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소년 강원식

태권도 신문사 사장 강원식. 많은 태권도인들은 그를 대나무 같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대한태권도협회의 전무이사, 국기원 부원장, 국기원 연수원 부원장 등 태권도 행정의 요직에 있었으면서도 그 흔한 직무 관련 비리 한 건 없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그렇게 오랜 세월 세계태권도연맹의 총재이자 국기원 원장이고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김운용씨와 일하면서도 다른 태권도인들과는 달리 김운용씨에게 태권도를 위해서라면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대나무 같은 태권도 인생을 돌아보자.
강원식 사장은 1938년에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계기는 여느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린중학교 재학 시절 그의 집은 서울 마포구 아현동이었고 선린중학교는 원효로에 있었다. 마포에서 원효로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면 전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런데 늦은 밤에 귀가하게 될 때는 그 길을 걷기가 불안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 당시엔 더욱 세상이 어수선했고 치안도 불안했기 때문에 깡패들이 많았다. 이 얘기는 모든 태권도 원로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당시 한국사회의 혼란상을 잘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다가 소년 강원식은 성격도 내성적이었고 연약했다. 그래서 내 몸은 내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당시 살던 동네에 송무관 공수도 도장이 있어서 그곳에 나가게 됐다. 여기서 그는 송무관 창시자 노병직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그의 태권도 인생의 출발이다.
원래 송무관은 개성(한국전쟁 전까지는 남한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에 있던 도장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난 나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소년 강원식이 살던 서울 마포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초단을 딸 때까지만 다닐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는 법, 그는 태권도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그의 부친은 당시 마포에서 큰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글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장남으로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했다. 그러다가 그는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이 선포되는 바람에 군대에서 2개월 더 덤으로 복무하고 제대하게 된다.
그 후론 아버지의 사업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고 지역사회에서 나름대로 힘을 가져야할 필요를 느낀 그는 자신의 집 3층에 사범을 채용해 도장을 차린다. 여기서 힘이란 지역사회의 공무원이나 경찰에게 얕보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어찌보면 제재소 사업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시작한 도장이 그를 평생 태권도계에 머물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태권도 송무관 마포본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이 자리에서 4년간 도장을 운영한다.
프로필
1938년 서울 출생
1952년 송무관 입관
1960년 태권도 송무관 마포본관 개관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시설부장 역임
1973년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취임
1980년 국기원 부원장 겸임
1981년 국기원 부원장,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사퇴
1982년 국기원 태권도지도자연수원 부원장 취임
1987년 태권도학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취임
1989년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로 재취임
1996년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사퇴
1996년 태권도신문 사장(현)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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