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변천사]‘흑심’으로 시작된 격투기대회들
![[격투기변천사]‘흑심’으로 시작된 격투기대회들](https://mookas.com/webzine_img0/con_img/news_image/crocop-h.jpg)
대회를 개최한 격투기단체들 궁국의 목표 추구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진행했던 격투기대회의 시작은 1993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K-1대회가, 미국에서는 UFC가 이 해에 첫 대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후 4년뒤 프라이드의 출범이후 수많은 격투기 대회들이 생겨났다. 이 같은 격투기대회는 다른 스포츠종목들처럼 소속협회에서 개최한 것이 아니었다. K-1은 극진회관(가라테)에서 분리해 나온 정도회관이 개최했고, UFC는 브라질리안 주짓수의 시초 그레이시 일가에서 기획한 것이다. 또 프라이드는 KRS(쿠로사와 히로끼의 약자, 쿠로사와는 선수출신의 대회운영자)라는 개인단체가 대회를 출범시켰다. 이는 각 단체들이 대회를 통해 얻고자 했던 '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카스> 기획연재 ‘격투기변천사’ 3화는 각종 격투기대회의 출범 당시의 비화에 대해 알아봤다. -편집자 주-
1. 옛날로 회귀하는 격투기 - 2월13일
2. 격투기의 모체 실전프로레슬링 - 2월20일
3. ‘흑심’으로 시작된 격투기대회 - 2월28일
4. 격투기 붐과 프라이드의 몰락(가제) - 3월6일 예정
5. 일본과 미국의 격투기 시장(가제) - 3월13일 예정

K-1(왼쪽)과 UFC의 공식마크
NO.1 가라테를 노린 K-1
1993년 4월 30일 정도회관은 ‘K-1 GP 93 10만 달러 쟁탈 격투기 세계최강 토너먼트(정식명칭, 이하 K-1 93)’를 개최한다. 이 대회를 통한 정도회관의 주목적은 가라테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런 정도회관의 욕심은 당시 대진표만 봐도 알수 있었다. 정도회관은 ‘떠오르는 별’ 사타케 마사아키를 위해 우승후보로 손 꼽히는 선수들을 다른 블록으로 몰아 넣었다. 정도회관은 물론 사타케 또한 우승을 자신했다. 사타케는 지난 10년간 정도회관에서 개최하는 실전가라테대회와 많은 타 단체대회를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봐야 아는 법이라 했던가. K-1 93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크로아티아의 브랑코 시카틱이 우승을 차지했다. 팬들은 “K-1에는 진짜 승부가 있다”며 열광했지만 정도회관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4년 간 정도회관은 최강 가라테를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1996년 ‘푸른눈의 사무라이’ 앤디 훅(스위스, 1964~2000)에 의해 단 한 번의 가라테챔피언이 탄생했을 뿐이다. 이후 정도회관 소속의 세미슐트가 2005년부터 3회 연속 K-1 최강자에 올랐지만, 아직 일본인이 우승을 차지한 적은 없다.
그레이시 주짓수(유술) 전파를 노린 UFC
그레이시 주짓수(브라질 유술)의 창시자인 엘리오 그레이시의 아들 호리온 그레이시는 UFC를 출범시킨다. 여기에는 UFC를 통해 그레이시 주짓수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레이시 일가는 어눌하고 빈약해 보이는 호이스 그레이시를 경기에 내세웠다. 연약해 보이는 호이스가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레이시 일가의 예상대로 호이스는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미국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당시 UFC는 무규칙, 무체급, 시간 무제한 등으로 상당수가 지루한 경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조금씩 룰이 개정됐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호이스는 ‘UFC1’에 이어 2회와 4회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인해 그레이시 주짓는 한때 세계최강의 무술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와 더불어 UFC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후 UFC에 상업논리가 지배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레이시 일가는 “UFC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며 UFC를 팔고 떠나버렸다.

UFC(왼쪽부터)와 K-1 그리고 프라이드까지 활동했던 미르크 크로캅
흥행을 위해 단발성대회로 시작한 프라이드
KRS는 1997년 프라이드의 첫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앤디 훅의 우승으로 K-1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더불어 격투기의 인기도 높아졌다. KRS는 이틈을 노려 ‘발리 투토 400연승 신화’ 힉슨 그레이시와 ‘프로레슬링 에이스’ 다카다 노부히코의 대결을 성사시켰고, 급하게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가 바로 프라이드다. 당시의 프라이드는 프로레슬링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격투기대회가 토너먼트를 추구하는 반면 프라이드는 프로레슬링의 원 매치(One-Match)방식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프로레슬링은 강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다카다가 힉슨을 이길 것이라고 기대로 이어졌다. KRS의 계획이었던 흥행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경기시작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다카다가 힉슨의 그라운드를 의식해 로프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로프를 잡는 반칙을 연발했다. 또 힉슨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않고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이날의 패배는 오히려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타도 그레이시’를 외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단발성 대회였던 프라이드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힉슨 또한 경기 직후 “이런 대회가 지속된다면 은퇴를 미루더라도 계속 출전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프라이드2는 1년 뒤인 1998년 요코하마에서 다시 열렸다.
[김성량 수습기자 / sung@mookas.com]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