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K-1, 문제는 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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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이 프로복싱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장면1. 한국 프로복싱은 지금까지 40명이 넘는 WBA, WBC 양대기구 챔피언을 배출했다. 이중 해외 원정경기에서 타이틀을 따낸 이는 단 8명(9번, 이중 홍수환 2회)뿐이다. 나머지 대다수는 홈 어드밴티지을 안고 한국에서 타이틀을 획득한 ‘안방 세계챔피언’들이다. 심지어 한국 프로복싱은 태국과 미국에서는 단 한 번도 세계타이틀매치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는 진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뒤집어 해석하면 프로복싱의 심판판정이(특히 한국에서) 얼마나 원정 선수들에게 편파적이었는지를 시사한다. 이와 관련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한국의 프로복싱은 전성기에 타이틀 획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처럼 더운 나라 선수들과의 타이틀매치는 일부러 경기날짜를 혹한기로 잡았다. 심지어 경기 당일 관중에게 애국심 호소로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체육의 창문을 다 열어놓기도 했다. 또 경기장까지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도 2~3시간이 넘도록 차를 태워 상대 선수 컨디션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아마추어복싱에서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의 박시헌이 내내 두들겨맞고도 이제는 '전설의 복서'가 된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판정승한 '역사'를 만들었다(이 때문에 아마복싱에 컴퓨터채점이 도입됐다). 어쨌든 스포츠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인 공정한 판정을 소홀히한 것이 결국 '복싱 쇠퇴'에 큰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장면2. 지난 7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애틀랜타 필립스아레나에서 열린 ‘UFC 88’ 대회 웰터급(77kg이하)에 출전한 김동현이 신예 맷 브라운(미국)을 상대로 2-1로 판정승했다. 김동현은 1라운드 경기 중반 상대 선수의 등에 꼭 매달린 채 ‘리어네이키드초크’를 성공시키면서 승기를 잡아갔다. 하지만 2라운드에 접어들자, 옥타곤 철창에 몸을 기대고 맷브라운의 거센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하며 수세에 몰렸다. 간간이 안면에 정타를 허용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2라운드는 김동현의 완패였다. 결국 그를 살린 것은 3라운드였다. 경기 종료 20여초를 남기고, 극적인 테이크 다운에 성공, 엘보우(팔꿈치)를 상대 안면에 꽂아 넣으며 막판 심판들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렇다해도 3라운드 통틀어 김동현의 확실한 승리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경기임에는 틀림없었다. 아니 김동현이 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UFC의 판정은 달랐다. 맷 브라운이 미국 내에서 인기가높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더 얼티밋 파이터(UTF) 시즌7'에 출전해 우승을 했던 기대주였음에도 불구, 안방에서 간발의 차로 판정패를 당했다.경기장에서는 팬들의 야유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김동현도 자신의 승리에 다소 놀란 눈치였다. 경기 직후 링 아나운서는 김동현에게 “disputed decision(논란의 소지가 있는 판정)”이라며 대놓고 김동현에게 판정결과에 대한 생각을 묻기도 했다. 장소가 한국이고, 종목이 프로복싱이었다면 100% 브라운의 판정승이었을 것이다.
#장면3. 지난 27일 서울올림픽공원 제 1체육관에서 열린 'K-1 월드그랑프리 2008 파이널 16' 제 8경기에서 최홍만(28)은 '악동' 바다 하리(24, 모로코)를 상대로 기권패했다. 3라운드까지 최홍만의 경기는 그야말로 ‘잘 버텼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최홍만은 안면정타와 강력한 바디공격을 수 차례 허용했다. 무기력한 경기를 선보이던 최홍만이 2라운드 럭키펀치로 한 차례 다운을 뺏기는 했지만, 3라운드를 종합해봐도 최홍만의 완패였다. 하지만 K-1 심판들의 판정은 달랐다. 오히려 29-28(최홍만 승), 28-28, 28-28로 무승부를 선언했다. 무승판결이기는 하지만 내용상 최홍만이 3라운드까지는 근소하게 앞섰다는 것이다. 최홍만이 연장전을 스스로 포기하고, 또 갈비뼈가 다쳤다는 말이 나올 데미지를 입은 것은 확실한데 유독 K-1의 심판들은 이것을 못 본 것이다. 한국땅임에도 불구하고 판정을 이해 할 수 없다는 야유가 관중석에서 계속됐다. 혹여 바다하리가 패하기라도 했다면 희대 뉴스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경기 직후 K-1 서울대회에 출전한 여러 선수들이 판정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제5시합에서 레미 본야스키(네델란드)에 판정패한 폴 슬로윈스키(호주)는 지난 28일 “말도 안되는 경기였다. 심판들의 잘못이다. 레미는 이긴 것이 아니다. 내가 공격을 주도했다. 내가 패배한 이유는 하나다. 나보다 레미가 더 유명선수였기 때문”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어 제 6경기에서 에베우톤 테세이라에게 판정패한 무사시 역시 “클린치에 관한 옐로우 카드가 너무 많이 나왔다. 이런 시합은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연장전을 생각했다. 나의 눈주위 부상도 상대 버팅에 의한 것이다. 심판판정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못마땅해 했다. 무사시가 지난 수년간 K-1의 나라 일본의 간판파이터로 수없는 판정특혜를 취한 선수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이지 실소'가 나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바다 하리는 “3라운드까지 확실히 내가 이겼다. 최홍만은 나를 한 대밖에 때리지 못했다”면서도 “한국에서의 경기라는 것에 더욱 신경썼어야 했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서 확실한 승부를 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바다 하리는 인터뷰 내내 심판판정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판정은 궁극적으로 팬들에게 외면받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정말이지 구시대적이다. 혹시나 K-1이 복싱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28일 K-1주최사인 FEG의 타니가와 대표는 '의미 있는' 멘트를 던졌다.“일본보다 한국 팬들의 환호가 더욱 뜨겁다.”립서비스일지 모르지만 깊게 생각하면 K-1의 고민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일본 내 K-1의 인기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관중은 줄고, TV시청률도 떨어지고 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K-1의 역사가 짧은 까닭에 '아직은' 인기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최홍만이 확실하게 진 경기를 슬쩍 뒤집어놨다고 해서 열광하는 한국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있다하더라도 그런 팬들은 과거의 복싱팬들처럼 문제가 되면 뒤도 안돌아보고 순식간에 떠날 것이다.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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