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철의山山水水] '닥터 김'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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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이야기 - 30년지기 후배를 축하하면 욕 먹는다?
이 코너 여섯 번째 이야기(ITF 유언장논쟁)에서 감히 ‘상식이 통하는 ITF를 바란다’라고 쓴 바 있다. 그런데 이를 좀 수정해야겠다. ITF 대신 ‘태권도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도록 만드는 ‘작은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 게다. 뭐 태권도계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마저도 삐뚤어지게 보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주인공은 77세의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이다(이후 호칭은 김 전총재라고 하겠다. IOC위원도 위원이지만 세계태권도연맹의 창설 총재로 ‘전 총재’가 음절이 짧은 까닭에 표현하게 좋다. 불요한 오해는 사절). 그리고 조연은 그의 비서 S씨다. 참고로 김 전총재는 한 때 비서(보좌관 포함) 숫자만 20명에 달했다. 뭐 IOC위원, 대한체육회장, 국회의원, 국기원장, 세계태권도연맹총재, 대한태권도협회장 등 워낙에 많은 명함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비서도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서가 S씨 단 한 사람뿐이다.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하나 둘씩 다 떠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S씨는 김 전 총재가 8․15 복권 이후 일이 많아지면서 제법 고생이 심하다.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거구의 30대 남자인데 각종 서류업무부터 수행까지 모든 걸 혼자 처리한다. 심지어 태권도계 후배인 IOC선수위원이 김운용 총재를 찾아와도 편하게 인사 한 마디 못 건네고 조용히 손수 커피를 타 대접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주 S비서가 41년이나 연배인 김 전총재에게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외람된다는 것을 알지만”이라는 수사까지 동원하며 정말 어렵게 자신의 의견을 전한 바 있다. 1999년부터 ‘영감님’을 모셨으니 햇수로 10년인데 묻지도 않은 의견을 ‘예의 없이’ 먼저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저……, 총재님이 이번 영산대 행사에는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영산대 행사’는 10월27일 박수남 세계태권도연맹(WTF) 수석부총재의 석좌교수 위촉식을 말한다. 김운용 전총재는 영산대로부터 ‘축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상황이었다. 워낙 산전수전 다 겪었기 때문일까. S비서의 ‘오버’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김 전총재는 그저 이유를 물었다.
“저도 박수남 부총재님을 존경하고, 또 총재님과 박 부총재님의 오랜 관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태권도계에서는 박 부총재님이 최근 내년 WTF 총재선거에 출마한다는 얘기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만나 축하해주시고, 행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까지. 그리고 자크 로게와 IOC위원장을 놓고 ‘맞장’을 뜨기도 했는데. 정말이지 굵직굵직한 결정을 누구보다 많이 내렸을 희수(喜壽)의 김 전총재는 고민을 많이 했다. S비서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박수남 부총재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박수남 우표’를 만들 정도로 성공한 해외사범인 박수남 부총재는 김 전총재가 태권도를 세계화하고, 또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하는 데 헌신을 했다. 워낙 대인관계가 좋아 유럽의 주요 스포츠인맥에 태권도를 알렸고, 어쩔 때는 듬직한 체구를 바탕으로 김운용 전 총재의 보디가디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 전총재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영산대행에 대한 의견을 물을 정도로 생각을 많이 했다. “총재님이 이런 문제로 이렇게 고민하시는 것은 처음 봤다”는 게 S비서의 설명이다.
오해를 권하는 태권도 사회

김운용 전 총재 (지난 10월 25일 서울 힐튼호텔)
며칠 후 결론은 내려졌다. 영산대로 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마음껏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카스>가 김 전총재에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오해를 무릅쓴 이유를 물었다. “나는 WTF의 창설총재다. 지금 와서 다시 총재를 맡을 생각도 없고, 내가 나서서 WTF 문제에 대해 먼저 왈가왈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게 내 본심이다. 물론 영산대에 가서 축사를 하는 것이 미묘한 시기에 박수남을 지지하는 것으로 확대해석될 수도 있다. 내가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고 해서 즉, 내게 좀 피해가 온다고 해서 30년이 넘도록 맺어온 인관관계를 팽개치는 것은 스포츠인 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내 본심을 몰라줘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우스운 일이다. 어떻게 무도스포츠인 태권도에서 선배가 가까운 후배의 좋은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놓고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됐는가. 그것도 정치적인 이유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김 전 총재와 S비서는 최근 수년 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모진 고초를 당한 기억이 생생하기에 이번에 조심스럽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이번 행사와 관련해서는 김운용 전총재를 떠나 WTF도 참 그 모습이 보기 껄끄럽다. 박수남 부총재측은 WTF집행부에도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WTF는 조정원 총재 등 주요인사는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다. 한 임원은 “우리가 거기를 왜 갑니까”라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물론 이번 행사가 마치 ‘전당대회’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쪽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어쨌든 태권도계가 석좌교수를 배출하고, 또 주인공이 한국사람으로 현직 WTF 수석부총재인데 WTF가 애써 소 닭 보듯 하는 것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비난 WTF뿐만 아니라 최근의 태권도계는 날선 싸움이 너무 많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싸우면서도 최소한으로 지킬 것은 있다. 상식과 인간적인 도리가 뭉개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엄운규 국기원장이 사표를 내는 과정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상스러운 (그에 대한)욕설이 플래카드로 내걸리기도 했다.
어쨌든 조금도 정치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태권도인 박수남 씨의 석좌교수 취임을 축하합니다".
[유병철 선임기자 /einer@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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