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연재

[황현철의 복싱인사이드]⑦프로복싱의 세계적 추세

[황현철의 복싱인사이드]⑦프로복싱의 세계적 추세

세계기구의 난립


WBA(오른쪽부터).WBO, WBC의 공식 로고


체급별 세계챔피언은 한 명이라는 당연한 논리는 더 이상 프로복싱에 적용되지 않는다. 세계복싱기구는 1960년대 후반부터 WBA(세계복싱협회)와 WBC(세계복싱평의회)로 양분됐다. 이어 1983년 중남미가 장악한 프로복싱 기구에 반대한 미국 중심으로 IBF(국제복싱연맹)의 전신인 USBAI가 창설됐다. 끝이 아니다. 1988년에는 WBO(세계복싱기구)까지 생겨버렸다. 이후 IBA, IBC, WBF, IBO 등 일일이 나열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기구들이 난립하게 됐다.

이로 인해 현재 세계챔피언의 가치는 떨어졌다. 1970~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처지가 되어버렸다. 현재 WBA, WBC, IBF, WBO 만을 주요 4대 세계기구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이 역시 공인된 바는 아니다. 일본은 아직도 WBA, WBC만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특급 선수들이 각 기구로 분산되면서 WBA와 WBC 챔피언들의 기량도 과거에 비해 평균적으로 현저히 낮아졌다.

게다가 각 기구마다 잠정챔피언 제도와 슈퍼챔피언 제도까지 신설됐다. 이는 한 기구에서 한 체급의 세계챔피언이 세 명이라는 웃지 못 할 촌극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실제로, ‘WBA 슈퍼플라이급 정규챔피언’은 나시로 노부오(일본)다. 하지만 빅 다치니얀(호주)은 ‘WBA 슈퍼플라이급슈퍼챔피언’이며, 최요삼과의 대전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호르헤 아르세(멕시코)는 몇 달 전까지 ‘WBA 슈퍼플라이급 잠정챔피언’으로 각각 등재되어 있었다.

당초 다치니얀이 아르세를 11회 종료 TKO승으로 누르고 슈퍼챔피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에 잠정챔피언이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WBA에서는 8월 15일로 예정된 필리핀의 ‘하드 히터’ 노니토 도네어(IBF 플라이급 챔피언)와 라파엘 콘셉션(파나마) 간의 경기를 슈퍼플라이급 잠정챔피언 결정전으로 승인해 버렸다.

잠정챔피언과 슈퍼챔피언


잠정챔피언(Interim Champion) 제도는 WBC에서 가장 먼저 채택했다. 1992년 WBC 밴텀급 챔피언이던 ‘일본의 국민영웅’ 다쓰요시 조이치로가 눈 부상으로 타이틀전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당시 1위였던 이용훈과 2위이던 빅토르 라바날레스(멕시코)간의 잠정챔피언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적어도 90년대 후반까지 잠정챔피언 제도는 챔피언이 부상 때문에 당장 방어전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치러질 수 있도록 철저하게 통제됐다. 또한 잠정챔피언은 정규챔피언이 부상에서 완쾌될 경우 반드시 ‘왕좌통일전’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는 달랐다. 세계기구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각종 자칭 세계기구에 좋은 선수들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결국 메이저 4대 기구는 무분별하게 잠정타이틀매치를 승인하기 시작했다. 프로복싱의 저질코미디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기구들로서는 잠정타이틀매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정료 수입과 음성적인 각종로비 비용까지 챙기게 되는 경제적 이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국내 프로복싱의 인정료는 경기 당일의 심판, 구급차, 링 닥터, 경기 진행 요원들 등의 수당으로 모두 지출되지만 국제기구의 경우 국제기구의 유지비로 사용된다). 또 WBA에서는 슈퍼챔피언 제도를 신설한다. 5차 방어에 성공한 챔피언이나 타 기구 챔피언과의 통합전에서 승리할 경우 ‘슈퍼챔피언’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줬다. 이로 인해 타이틀은 공석을 만들어 새로운 챔피언 결정전을 승인해 준다(2007년부터 5차 방어 조항은 없어져서 현재는 통합챔피언만 슈퍼챔피언으로 인정한다). 현재 WBC에서도 슈퍼챔피언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IBF와 WBO는 이 제도를 신설하지 않았다.

매니 파퀴아오가 영국의 리키 해튼과 경기를 가지고 있다


허물어진 체급의 벽

며칠 전 타계한 알렉식스 아르게요(니카라과)가 1982년 11월 12일 아론 프라이어(미국)에게 4체급 석권을 걸고 도전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링의 귀공자로 불리던 세기의 복서 아르게요에게도 네 체급은 벅찼다. 아르게요는 프라이어에게 두 번에 걸쳐 도전했으나 도합 24라운드 동안 수많은 난타를 당했다. 결국 그는 4체급 제패의 꿈을 접어야 했다.

밴텀급의 ‘KO 아티스트’ 카를로스 사라테(52연승 51KO승)가 한 체급 위의 ‘KO왕’ 윌프레도 고메스(32승 32KO승 1무)의 경기도 있다. 이 경기에서 사라테는 고메스에게 KO패를 당했다. 사라테를 KO시킨 고메스는 역시 한 체급 위의 WBC 페더급 챔피언살바도르 산체스(멕시코)에게 도전한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한 KO패였다. 그만큼 높았던 체급의 벽이 이제는 거의 허물어졌다. 한 체급에 세계챔피언이 4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추세라면 3체급, 4체급 석권은 더 이상 흥밋거리가 될 수 없다.

오스카 델 라 호야의 사상 최초 6체급을 제패가 지금과 같은 단일기구 또는 WBA, WBC 양대 기구체제였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초등학생이 들어도 고개를 갸웃거릴 현재 세계기구들의 행태가 변칙적으로 자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복싱이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타이틀매치가 벌어지면 관중이 있고, 시청자가 있다. 물론 국내의 상황은 다르지만 세계 곳곳에서 프로복싱은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그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기 어렵다. 월드컵 축구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야구와 같은 흥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미국에 더 이상 헤비급 챔피언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오스카 델 라 호야가 떠났다. 이후 메이웨더와 파퀴아오까지 떠난다면, 복싱에 대한 대중의 관심 역시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1983년 신생기구 IBF의 도입은 WBA와 WBC 양대 체제에서 국민 스포츠로 사랑을 받던 프로복싱의 인기 하락의 첫 번째 요인이기도 하다. 무분별한 기구의 난립, 이제 전 세계의 복싱팬들은 언제 어떻게 등을 돌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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