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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과의 싸움에 나선 강원식



1960년 후반 태권도장을 개관한 강원식은 도장을 경영하면서 지역사회의 체육 발전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마포구 예비군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했고 마포구체육회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이 그를 평생 태권도 행정의 길로 이끌었던 셈이다.

강원식이 태권도 행정의 길에 처음 나선 것은 1973년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2년에 국기원이 문을 연다. 이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수많은 관으로 분열되어 있던 태권도계를 단일하게 상징하는 중앙도장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태권도계는 국기원을 개관한 후 바로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국기원에서 개최하게 된다. 이때 강원식은 대회조직위원회 수송부 차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대회 준비에 동참했다.

그런데 당시 대회조직위원회 시설부장이었던 고재천이 현역 육군 대령이었다. 국기원이 문은 열었지만 아직 선수들을 맞아 대회를 치를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시설부장이 해야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고재천은 현역 육군 대령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수행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회조직위원회에서는 회의를 열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강원식이 그 자리를 맡게 된 것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현 국기원 부원장인 이종우의 추천으로 40대 선배들이 즐비한 조직위원회에서 그는 당시 30대의 나이로 시설부장을 맡게 되었고 그의 성실성과 역량이 여기서 검증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국기원이 자리잡은 강남 땅은 허허벌판이었다. 역삼동엔 전혀 집이 없었고 신사동에 여관이 하나 있었다. 강원식은 시설부장 자리를 맡자 마자 여관방을 잡아 놓고 집에도 가지 않고 일했다. 그는 비상근 임원이었지만 상근 임원들 못지 않게 조직위원회 일에 최선을 다했다. 헌신적인 그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국기원에서의 제1회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후 우연히도 1973년 후반 그에게 바로 또다른 기회가 생겼다. 바로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사무차장이었던 최웅희가 미국 이민을 가게 됐고 강원식이 그 자리에 추천된 것이다. 강원식은 "아마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일할 당시 열심히 일해 일정을 받은 것 같다"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무총장이라는 직제가 있어서 현 국기원 부원장인 엄운규가 그 자리를 맡고 있었는데 강원식은 바로 그 밑에서 일하게 됐다. 그런데 엄운규 당시 사무총장이 상임부회장을 하게 되면서 사무총장직이 없어지고 전무이사직이 생기는데 강원식이 이를 맡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만 두 차례에 걸쳐 14년간 하게 된다.

강원식이 협회가 들어가 요직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임원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다. 신진 인사였던 그가 협회에 들어가 보니 완전히 무법천지였다. 지금도 승단 심사와 관련된 비리가 심심찮게 문제되고 있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심해서 승단 심사로 인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강원식의 대나무 인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원칙과는 거리가 먼 정실이 판치는 태권도계에서 그것도 그 심장부에서 그는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벌인 최초의 투쟁은 바로 인준단과의 싸움이었다. 당시만 해도 청도관, 무덕관 등 각 관에서 단을 주면 협회에서는 인준만 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제도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댓글 1

태권쨩 2001.02.07
아직도 만연한 태권도의 부정과 부조리의 뿌리를 뽑아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