이라는 단어를 연발하며 한번만 출전시켜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돌아온 대답은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느냐. 다른 코치에게 얘기해라”였습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를 보고 가슴을 움켜잡으며 “로렉스 시계라도 코치한테 사줘보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상태였죠.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미식축구 그만 두겠습니다.”

그 즉시 저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FBI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학에서의 전공이 범죄학이었던 까닭에 원래 내 길을 가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플로리다주 법무부 소속의 조사관으로 채용됐습니다. 범죄자들의 지문을 조회하고 수사하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회사 내부적으로도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미식축구에서도 회사에서도 저는 그저 그런 동양인일 뿐이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것이 무었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도복과 띠를 다시 꺼내어 입어 봤습니다. 거울에 비친 ‘태권도인’ 강상구의 모습은 미식축구 유니폼보다, 또 제복보다 훨씬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그날부터 약 6개월간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매일 발차기를 하고 품새를 연습하며 예전의 몸으로 회복하기 위해 훈련했습니다.

1991년 5월. 드디어 마이애미비치에 'Sang's taekwondo' 도장을 개관하게 됐습니다. 지금 마이애미 전역에 퍼져있는 7개의 'Sang's martial arts TNT'의 효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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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힘드셨겠습니다 2009.08.21
읽어보니 미국 생활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이애미는 더욱 비싸고 차별이 심했을 것 같은데 성공하신 한국인의 모습을 보니 위안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