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철의 山山水水] ITF 유언장 논쟁
![[유병철의 山山水水] ITF 유언장 논쟁](https://mookas.com/webzine_img0/con_img/news_image/최중화.jpg)
여섯 번째 이야기 - 상식이 통하는 ITF를 바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끝난 직후로 기억한다. 워낙 올림픽에서 ‘남북한 동시입장’이 화제가 된 까닭에 북한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던 중 한 지인을 통해 캐나다에 있는 고(故)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의 연락처를 받았다. 시차에 맞춰 전화를 했고, 특유의 절도 있는 목소리를 들었다. 국제전화로 긴 인터뷰를 하기가 힘들었던 까닭에 자세한 내용은 서면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모처럼 대인(大人)을 취재한다는 욕심에 질문을 가득 실어 팩스를 보냈더니 이틀 후 답장이 왔다. 최 총재가 직접 작은 글씨로 질문 하나하나에 답을 적어놓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이지 태권도에 대한 자부심은 정말 대단했다. 토씨 하나하나에 ‘작은 거인’의 태권도에 대한 애정이 뭍어 있었다. 친북이니 독선적이니 비판도 많지만 어쨌든 ‘태권도’라는 말을 만들었고, 또 한 평생을 태권도 보급에 힘 쓴 ‘큰인물’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2003년 평양을 방문했다. 통일농구 취재 차 드물게 육로로 평양을 다녀왔는데 평양 시내의 주요장소는 물론이고, 개성과 묘향산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랑하는 많은 곳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특히 청춘거리(안골체육촌)에 위치한 태권도전당은 ‘두 개의 조국’에 ‘두 개의 태권도’를 새삼 느낄 수 있어 기억이 남았다. 또 혁명열사능도 찾았는데 이곳에 2002년 6월에 돌아가신 고 최홍희 총재의 묘가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단체로 움직이는 일정 때문에 직접 참배하지는 못한 것이 태권도 담당 기자로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당시 ITF는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고 최 총재의 사망 후 평양임시총회를 통해 새 수장이 된 장웅ITF와 고 최홍희 총재의 아들인 최중화 사헌이 총재를 맡은 또 다른 ITF, 그리고 트란 콴의 ITF도 별도로 있었다. 평양 대성산 중턱에 누워 있는 최홍희 장군(원래 한국군 장성이었다)이 지하에서 이를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최근 최중화 ITF총재가 34년만에 귀국해 큰 화제를 낳았다. 최홍희의 아들, ITF총재에 ‘전두환 암살사건 가담’이라는 각종 수식어가 붙으면서 태권도계를 넘어 정치적으로 크게 다뤄졌다. 이에 국내에서 나란히 활동하고 있는 3개 ITF단체의 치열한 ‘정통성 논쟁’이 벌어졌다. 트란콴ITF가 한발 비켜서 있는 가운데 주로 최중화ITF와 장웅ITF측이 서로 ‘상대는 짝퉁이고 내가 진품’이라며 <무카스>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댓글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향후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어느 한 쪽이 양보하거나, 아니면 대통합을 위해 3자가 머리를 맞대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유언장 진위 논쟁 대신 임시총회의 적법성이 중요

故 최홍희 장군의 묘비(출처-태권라인)
ITF 정통성 논쟁의 핵심은 고 최홍희 총재의 유언과 관련이 있다. 평양에서 운명하기 전 고 최 총재는 유언장을 남겼다. 여기서 후계자로 장웅 북한IOC위원을 지목했다. 말할 것도 없이 장웅ITF측은 이를 가장 강력한 법통승계의 증거로 삼고 있다. 반면 최중화ITF는 이 유언장이 북한 당국의 지휘 하에 날조됐다고 강력히 반발한다. 심지어 위험천만한 ‘타살설’까지 나돈 바 있다.
이 대목에서 ITF관계자들에게 한 마디 묻고 싶다. 양쪽 모두에게 말이다. 어느 쪽이 됐건 고 최홍희 총재로부터 후계자로 지명을 받았다고 하자. 이것이 정당한 것이냐 하는 질문이다. ITF는 종교단체가 아닌 국제조직이다. 내부 조직체계가 있고, 정관이 있고, 총재 유고 등 긴급사태에 대비한 규정이 있을 것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정관에 ‘후임자는 전임자의 지명에 따른다’라고 돼 있다면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21세기의 국제조직이 봉건시대의 왕조처럼 ‘특정인의 지명’에 따라 후계자를 정한다면 그것이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다. 바티칸의 교황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최홍희 장군이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임자 지명’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ITF는 최홍희 총재의 유언을 두고 적통 여부를 따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유언이 조작됐건, 아니면 진실 그대로이건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후임 총재를 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2002년 6월 최홍희 총재가 서거했을 때 ITF는 평양에서 임시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유언장이 공개되고 장웅 북한IOC위원이 총재로 선출됐다. 최중화ITF측이 문제를 삼는다면 고 최 총재의 유언이 아닌 임시총회의 적법성을 따져야 한다. ‘규정은 이러이러한데 당시 임시총회는 이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작은 절차를 무시한 WTF

최중화 ITF총재의 입국 기자회견 모습
비슷한 실수는 세계태권도연맹(WTF)에서도 있었다. 2004년 2월 김운용 당시 총재가 사퇴했을 때, WTF는 선거를 통해 박선재 이탈리아협회장을 권한대행으로 선출했다. 사실 WTF 정관대로라면 당시 수석부총재였던 윌리엄 히블(미국)이 권한대행을 맡으면 된다. 남은 임기가 1년 이상이면 새로 뽑고, 그렇지 않으면 권한대행 체제로 김 전 총재의 잔여임기를 마치면 그만인 것이다(당시 WTF는 전자에 해당). 그런데 창시자가 갑자기 떠난 혼란스러운 시기에 WTF의 몇몇 유력인사들이 향후 WTF를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린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사람’ 대신 한국사람이 임시수장을 맡아 차기회장을 뜻대로 고르기 위해서였다. 박선재 총재권한대행이 뽑혔고, 이후 그해 6월 총회선거를 통해 참여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조정원 씨가 새총재로 뽑혔다. 그리고 2005년 4년 임기의 재선에 성공했다. 조 총재에게 ‘정권의 낙하산’이라는 꼬리표가 지금까지 붙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나마도 WTF의 실수는 작은 것 한 번, 즉 권한대행 선출에만 국한된다. 나머지는 정권의 입김이 작용했든, 안 했든 규정을 따랐다. 하지만 ITF의 내부를 살펴보면 고 최홍희 장군에 대한 지난친 충성심 경쟁을 하는 것 같다. ITF의 논쟁은 ‘진짜 최홍희 장군의 후계자가 누구냐’는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에 의해 뽑힌 새 총재가 누구냐’는 것에 포커스를 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유언장 논쟁’이 계속되면 그만큼 ‘우리 조직(ITF)은 전근대적’이라고 자충수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정말 좋은 말이다. 신선 같은 이미지의 조순 전 서울시장도, 그리고 대작가 황석영도, 심지어 인간 노무현을 대통령을 만들었던 구호도 이런 ‘상식’을 좋아했다. 정치인뿐 아니라 정말 많은 위인들이 ‘상식’을 강조했고, 또 강조하고 있다. 돌아가신 고 최홍희 장군도 지극히 상식적이었기 흉내내기 어려운 위대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분열된 ITF, 그리고 그들간의 논쟁은 정말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유병철 선임기자 /einer@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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