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형의 얼바인 산책]가슴에 묻은 나의 제자 네이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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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잊지 못할 사람들①
어제 수업을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문득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태권도 사범으로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와 첫 수업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넘었더군요. 마음은 항상 청춘인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속일수가 없더군요. 태권도 사범으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태권도를 통해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특별한 추억이 많습니다. 태권도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행복이죠. 그래서 이번 '산책'부터는 제자들을 통해 간직한 추억의 장을 한 장씩 넘겨보려 합니다.

얼바인 텔륨도장에서 수업 중인 이승형 사범
첫 번째 책장에 소개할 제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 제법 고민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중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아니 가슴에 묻어 놨던 한 사람이 나타나더군요. 1998년, 당시 캘리포니아의 한 지역에서 2곳의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근교의 장애인 재활치료센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교통사고로 반신불수인 사람인데, 물리치료를 계속해도 차도가 없습니다. 당신 도장에서 장애인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도 도장에 보내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 날, 30대 중반의 네이트(Nate)라는 이름의 백인 여성이 재활센터 직원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죠. 손이 어깨에도 올라가지 않았으니까요. 스트레칭 중심의 개인수업을 진행하면서 네이트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1년 정도 지나자 발차기는 물론 품새까지 소화해 냈습니다. 재활치료센터 직원들도 그녀의 상태에 놀라움을 나타냈죠. 특히 우울증 심각했던 네이트의 밝아진 모습에 반색을 표시했죠.
사실 네이트는 신체장애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재활센터 한 직원이 저에게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알려줬습니다. 어느 날 재활센터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네이트가 공황상태에 빠져 자해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직원은 저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는 ‘마스터 리’만 믿고 있습니다. 설득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행히 네이트는 나와 전화통화 후 자해 시도를 중지했습니다. 재활센터에서는 몇 번이고 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녀는 태권도를 통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 나갔습니다. 도복을 입은 네이트는 누구보다도 활발했고 기운이 넘쳤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린벨트 심사에 합격한 네이트가 점프 발차기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걱정이 됐지만, 그녀의 도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발차기를 멋지게 성공했지만 착지를 하면서 무릎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기브스를 하고서 도장에 나왔습니다. 운동은 하지 못했지만, 네이트는 3개월간 수업시간에 빠지지 않고 도장을 찾았습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천청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네이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네이트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립니다. 네이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는데, 그녀에게 맞게 태권도를 더 잘 가르쳤어야 했는데…”라는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저도 모르게 도장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권도를 배우는 친구들에게 좀 더 눈길이 갑니다. 가슴 속에 묻은 나의 제자 네이트. 그녀는 천국에서도 태권도 수련을 계속하고 있을 겁니다.
* 이승형의 얼바인 산책은 격주 수요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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